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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 속의 위선(僞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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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침묵이 투기장을 지배했다.


피와 땀, 그리고 깨진 청석 바닥의 먼지가 뒤엉킨 비밀 투기장의 링 위에서 배무덕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사파의 절대 강자라 불리던 투기장의 무패 챔피언은 자신이 내지른 파쇄진동공의 두 배에 달하는 반동을 맞고 양팔의 뼈가 산산조각 난 채 주저앉아 있었다. 링 한가운데는 마치 번개를 맞은 것처럼 거대한 균열이 가 있었고, 그 틈새로 매캐한 쇳가루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파멸적인 광경의 중심에 소운이 서 있었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이미 한 가닥의 검은빛도 남지 않은 채, 눈이 시릴 정도의 완전한 백발(白髮)로 변해 밤안개 속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삼생금침(三生金針)의 구명 비기가 멈췄던 심장을 강제로 박동시키고 뒤틀린 기맥을 억지로 소생시킨 처절한 대가였다. 전신의 모공에서 스며 나온 미세한 핏방울이 백발과 대비되어 기괴한 비장미를 풍겼다. 조웅과의 대결에서 입었던 왼쪽 뺨의 찰과상 상처가 다시 터져 붉은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우측 귀에서도 가느다란 피 한 방울이 고요히 떨어졌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의 가슴이었다. 아버지가 남겨준 유일한 유산이자 심장을 보호하던 무명 모루 가슴판은 배무덕의 최후 일격을 막아내고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 나 청석 바닥에 은빛 쇳가루로 흩날려 사라진 상태였다. 아무런 방어구도 남지 않은 맨가슴 위로 거친 호흡이 일 때마다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소운은 관조 명상법(觀照 瞑상법)을 전개하며 갈비뼈 속에서 요동치는 극심한 통증을 묵묵히 흘려보냈다. 분노도 살기도 품지 않은 채, 오직 차가운 이성으로 전신의 감각을 예리하게 벼렸다.


그때, 금빛 누각 위에서 정적을 깨뜨리는 웅장한 외침이 들려왔다.


“당장 환전해라! 흑호방의 신용은 오늘로 끝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양심적 도박꾼 조풍(趙風)이었다. 비단옷을 걸친 거상의 손가락 끝이 허공을 가리켰다. 소운의 승리에 전 재산을 걸었던 그가 흑호방 환전소를 향해 거대한 흑호방 투전패(黑虎幇 鬪戰牌) 뭉치를 내던진 것이다. 조풍이 거느리는 상인 연합의 수하들이 일제히 환전소 장막을 들이받으며 투전패를 실물 은자로 강제 환전하라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투기장 전체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배무덕의 패배로 전 재산을 잃은 사파의 거물들과 명문 정파의 위선적인 원로들이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가난한 노예 격투가들과 광부들은 혼란을 틈타 쇠창살을 부수기 시작했다. 간수들과 흑호방 무사들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며 삼엄했던 경비망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지금이다.’


소운은 백발을 장포 자락 속으로 밀어 넣으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전신 경맥이 미세하게 파열되어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골수가 타들어가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흑호방 방주 흑태풍이 이 혼란을 틈타 도망치기 전에, 그리고 투기장의 모든 증거가 인멸되기 전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진정한 배후의 단서를 찾아야만 했다.


소운은 천길이 알려주었던 지하 통로의 지도를 떠올리며 흑태풍의 침소이자 집무실인 방주실(房主室)을 향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기루의 화려한 복도를 지나 흑태풍의 방주실 문을 열자, 시체 썩는 냄새와 저열한 약초 향이 섞인 눅눅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방 내부에는 흑가죽으로 덮인 거대한 침상과 호랑이 가죽이 깔린 바닥이 보였다.


소운은 주저 없이 흑태풍의 침상 뒤편 비밀 벽으로 다가갔다. 벽면에 장식된 호랑이 조각의 눈을 누르자,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석벽이 뒤로 밀려나며 흑태풍의 비밀 금고(흑태풍의 비밀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무쇠 문에 기하학적인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있는 삼엄한 밀실이었다.


스스슥!


바로 그 순간, 좌우의 어둠 속에서 소리 없는 살기가 짓쳐 들어왔다. 방주실을 지키던 흑태풍의 정예 호법 두 명이 소운의 침입을 감지하고 무기를 휘두르며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예리한 참도(斬刀) 두 자루가 소운의 목과 끈이 풀려 방어구가 없는 맨가슴을 향해 교차하며 날아들었다.


소운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하체 부상과 골수 피로 때문에 급격한 신법을 전개할 수 없음을 인지한 그는, 오히려 무위보(無爲步)를 펼쳐 적들의 검날 안쪽, 가장 파괴력이 강한 충격의 중심점으로 스스로 파고들었다.


챙!


소운은 양 팔목에 감겨 있던 무쇠 실 붕대(무쇠 실 붕대)를 교차하여 적들의 참도 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한철 실의 탄성이 검날의 예리한 물리적 충격을 흡수하는 순간, 소운의 이백여섯 개 뼈마디가 공명하며 역천경력의 반사 기류를 형성했다. 그는 주먹을 내지르는 대신, 몸을 미세하게 비틀어 타격 각도 계산술을 시전했다. 적들이 가해온 찌르기와 베기의 운동 에너지가 정확히 두 배로 증폭되어 그들의 참도 손잡이를 타고 역류했다.


우득! 콰직!


“크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호법들의 손목 관절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참도가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자신들이 내지른 힘의 반동에 양팔의 힘줄이 찢어진 호법들이 무기를 잃고 바닥에 쓰러져 신음했다. 소운은 쓰러진 자들을 죽이지 않고, 오직 그들의 무기만을 부러뜨려 무력화한 채 비밀 금고의 무쇠 문 앞으로 다가갔다.


금고 문 중앙에는 정교한 기문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내부의 파멸적인 함정이 발동할 것이 자명했다. 소운은 품속에서 무명 노인의 가죽 신발 밑창에서 얻었던 역천경법 구결(逆天鏡法 口訣)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비우는 자는 톱니의 마찰을 느끼지 못하며, 오직 힘의 흐름을 거울처럼 따를 뿐이다.’


소운은 눈을 감고 초감각 통각을 활성화하여 금고 내부 톱니바퀴들의 미세한 진동을 손가락 끝으로 감지했다. 무리한 힘을 가하지 않고, 기맥의 흐름에 맞춰 톱니의 균형을 하나씩 맞추어 나갔다.


철컥. 철커덕.


마지막 톱니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순간, 내부에서 둔탁한 기계음이 울렸다. 그러나 바로 그 찰나, 금고 하단에 숨겨져 있던 보이지 않는 압력판이 미세하게 작동했다. 독고용이 침입자를 방살하기 위해 이중으로 장치해 둔 비밀 스프링 덫이었다.


슈우욱!


밀실 어둠 속에서 푸른 독기가 발라진 가느다란 독화살 한 자루가 소운의 어깨를 향해 소리 없이 날아왔다. 소운은 무위보를 가동해 신형을 비틀었으나, 전신 피로로 인해 반응이 반 찰나 늦어졌다. 독화살은 그의 왼쪽 어깨 가죽을 스치며 길쭉한 자상을 남기고 석벽에 박혔다. 뜨거운 열독이 상처를 통해 스며들며 어깨 근육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통증이 엄습했다. 소운은 관조 명상으로 심장 박동을 다스리며 독기가 심장으로 퍼지는 것을 억제했다.


이윽고, 무거운 무쇠 금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금고 내부에는 흑호방이 사설 도박판을 통해 세탁해 온 막대한 은자와 황금, 그리고 수많은 거래 장부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에서도 소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금고 가장 깊은 곳, 비단 상자 위에 소중히 놓여 있는 낡은 서찰 한 장과 검붉은 인주가 묻은 황금 인장이었다.


서찰 겉면에는 백광검파 장로 독고용의 황금 인장 문양(백광검파의 황금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조웅에게서 빼앗았던 밀서의 문양과 완벽히 일치하는, 부패와 위선의 상징이었다.


소운은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펼쳤다. 서찰 내부에는 가문을 멸문시키고 아버지를 살해한 진정한 원한의 진실(소대장 타살의 기획자)이 독고용의 친필로 적혀 있었다.


[흑태풍 방주에게.

우각촌 지하의 한철 매장지 위치를 끝까지 발설하지 않는 완고한 대장장이 소대장(蘇大匠)을 제거하라. 장포대를 도적으로 위장해 가문을 덮치되, 소대장의 죽음은 대장간 사고사로 위장하여 관청의 의심을 피하도록 하라. 일이 성공하면 철석곡의 불법 도박 자금 세탁 비율을 백광검파가 공인하는 상표를 통해 대폭 늘려줄 것이다.]


서찰 옆에는 백광검파와 흑호방의 검은 계약(백광검파와 흑호방의 검은 계약)이 체결된 비밀 장부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화려하고 고결한 정파를 자처하던 백광검파가 뒤로는 지하의 사파 방파와 결탁하여 약자들을 인신매매하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소운의 아버지를 무참히 살해하도록 사주했다는 명백한 물증이었다.


“……아버지.”


서찰을 쥔 소운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굳어갔다. 그의 은빛 눈동자 너머로 아버지가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땀을 흘리며 남겨주었던 가르침이, 그리고 가문이 습격당하던 날 밤의 피비린내 나는 비명 소리가 폭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억눌려 있던 차갑고 무거운 분노가 마치 대장간의 무쇠 모루처럼 그의 영혼을 짓눌렀다. 정파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품은 추악한 위선이 소운의 눈앞에 완전히 폭로된 순간이었다.


그때, 투기장 바닥 전체가 거칠게 흔들리며 지하 깊은 곳에서 웅장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흑태풍이 도망치는 노예들을 학살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지하 폭약을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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