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자들의 불길
귀신골 계곡의 짙은 안개를 뚫고 수안성 수로 입구로 향하던 소운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흐릿한 시야 너머, 남동쪽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매캐한 탄내와 민초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귀신골 입구까지 흘러들었다. 우각촌이 불타고 있었다.
“소운…… 우각촌 방향이에요! 불길이 마을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어요!”
소운을 부축하던 설아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소운은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이모의 손때 묻은 은반지를 매만졌다. 차갑게 식어가는 은반지의 감촉 위로, 아버지를 잃고 홀로 남겨진 자신을 거두어 준 이모 소씨 부인과 핍박받던 우각촌 민초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임칠과 장포대는 귀신골에서 전멸했으나, 마을에 남겨진 사냥개들의 이빨은 아직 뽑히지 않은 상태였다. 임칠의 사후 혼란을 틈타 우각촌에 잔존해 있던 흑호방의 부방주 살풍과 부패한 수안현 관청 포교대가 연합하여 대대적인 보복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돌아가야 하오.”
소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거절할 수 없는 모루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하지만 소운, 지금 당신의 몸은…… 임칠의 검초와 낙석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경맥이 파열 직전이에요! 골밀도 피로 때문에 시야마저 흐려진 상태에서 돌아가는 건 자살행위예요!”
설아가 소운의 회색 장포 자락을 붙잡으며 만류했다. 실제로 소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전신의 뼈마디가 미세하게 삐걱거리며 불타는 듯한 마찰열을 뿜어내고 있었고, 백발은 피와 땀에 젖어 이마에 무겁게 달라붙어 있었다. 시야는 온통 흐릿한 기의 흐름으로만 보일 뿐, 사물의 정확한 윤곽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를 믿고 대피한 우각촌 주민회 사람들이오. 그들이 내 등뒤에 있소. 방패가 무너지면, 모루가 깨지면 그들은 갈 곳이 없소.”
소운은 고집스럽게 발걸음을 돌려 우각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오직 대기를 가르는 붉은 화광의 흐름만을 이정표 삼아, 전신의 고통을 관조 명상법으로 누르며 묵묵히 나아갔다.
* * *
우각촌은 그야말로 지옥도로 변해 있었다.
초가집들이 무참히 불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흑호방 잔당들과 관청 포교대 무사들이 민가들을 이 잡듯 뒤지며 민초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오른쪽 어깨를 깊게 베인 채 쓰러져 있는 파수꾼 석삼이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모 소씨 부인과 우각촌 주민회 사람들이 포교대의 쇠사슬과 철봉 아래에서 공포에 떨며 웅크려 있었다.
“이 천한 광산 쥐새끼들아! 장포대 임칠 대장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당장 불지 못할까!”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양손에 짧은 월도(月刀)를 쥔 사내, 흑호방 부방주 살풍이 분노로 눈이 뒤집힌 채 포효했다. 그의 월도 날끝에는 무고한 민초들의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 모릅니다……! 그저 산으로 올라가셨을 뿐입니다!”
소씨 부인이 울부짖으며 석삼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포교대 무사들은 차가운 쇠사슬을 휘두르며 그녀를 위협했다.
“쓸모없는 늙은이들부터 목을 쳐라! 소운 그 백발 놈이 나타날 때까지 하나씩 다져버리겠다!”
살풍이 잔인한 명령을 내리며 쌍월도를 치켜드는 순간, 불타는 초가집의 매연을 뚫고 하얗게 세어버린 백발의 소년이 고요히 걸어 나왔다.
소운이었다.
그의 등뒤에는 설아가 자오삼침을 쥔 채 은밀히 경계를 서고 있었다. 소운의 등장에 살풍과 포교대 무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드디어 기어 나왔구나, 이 백발 괴물 놈!”
살풍이 이빨을 갈며 쌍월도를 마찰시켰다. 쇳소리가 밤공기를 가늘게 찢었다.
“네놈이 임칠 대장님과 장포대를 귀신골로 유인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으나, 오늘 이 마을과 네놈의 이모는 내 손에 뼈째로 으스러질 것이다!”
소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살풍이 내뿜는 광포한 기류와 포교대 무사들이 쥔 철봉의 궤적을 뇌리로 계산할 뿐이었다. 왼쪽 뺨의 찰과상 딱지가 벌어지며 한 줄기 선혈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소운의 투명한 은빛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설아, 이모와 주민들을 데리고 대두가 있는 지하 안전 가옥으로 대피하십시오. 석삼 아저씨도 함께 데려가야 합니다.”
소운이 나지막이 지시했다.
“하지만 소운, 혼자서 이 수많은 군대와 살풍을 어찌 감당하려 합니까!”
“내 가슴에는 아버지가 남기신 모루가 있소. 나는 부러지지 않으니, 서두르십시오.”
설아는 이빨을 악물고 주민회 사람들을 선동하여 불길이 미치지 않은 뒤편 숲길로 신속하게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살풍이 이를 저지하려 신형을 날리려 하자, 소운이 무위보를 밟으며 그의 전방을 가로막아 섰다.
“네놈의 상대는 나다.”
“천한 노예 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장포대의 원수를 갚아주마!”
살풍이 광풍심법을 폭발시키며 양손의 쌍월도를 휘둘렀다. 그의 월도가 가르는 변칙적인 사선 궤적이 붉은 화광을 받아 기괴한 혈색 아지랑이를 만들어냈다. 살풍은 이류 최상급의 고수답게, 소운의 목줄기를 향해 무서운 회전력을 실은 참격을 연속으로 들이부었다.
쉬이이익!
소운은 피하지 않았다. 스스로 먼저 공격할 수 없는 역천경력의 제약 속에서, 소운은 양 팔목에 감긴 무쇠 실 붕대를 교차하여 월도의 날카로운 궤적을 정면으로 쳐서 막아내려 했다.
쾅!
월도의 묵직한 회전력이 소운의 무쇠 실 붕대에 격돌하는 순간, 기괴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살풍의 쌍월도는 일반 검초와 달리 회전하는 원형의 원동력을 품고 있었다. 그 무거운 회전 참격의 에너지가 붕대의 마찰력을 뚫고 소운의 뼈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우드득!
소운의 오른쪽 팔꿈치 관절과 어깨뼈에 미세한 균열이 발생하며 타는 듯한 골밀도 통증이 전신을 강타했다. 전신 뼈가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고, 입가로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임칠과의 대결로 이미 한계에 달했던 전신의 골격이 무너지려 했다.
그때, 포교대 무사들이 비열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들이닥쳤다.
“저놈의 발목을 묶어라!”
포교대원들이 던진 굵고 묵직한 관청의 쇠사슬들이 밤공기를 가르며 소운의 발목을 사정없이 휘감았다.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소운의 하체 중심을 무자비하게 뒤흔들었다.
중심이 무너지는 절체절명의 위기.
소운은 모루 호흡법을 전개하여 쇠사슬이 당기는 압력을 전신으로 분산하려 했으나, 발목이 묶인 상태에서는 상체의 회전 각도를 미세하게 조율하는 ‘타격 각도 계산술’을 완벽히 전개할 수 없었다.
스윽! 콰직!
중심이 흔들린 틈을 타 살풍의 월도 날끝이 소운의 방어막을 뚫고 가슴팍을 사정없이 베고 지나갔다. 소운의 거친 무복 가죽이 찢어지며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 나왔다. 무복 내부의 무명 모루 가슴판에 월도가 닿으며 둔탁한 쇳소리가 울렸으나, 가슴판 표면의 미세한 균열들이 한층 더 깊어지며 소운의 가슴가죽에 깊은 자상을 남겼다.
“하하하! 쇠사슬에 묶인 채 얼마나 버티나 보자! 네놈의 그 기괴한 방패막도 중심이 무너지면 결국 뚫리는 가죽 껍데기일 뿐이지!”
살풍이 광기 어린 비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월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주변의 포교대 무사들은 횃불을 사방에 밝히며 소운의 퇴로를 완벽히 차단하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된 채 무릎을 꿇으려던 소운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이것은 가혹한 위기이자, 소운이 스스로 설계한 처절한 덫이었다.
소운은 쇠사슬에 묶인 불리한 상태를 역용하여, 살풍이 흥분한 상태로 자신에게 가장 정직하고 묵직한 직선상의 일격을 가하도록 심리적 도발을 감행하고 있었다. 적이 냉정을 잃고 전력의 파괴력을 내지르는 순간이야말로, 역천경력의 쌍배 반사를 시전할 최적의 찰나였기 때문이다.
소운은 새끼손가락의 은반지를 만지며 끓어오르는 통증을 관조 명상 속으로 비워냈다. 그리고 백발을 휘날리며 살풍을 향해 고요하고 차가운 은빛 눈동자를 치켜떴다.
“그게 네놈이 가진 힘의 전부인가? 흑호방의 부방주라는 자가 고작 관군의 쇠사슬 뒤에 숨어 춤을 추는구나.”
“이 비천한 노예 놈이 끝까지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네놈의 심장과 함께 가슴판을 통째로 으스러뜨려 주마!”
살풍이 이성을 잃고 광포하게 울부짖으며 쌍월도를 일직선으로 겨누고 소운의 심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그의 전력 진기가 월도 날끝에 집중되며 혈색 폭풍을 일으켰다.
살풍의 월도가 소운의 가슴 보호대에 닿는 순간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옥 같은 불길 속에서, 수안현 관청 포교대가 사방에서 횃불을 일제히 밝히며 쇠사슬을 당겨 소운의 목덜미를 포위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