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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색 종소리, 지옥을 씻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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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를 완성한 레온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검은 늪지대의 오염이 은빛으로 정화되기 시작했다.


그의 등 뒤로 펼쳐진 찬란한 은빛 날개 형상의 아우라는 마력 1성이라는 현실의 한계를 비웃듯 장엄하게 일렁였다. 현대 정신분석학 전문가로서 스스로의 나약함과 과거의 실패를 완벽히 인정한 서준우. 아니, 이제는 이세계의 장님 신부 레온으로서 완전히 거듭난 그의 정신 인지 지수는 100%, 즉 흔들림 없는 ‘절대 이성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크, 크아아아악! 어떻게, 어떻게 내 독기가 통하지 않는 것이냐!”


카일의 무의식 심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기생 몽마 그리드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 레온의 전생 트라우마인 현대 지구의 환영을 이용해 그의 자아를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던 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레온의 내면에는 그 어떤 정신 오염도 침투할 수 없는 완벽한 무균실인 ‘정신적 격리실’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몽마의 비열한 가스라이팅과 죄책감 유도는 더 이상 레온에게 한 줌의 흔들림도 주지 못했다.


“그리드. 너는 숙주의 회피와 자책감을 먹고 자라는 기생충일 뿐이다.”


레온이 은색 청동 종을 들어 올렸다. 자아 통합의 기적을 거치며 종 표면에 가 있던 시커먼 균열들은 맑은 은빛 액체로 메워져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종소리의 진동은 레온의 맥박과 완벽하게 동조하며 고요하지만 묵직한 파동을 내뿜었다.


“내가 내 나약함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용서한 순간, 네가 기생할 수 있는 땅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강제 퇴거뿐이다.”


“닥쳐라! 하찮은 인간 놈이 감히 나를 멸하려 들어!”


그리드가 최후의 광기를 폭발시켰다. 카일의 영혼을 옭아매고 있던 검은 늪지대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늪의 밑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온 고농도의 오염된 마력이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칠흑의 촉수 해일이 되어 솟구쳤다. 그 촉수 하나하나에는 카일이 평생을 품어온 전우들에 대한 생존자 죄책감과, 성황청이 인위적으로 주입한 마력 폭주 극독 ‘데몬 브레스’의 탁한 검붉은 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촉수들이 레온의 자아를 단숨에 찢어발기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낙하했다. 몽중 세계의 하늘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압도적인 억압감이었다.


하지만 레온은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는 눈앞의 파멸적인 광경을 보면서도 거울처럼 차분했다.


“무의식의 거울(Mirror of Subconscious).”


레온이 나지막이 읊조리며 오른손에 쥔 은색 종을 허공을 향해 가볍게 내밀었다.


그 순간, 레온의 전면에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투명한 은빛 거울이 장벽처럼 발현했다. 그것은 마법적 방어막이 아니었다. 타인의 악마적 지배와 왜곡된 인지를 거부하고, 적이 내뿜는 파괴적 충동을 그대로 반사하겠다는 절대 이성의 시각화였다.


콰아아아앙-!


하늘을 메웠던 칠흑의 촉수 해일이 은빛 거울 표면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몽중 세계 전체가 깨어질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지만, 거울은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었다. 오히려 촉수들이 품고 있던 파괴적인 절망 에너지와 자폭적인 살기가 거울 표면에 부딪치는 찰나, 180도 역방향으로 굴절되기 시작했다.


“이, 이것은……!”


그리드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찢어졌다.


자신이 내뿜었던 카일의 절망과 데몬 브레스의 독기가 고스란히 자신을 향해 역류하고 있었다. 거울에서 반사된 은빛 붉은 마력 폭풍이 그리드의 거대한 곤충 형상 본체를 정면으로 타격했다.


쿠구구구궁!


“크아아아악! 아프다! 뜨거워! 내 몸이, 내 무의식이 찢어진다!”


그리드는 자신이 만들어낸 가혹한 절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녀석의 거대한 점액질 몸체 곳곳에 치명적인 균열이 가며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적의 가장 강한 무기인 ‘절망’을 거울처럼 반사하여 스스로를 파멸하게 만드는, 현대 정신분석학의 역설적 유도가 이세계의 몽중 법칙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완벽한 카운터였다.


레온은 비틀거리는 그리드를 냉철하게 내려다보며, 허공에 뜬 은색 종을 크게 흔들었다.


“이제, 이 지옥을 끝낼 시간이다.”


딩-!!!!!!!!


맑고 장엄한 종소리가 피비린내 나는 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은색 종의 두 번째 각성 단계인 ‘2단계: 투사(무의식 인지 제어)’의 각성 파동이었다.


레온의 의지에 따라 종소리의 파동이 눈에 보이는 은빛 물결이 되어 핏빛 대지를 쓸어내렸다. 파동이 닿는 곳마다 붉은 하늘이 유리창처럼 깨어지며 맑고 푸른 무의식의 하늘이 드러났다. 하늘에서 내리던 진득한 핏빛 비가 멈추고, 발목을 붙잡던 검은 늪지대가 순식간에 증발하기 시작했다.


“안 돼! 나는 심연의 신의 고결한 세포……! 이런 변방의 장님 사제 따위에게 멸할 수 없다! 내 형제들이…… 에스텔의 숲에서 너를 찢어 죽일 것이다!”


그리드는 저주 섞인 단말마를 내뱉으며 은빛 정화의 파동 속에서 서서히 바스러졌다. 녀석의 거대한 육체가 하얀 빛의 먼지가 되어 산화하는 찰나, 그 중심에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기괴하고 어두운 검은 수정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레온은 직관적으로 그것이 몽마의 핵심 정수이자 향후 더 거대한 오염을 추적할 수 있는 복선인 ‘꿈마 그리드의 핵’임을 알아차리고 가만히 손을 뻗어 거두었다. 수정을 쥐는 순간, 차가운 몽마의 잔재가 느껴졌지만 그의 단단한 격리실 장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리드가 사라진 자리에서 맑고 순수한 영적 에너지인 ‘꿈의 정수(Dream Essence)’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은색 청동 종으로 빨려 들어갔다. 종 표면의 은빛 복원 흔적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나며, 레온의 영혼 깊은 곳에 마력 1성의 한계를 보완해 줄 강력한 정신적 보존력이 축적되는 것이 느껴졌다.


스으으으으…….


지옥 같던 피의 전장이 완벽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핏빛 모래사막은 부드럽고 푸른 잔디밭으로 뒤덮였고, 검은 늪이 있던 자리에는 하늘을 투명하게 비추는 성스럽고 아름다운 호수, 몽중의 ‘눈물의 샘’이 솟아올랐다. 고대 신의 선한 파편이 남긴 은은한 치유의 성력 파동이 호수 표면을 따라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 호숫가 한가운데에, 마침내 몽마의 검은 사슬에서 완전히 해방된 카일이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던 탁한 암적색의 광증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구국의 영웅다운 맑고 예리한 은빛 눈동자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카일은 자신의 깨끗해진 손을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전우들의 피가 묻어있지 않은, 온전한 자신의 손이었다.


“아…….”


카일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생존자 죄책감의 정체가 성황청의 위선적인 음모와 약물 투여 때문이었음을, 그리고 자신을 원망하며 울부짖던 전우들의 유령이 몽마가 빚어낸 허상이었음을 완벽하게 인지했다.


진실을 직면한 영웅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눈물의 샘으로 떨어졌다. 그 눈물은 호수의 정화력을 더욱 맑게 대지에 퍼뜨렸다.


카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구원해 준 눈먼 사제, 레온을 바라보았다. 은빛 아우라를 등 뒤에 펼친 채 서 있는 청년의 모습은, 성황청의 그 어떤 고위 추기경보다도 성스럽고 초월적이었다.


쿵.


대륙 최강의 검왕이라 불리던 거한이 레온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깃든 대검 ‘아수라의 심장’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고개를 숙였다. 웅장하고 깊은 울림이 있는 영웅의 목소리가 정화된 무의식 정원에 공명했다.


“눈먼 성자이시여. 당신은 제게 단순한 광증의 치유사가 아닙니다. 지옥의 심연에서 제 영혼을 건져 올리고, 가짜 신앙의 가면을 벗겨준 진정한 선지자이십니다.”


카일의 은빛 눈동자가 결연한 충성심으로 불타올랐다.


“이 시간부로 제 검과 목숨, 그리고 영혼은 오직 당신만을 위해 존재할 것입니다. 당신이 가리키는 곳이 성황청의 심장부일지라도, 저는 기꺼이 대륙을 가르는 검이 되어 당신의 앞길을 열겠습니다.”


레온은 지팡이를 짚은 채 미소를 지으며 무릎 꿇은 기사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카일 경. 고개를 드십시오. 그대의 검은 파괴가 아닌, 앞으로 상처받을 더 많은 이들을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될 것입니다.”


레온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카일의 영혼을 감싸 안았다.


“현실의 정적 결계 한계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이제 깨어나십시오. 현실의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존명.”


카일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몽중 세계의 하늘이 투명하게 깨어지며 레온의 의식이 현실로 급격히 인양되기 시작했다.


***


허억!


레온이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숨을 들이켜며 현실의 육체로 눈을 떴다.


빛바랜 회색 사제복의 칼라 주변은 조금 전까지 흘렸던 코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고, 온몸의 근육은 마력 1성의 한계를 시험당한 듯 극심한 탈진감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 인지 지수는 여전히 100% 절대 이성 상태를 유지하며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장님 안대 너머로 예리한 청각을 곤두세웠다.


현실 세계에 펼쳐두었던 ‘절대 정적 영역(Silent Zone)’의 3분 제한 시간은 이제 단 몇 초조차 남지 않은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정적 결계 너머로 간수장 바르가스의 채찍이 에밀리를 향해 멈춰 서 있는 기괴한 정지 화면이 심안의 회색 시야에 들어왔다. 에밀리는 어깨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채 바닥에 쓰러져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고, 하급 간수 가르시아는 무거운 철제 곤봉을 쥔 채 바르가스의 뒤편에서 극심한 심리적 갈등의 오라를 풍기며 멈춰 서 있었다.


위잉-.


정적 결계의 주파수가 흐려지며, 마침내 소리가 현실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바르가스의 가죽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에밀리의 가녀린 어깨를 향해 내리눌리려던 바로 그 순간.


철컥-!


지하 감옥의 축축한 공기를 찢는 둔탁하고 웅장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일의 거구에 채워져 있던 거대한 구속구 사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폭주하던 붉은 마력 검강 대신, 오직 단단하게 다듬어진 전성기의 순수한 기세가 최하층 감옥 전체를 압착하듯 뒤덮었다.


“……어?”


채찍을 내리치려던 간수장 바르가스가 숨이 턱 막힌 듯 제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의 손에 쥔 채찍 끝이 바르르 떨렸다.


카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 8성급 영웅의 절대적인 위압감은, 존재 자체만으로 지하 감옥의 돌벽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카일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광기가 아닌, 서늘할 정도로 맑고 투명한 은빛 서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은빛 눈동자가 자신을 고문하고 약물로 중독시켰던 간수들을 향해 느리게 움직였다.


같은 시각.


헤이븐 요새 중앙에 우뚝 솟은 화려한 황금빛 대성당.


가장 은밀하고 사치스러운 주교실의 집무실 책상에 앉아 이중 장부를 검토하고 있던 변방의 지배자, 주교 바르샤의 몸이 일순 굳어졌다.


그의 손끝에 닿아 있던, 카일의 정신 구속 마법 결계와 연동된 황금 성배가 쨍그랑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반으로 쪼개져 나갔다.


“……결계가, 깨졌다고?”


바르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기름진 얼굴이 분노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온몸에서 신성이라는 허울 뒤에 숨겨진 추악하고 탁한 붉은 안광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미치광이 야수가…… 사슬을 끊었다.”


주교실의 촛불들이 일제히 꺼지며, 바르샤의 붉은 안광만이 어둠 속에서 흉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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