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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서(密書)를 찢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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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 칠랑이 흘린 검붉은 핏자국은 지하 창고로 향하는 축축한 석벽을 따라 기괴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에는 썩은 물비린내와 칠점사의 독기가 뒤섞인 탁한 공기가 감돌았다. 소운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그 흔적을 쫓았다. 그의 전신 신경망은 석정 스님과의 명상으로 다져진 초감각 통각(超感覺 痛覺)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밤안개의 미세한 흐름,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이 식어가며 뿜어내는 미세한 열기까지도 소운의 피부 세포는 거울처럼 선명하게 감지해 냈다.


터벅, 터벅.


저 멀리 지하 창고 모퉁이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다급하게 무언가를 정리하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소운은 발소리를 완벽히 지우는 무위보(無爲步)의 기초 보법을 전개하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창고 내부에 서 있는 사내는 도망치던 독사 칠랑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철석곡의 하급 간수 복장을 한 중년 사내가 횃불 아래에서 가죽 주머니에 서책과 밀서들을 급히 쑤셔 넣고 있었다. 사내의 손길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빨랐고, 그의 호흡에는 삼류 간수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정교하고 예리한 진기의 흐름이 실려 있었다.


백광검파의 숨은 밀정, 조웅(趙雄)이었다.


조웅은 철석곡 내부에 잠입해 소운의 정체와 역천경력의 메커니즘을 분석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품속 깊은 곳에서 붉은 비단으로 감싸인 밀서를 꺼내어 가죽 주머니에 소중히 넣었다. 그 밀서의 겉면에는 백광검파 장로 독고용의 권위를 상징하는 백광검파의 황금 인장(白光黃金印章)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바스락.


아무리 기척을 지웠다 한들, 일류의 초입에 다다른 조웅의 감각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다. 조웅이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횃불의 붉은 그림자 너머로, 하얗게 세어버린 백발을 늘어뜨린 채 고요히 서 있는 소운의 신형이 드러났다.


“……네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냐?”


조웅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독사 칠랑을 보내 소운을 확실히 제거했을 터였다. 그러나 눈앞의 소년은 상처 하나 없이, 오히려 한층 더 깊어진 기세를 풍기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웅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자신의 정체와 밀서의 존재가 이 노예 소년에게 발각된다면, 백광검파가 철석곡을 배후에서 조종해 왔다는 추악한 실태가 천하에 드러날 터였다.


서걱.


조웅의 소매 사이로 얇고 예리한 강철 검이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나왔다. 백광검파 외문 제자들의 전형적인 살인 검초가 그의 손끝에서 예리한 푸른 검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천한 샌드백 놈이 쥐새끼처럼 돌아다니더니, 결국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구나. 여기서 네놈의 목을 베어 입을 막아주마.”


조웅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밤안개를 가르며 번개처럼 쏘아져 나왔다. 백광검파의 비전 검초 중 하나인 살광선(殺光線)이었다. 검 끝이 일직선상의 은빛 실선이 되어 소운의 목덜미를 향해 무자비하게 짓쳐 들어왔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지하 창고의 벽면을 긁어내며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소운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남겨준 유품인 부러진 대장간 망치를 가슴속 깊이 느끼며, 어떠한 매질과 망치질도 묵묵히 받아내던 대장간의 모루를 떠올렸다. 분노도, 살기도 없었다. 오직 적이 가해오는 물리적 충격의 궤적과 타이밍을 계산하는 차가운 이성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스스슥.


소운의 발끝이 기괴한 각도로 지면을 미끄러졌다. 무위보(無爲步)였다.


그것은 적의 공격을 피하는 보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적의 공격이 지닌 가장 강력한 기세와 파괴력의 중심점, 즉 검 끝이 아닌 검신(劍身)의 한가운데로 스스로 몸을 던져 파고드는 역발상의 보법이었다.


조웅의 눈에 소운의 행동은 스스로 검날에 목을 들이미는 자살 행위로 보였다.


“죽어라!”


조웅이 공력을 한층 더 끌어올려 검 끝에 집중시켰다.


푸학!


검 끝이 소운의 얇은 무명옷을 찢고 그의 가슴 정중앙에 위치한 무명 모루 가슴판에 정확히 명중했다.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일류 검수의 예리한 관통 에너지가 소운의 가슴뼈를 향해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바로 그 순간, 소운의 전신 골격이 웅웅거리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소운은 단전의 문을 완전히 닫아걸고, 적의 예리한 검기 속성을 자신의 피부막과 뼈 속으로 고스란히 빨아들였다. 성질 역용(性質 逆用)의 경지였다. 적이 가한 검초의 예리함과 관통하려는 속성을 파괴하지 않고, 자신의 기경팔맥 역방향 경로를 통해 그대로 가두어 둔 것이다.


두 우우웅!


소운의 가슴판에서부터 시작된 은빛 파동이 조웅의 검날을 타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조웅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자신이 내지른 살광 검초의 파괴력이 두 배로 증폭되어, 역방향으로 자신의 검날을 타고 손목을 향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공기가 기압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발생했다.


콰가강!


조웅이 쥐고 있던 강철 검이 역류하는 거대한 압력과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검 끝에서부터 손잡이까지, 수십 개의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폭발하듯 튕겨 나갔다.


“크아아악!”


부러진 검날의 파편들이 조웅의 오른쪽 어깨와 가슴팍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자신이 가한 예리한 검기의 두 배에 달하는 반동력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조웅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가 대장간의 무거운 철판 더미 위로 처참하게 처박혔다.


철판들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고, 조웅은 깨진 무릎과 어깨를 움켜쥔 채 검붉은 피를 토해냈다.


소운은 가만히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가슴을 보호하던 무명 모루 가슴판의 가죽 끈이 검기의 잔여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툭 끊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가슴팍에는 검날이 스치고 지나간 얕은 찰과상 상처에서 붉은 선혈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뼈와 경맥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소운은 부러진 가슴판을 주워 품에 넣은 뒤, 쓰러진 조웅을 향해 느릿하지만 굳건한 발걸음을 옮겼다.


조웅은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다가오는 백발의 소년을 공포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괴물…… 진짜 소가 가문의 망령이 살아 돌아왔구나…….”


소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조웅의 앞으로 다가서서, 그의 품속에 들어있던 가죽 주머니를 거칠게 낚아챘다. 주머니를 열자 붉은 비단으로 감싸인 밀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운은 망설임 없이 밀서를 꺼내어 찢어 열었다. 서찰의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소운의 눈동자가 찰나의 순간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곳에는 십 년 전, 평범한 대장장이였던 그의 아버지 소대장이 대장간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백광검파의 무기 제작 협조 거부에 분노한 장로 독고용이 흑호방을 사주해 기획한 잔혹한 타살이었다는 명백한 진실이 적혀 있었다.


‘소가 가문의 대장장이 소대장이 한철 광맥의 위치를 끝까지 털어놓지 않으니, 대장간 화로 사고를 위장하여 흔적 없이 멸하라.’


독고용의 친필 서명과 황금 인장 문양이 선명하게 찍힌 그 글귀를 마주한 순간, 소운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억눌려 있던 뜨거운 선혈이 솟구쳐 올랐다. 아버지가 왜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했는지, 가문이 왜 변방의 황무지로 쫓겨나 노예처럼 착취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추악한 진실이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하하하…… 쿨럭!”


쓰러진 조웅이 잔인한 웃음을 터뜨리며 피를 토했다.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이미 늦었다…… 소가 가문의 후계자가 철석곡에 살아있다는 밀서의 복사본은…… 이미 해질녘에 다른 전령을 통해 수안성의 독고용 장로님께 출발했다. 곧 장포대의 정예 검수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쳐 너와 관련된 모든 자들의 뼈를 갈아버릴 것이다!”


조웅의 비열한 조롱이 어두운 지하 창고에 메아리쳤다.


소운은 찢어진 밀서를 손에 쥔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칼을 이기는 것은 칼이 아니다, 운아. 모루가 되어라.’


소운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투명한 은빛 눈동자는 모든 슬픔과 복수심의 독기를 비워낸 채, 오직 세상을 차갑게 비추는 얼음 거울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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