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을 쥔 소년
안개골짜기의 새벽은 유난히도 시렸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대지 위로 보랏빛 안개 장벽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흑풍회 살수들과의 처절한 야간 기습전이 끝난 지 불과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안개별장 안마당에는 아직도 미처 치우지 못한 핏자국이 검붉은 얼룩이 되어 얼어붙어 있었다.
송무현은 자신의 방 침상에 가만히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죽 망토를 벗어 던진 그의 상체는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가슴팍에는 장녀 백설화가 원한을 담아 찔렀던 비수의 상처가 진물을 흘리고 있었고, 왼쪽 어깨 깊숙한 곳에는 살수 흑영이 쏜 독침의 여파로 검푸른 핏줄이 기괴하게 솟구쳐 있었다.
"후우……."
무현은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어깨 주변의 혈도를 강하게 눌렀다. 둘째 백유리가 매일 밤 그의 찻잔에 미량으로 섞어 넣었던 [마비성 정제독]이 살수의 독소와 최악의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체내의 [만독 정화 심법]이 정화 혈맥을 깨워 독기를 억누르고는 있었지만, 심장 경락의 70%가 괴사한 상태에서의 공력 운용은 뼈를 깎아내는 고통을 동반했다.
더군다나 독소 폭주를 막기 위해 기를 억지로 왼쪽 상체에 가두어 둔 탓에, 왼손 손가락은 완전히 감각을 잃고 굳어 있었다. 젓가락질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뻣뻣해진 손을 바라보며, 무현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무현의 예리한 [심안 - 마력 감지]가 안개 장벽 외곽에서 불길한 파동을 포착했다.
스스슥.
낙엽을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기민한 보법. 하지만 그 보법 끝에 실린 내력의 결은 무현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바람을 타고 흐르는 날렵하고도 매서운 검기. 그것은 백가 가문의 비전 신법인 질풍 보법의 흔적이었다.
'설마…… 하민이 녀석인가?'
무현의 은회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서하민(Seo Ha-min). 아버님과도 같았던 은사 백무진 대장군의 마지막 제자이자, 자신에게는 친동생과도 같았던 촉망받는 소년 검사였다. 가문이 멸문당하던 날 밤, 미처 구출하지 못해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그 아이가 살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숲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에는 맹렬한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스승을 배신하고 가문을 팔아넘긴 원수, 송무현의 목을 베겠다는 지독한 증오가 서린 살의였다.
무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왼손을 가죽 망토 아래로 숨기고, 가죽 끈으로 칭칭 감아둔 낡은 [은랑 기사단의 제식 장검]을 오른손에 쥐었다. 그리고 안개가 자욱한 별장 안마당으로 묵묵히 걸어 나갔다.
바람이 불어와 그의 하얗게 세어버린 은발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송무현—!!!"
안개 속을 찢고 한 줄기 푸른 검광이 번뜩였다. 앳되지만 분노로 짓이겨진 소년의 외침과 함께, 청강검(靑鋼劍)을 치켜든 서하민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소년의 눈가는 이미 붉은 눈물로 가득 젖어 있었다.
"이 더러운 배신자 놈! 감히 아버님을 밀고하고 네놈 혼자 살아남아 이곳에 숨어 있었더냐! 오늘 내 손으로 아버님의 원수를 갚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겠다!"
하민의 질풍 보법이 대지를 박찼다. 순식간에 눈앞까지 육박한 청강검이 무현의 목덜미를 향해 사선으로 매섭게 그어졌다. 검날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파공음이 마당의 안개를 양 갈래로 갈라놓았다.
쉬이익!
무현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가죽 끈으로 묶인 검집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깡—!
맑은 쇠붙이 소리와 함께 하민의 청강검이 무현의 검집 표면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하민은 자신의 전력 일격이 너무나도 쉽게 막히자 이를 악물었다. 소년은 신형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백가 가문의 군웅검 초식을 연속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왜 검을 뽑지 않지? 나를 얕잡아보는 것이냐! 역적 놈아!"
푸른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무현의 온몸을 옥죄었다. 무현은 왼손 손가락이 마비되어 상체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치명적인 제약 속에서도, 오직 오른손 하나로 검집을 휘두르며 하민의 검로를 정교하게 비껴냈다.
챙! 채쟁! 챙—!
검과 검집이 맞부딪힐 때마다 무현의 가슴팍 상처가 벌어지며 붉은 선혈이 붕대 위로 번져 나갔다. 하지만 무현은 신음 한 자락 내지 않았다. 오히려 하민의 검술 속에서 스승 백무진 대장군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살아있음을 느끼며 아련한 슬픔에 젖어들었다.
'하민아, 검로가 흔들리는구나. 분노에 눈이 멀어 검의 끝이 가벼워졌다.'
무현은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소년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강한 무력으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분노를 온전히 받아내야 했다.
하민은 무현의 낡은 검집 방어벽을 뚫지 못하자 더욱 광포하게 날뛰었다. 소년은 내력을 단전에 쥐어짜 내며 청강검에 푸른 검강을 올렸다. 그것은 가주의 비전 초식 중 하나인 질풍참(疾風斬)의 전조였다.
"아버님을 돌려내라! 사매들의 인생을 망쳐놓은 비열한 사냥개 놈! 죽어라!"
하민의 신형이 바람과 동화되어 수십 개의 잔상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무현의 가슴팍에 남은 설화의 비수 상처를 정확히 겨누고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왔. 피할 곳 없는 절체절명의 쾌검이었다.
무현은 눈을 감았다.
그는 검집을 거두었다. 그리고 단전 깊은 곳에서 잠자던 푸른 영력을 끌어올려 [수호자의 맹세]와 [불살의 방어막] 기예를 가동했다. 무현의 전방에 푸른빛의 반투명한 거대한 기사도 장벽이 형성되었다.
콰아앙—!
하민의 청강검이 푸른 장벽에 부딪히며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장벽의 반동 기운이 하민의 가냘픈 경락을 타고 역류하려 하자, 무현은 깜짝 놀랐다. 이대로 방어막의 반동을 내버려 두면 하민의 단전이 깨어지고 온몸의 혈맥이 파괴될 터였다.
'안 된다. 이 아이마저 다치게 할 수는 없어.'
무현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스스로 불살의 방어막을 거두었다. 푸른 장벽이 순식간에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무현은 피하는 대신, 자신의 왼쪽 어깨를 앞으로 내밀었다.
푸욱—!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딪히는 서늘한 파열음이 마당에 울려 퍼졌다. 하민의 청강검이 무현의 왼쪽 어깨를 깊숙이 관통했다. 은빛 칼날이 무현의 등 뒤로 붉은 피를 머금은 채 솟구쳐 나왔다.
"……윽."
무현의 입술 틈새로 검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단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칼날이 어깨에 박힌 채로, 무현은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하민의 청강검 칼날을 움켜쥐었다.
스윽, 스윽.
무현의 손바닥이 베여 나가며 붉은 피가 칼날을 타고 하민의 손등으로 흘러내렸다.
하민은 경악했다. 자신의 검이 원수의 어깨를 완벽히 관통했음에도,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년의 떨리는 시선이 무현의 얼굴로 향했다.
그곳에는 증오나 살기가 없었다.
오직 과거 아카데미 시절, 자신들이 훈련을 마친 후 땀을 닦아주던 따뜻하고 온화한 사형의 미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무현은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열어 나직하게 속삭였다.
"……검이 많이 매서워졌구나, 하민아."
"어…… 어째서…… 피하지 않은 거지? 네놈 정도의 무력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민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칼날을 쥔 소년의 손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무현은 왼손의 마비 통증과 어깨를 찢는 극통을 참아내며, 자신의 망토 안쪽 주머니로 오른손을 가져갔. 그리고 그곳에서 묵직하고 차가운 무언가를 꺼내 하민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그것은 반으로 처참하게 부러진, 하지만 가문의 찬란한 백련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부러진 백가 수호검]의 자루였다. 스승 백무진 대장군이 처형당하기 직전 무현에게 목숨을 걸고 전수했던 가문의 정통성이자 맹세의 물증이었다.
"이, 이것은…… 아버님의 수호검?!"
하민의 눈동자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경악과 공포로 물들었다. 이 검은 가문의 배신자라면 결코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오직 가주의 진정한 후계자만이 지닐 수 있는 신물이었다.
"아버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너를 믿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너희를 지켜달라고 하셨지."
무현이 온화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 따뜻한 음성이 하민의 귓가를 때리는 순간, 소년의 손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
철그렁—!
하민은 청강검의 자루를 놓치며 뒤로 비틀거렸다. 무현의 어깨에 박힌 검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가늘게 흔들렸다. 소년의 눈동자는 이미 거대한 진실의 조각과 마주한 채, 겉잡을 수 없는 충격과 후회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별장 본채의 굳게 닫힌 문틈 너머, 멀리서 이 모든 결투를 숨죽여 지켜보던 백설화와 백유리의 눈동자 역시 깊은 어둠 속에서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