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사제, 심연의 종소리를 듣다
어둠은 단순히 빛이 부재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끈적끈적한 타르처럼 온몸을 조여오는 무겁고 축축한 압박감이었다.
‘……여긴 어디지?’
서준우는 눈을 뜨려 했다. 하지만 눈꺼풀을 밀어 올리려는 순간, 관자놀이를 관통하는 지독한 안구 통증이 뇌수를 헤집었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목구멍에서는 그저 쇳소리가 섞인 마른 기침만이 새어 나왔다.
버둥거리던 손끝에 거칠고 차가운 짚더미가 걸렸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곰팡이 냄새와 녹슨 철창의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인간의 절규 같기도 한 기괴한 비명이 불규칙한 주파수로 고막을 때려왔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현대 지구에서 평생을 수면 장애와 정신 분석 치료에 매달려온 전문가로서, 준우는 자신의 뇌가 받아들이는 이 감각이 백 퍼센트의 실제 현실임을 본능적으로 인지했다.
“으윽……!”
머리를 감싸 쥐자 이마에 감긴 얇고 부드러운 실크 안대가 만져졌다. 동시에 낯선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소용돌이치며 맞춰지기 시작했다.
레온 그레이.
이세계의 유서 깊은 사제 가문인 그레이 백작가의 서자이자, 어릴 적 열병으로 시력을 잃은 눈먼 사제.
그리고 가문의 가주이자 냉혹한 숙부인 데미안 그레이에 의해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눈먼 오물’로 낙인찍혀 이 음산한 변방의 요새, ‘헤이븐’의 미치광이 수용소 지하 감옥으로 유배당한 비운의 청년.
그것이 지금 서준우가 뒤집어쓴 육체의 정체였다.
이 몸의 현실 마력 등급은 고작 1성. 촛불 하나 겨우 켤 수준의 최하급 수습 사제에 불과했다. 마력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장님에다가 1성 마력이라는 조합은 사실상 살아있는 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가문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철저히 고사시키고, 세상의 눈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기 위해 이 음침한 지하 감옥에 버려둔 것이었다.
타닥, 타닥.
멀지 않은 곳에서 불규칙한 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나무 지팡이가 축축한 돌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쇠사슬이 가볍게 찰랑이는 소리였다. 준우는 본능적으로 호흡을 죽이고 소리의 발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록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청각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예리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새로 온 어린 양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가죽이 쓸리는 듯한 쉰 목소리였다.
철창 밖에서 멈춰 선 이는 헤이븐 수용소의 늙은 장님 관리인, 조셉이었다. 그는 레온과 마찬가지로 눈을 가리는 낡은 안대를 쓰고 있었으나, 지팡이 하나만으로 어둠 속을 아무런 걸림돌 없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조셉 씨입니까?”
레온의 육체에 남아있던 기억을 더듬어 준우가 간신히 이름을 뱉어냈다. 조셉은 낮게 껄껄 웃으며 철창 틈새로 낡은 나무 식판을 밀어 넣었다.
“그래, 이 지옥 구덩이에서 네놈의 뒤치다꺼리를 맡은 늙은이지. 그레이 백작가의 고귀하신 도련님께서 이런 썩은 물 냄새가 나는 지하 기도실에 처박히다니, 세상 참 요지경이야.”
“이곳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준우는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에서 감정을 배제하는 것, 그것이 정신분석의로서 그가 평생 수련해온 첫 번째 방어기제였다. 조셉은 그의 침착함에 조금 놀란 듯 지팡이를 멈추었다.
“상황이라 할 것도 없지. 이곳 헤이븐은 성황청이 이단으로 규정한 자들, 특히 과도한 마력 과부하로 미쳐버린 전쟁 영웅들을 가두는 거대한 무덤이다. 주교 바르샤의 감시망은 삼엄하고, 간수들은 악마 들림을 치료한다는 명목하에 매일 밤 영웅들의 자아를 가혹하게 짓밟고 있지.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철저히 장님 행세를 하며 귀를 닫는 게 좋을 게야. 신앙이라는 이름의 광증이 요새 전체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조셉은 식판을 내려놓은 뒤, 의미심장한 경고를 덧붙였다.
“사제가 아닌 자가 무의식이나 영혼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즉시 화형에 처해지는 법이다. 네놈의 그 얄팍한 성력으로는 간수들의 채찍질 한 번도 버티지 못할 터이니, 부디 쥐새끼처럼 조용히 숨만 쉬거라.”
노인의 발자국 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다시 지하 기도실에는 무거운 정적과 함께 멀리서 들려오는 미치광이 전사들의 울부짖음만이 남았다.
준우는 거친 짚더미 위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각의 부재는 생각보다 더 지독한 공포를 유발했다. 하지만 그는 주저앉아 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현대에서 자신이 구하지 못했던 첫 자살 기도 환자에 대한 지독한 죄책감, 그리고 이세계에서 영혼이 파괴되어가는 영웅들의 비극적인 운명이 그의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살아야 한다. 그리고 구해야 해.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가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지하 기도실 바닥 깊은 곳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력 1성의 나약한 육체였지만, 시각을 잃은 대신 극대화된 영적 주파수 감각이 바닥의 특정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스스스…….
무언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준우는 무릎을 꿇고 차가운 돌바닥을 손끝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이끼가 끼어 미끄러운 바닥을 쓸어가던 중, 무너진 돌벽 틈새 깊은 곳에 손이 닿았다. 흙먼지와 돌가루 속에 파묻혀 있는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체의 감각.
그는 손가락 끝을 밀어 넣어 조심스럽게 그 물체를 끄집어냈다.
손바닥에 얹어진 것은 낡고 빛바랜, 손바닥 크기만 한 은색 청동 종이었다. 표면에는 고대 룬 문자가 아주 미세한 균열과 함께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백 년 전 성황청의 세뇌 마법에 저항하다 실종되었다는 대현자 알베르트의 유물, ‘낡은 은색 청동 종’이었다.
그것을 손에 쥔 순간, 준우의 가슴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영혼의 주파수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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