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지는 차가운 철옹성
시리도록 차가운 달빛이 안개별장의 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자욱한 보라색 안개 장벽 너머로 불어오는 밤바람은 피비린내를 머금은 채 쓸쓸히 흩어졌다. 바닥에는 흑풍회 살수들의 차가운 시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그 중심에 송무현이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우…… 후……."
무현의 왼쪽 어깨 깊은 곳, 뼈 사이에 박힌 [흑풍회의 추적 침]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와 그의 혈맥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골사가 발사한 치명적인 독침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즉사했어야 할 맹독이었지만, 무현의 체내에 흐르는 [마비성 정제독]과 그의 특이 체질인 [마도 독 정화] 혈맥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억지로 생명을 붙잡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중독된 왼쪽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검은 핏줄이 목덜미를 타고 기괴하게 솟구쳐 올랐고, 왼손 손가락은 완전히 마비되어 단 한 마디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투명한 은백발이 흩날리며 붉은 피로 얼룩진 얼굴을 가렸다. 결계를 유지하느라 단전의 내공을 남김없이 쥐어짜 낸 상태에서 독침까지 맞았으니, 몸 안의 경락들이 비명을 지르며 찢어지는 듯했다. 무현은 필사적으로 [고통 억제] 기예를 가동했다. 뇌신경으로 이어지는 고통의 통로를 강제로 끊어내자, 전신을 불태우는 듯한 극통이 멀어지며 기묘한 감각의 마비가 찾아왔. 그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낡은 은랑 기사단의 제식 장검을 지팡이 삼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송무현……."
뒤편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녀 백설화였다. 그녀는 백화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독침을 막아선 무현의 은빛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차갑고 단단했던 철옹성 같던 오해에 최초의 균열이 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가문을 배신하고 아버님을 밀고한 더러운 역적. 평생을 증오하며 목을 베려 했던 원수가, 어째서 방금 전 자신을 향해 날아온 치명적인 살수의 침을 대신 몸으로 받아냈단 말인가.
설화의 머릿속은 극심한 인지부조화로 인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렸다.
"왜…… 왜 그랬지? 네놈은 우리 가문을 멸문으로 몰고 간 배신자가 아니더냐. 아버님을 황실에 밀고하고 목숨을 구걸한 비열한 사냥개일 텐데…… 어째서 내 앞을 막아선 거지?"
설화의 목소리에 서글픈 균열이 일었다. 그녀는 무현의 눈빛 속에서 비열한 역적의 탐욕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무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흐릿한 은회색 눈동자에는 오직 깊고 슬픈 심연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무현은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피를 입안으로 억지로 삼켰다. 지금 그녀들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이 가문을 구하기 위해 대역죄의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설화와 유리가 겪을 지독한 죄책감은 그녀들의 약한 영혼을 산산조각 내버릴 것이 분명했다. 스승 백무진 대장군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은 끝까지 추악한 역적으로 남아야 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무현은 일부러 목소리를 차갑고 딱딱하게 굳혔다.
"당신들이 여기서 죽으면, 내가 아카데미 시절부터 그토록 갈망하던 백가 가문의 비전 무공, [백가검결]의 상권과 가문의 비밀 창고를 열 열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내 손으로 당신들의 가치를 전부 쥐어짜 내기 전까지는, 함부로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비열하고 잔인한 대사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입가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가 그 대사의 진실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거짓말……."
설화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정말로 비전 무공만을 탐했다면, 방금 전 자신을 방패로 삼거나 인질로 잡았어야 했다.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며 독침을 대신 맞을 이유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복도 그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둘째 백유리가 안경알 너머로 날카롭고 예리한 고양이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천천히 다가왔다. 유리의 시선은 무현의 왼쪽 어깨에 박힌 은침과, 그의 목덜미를 따라 까맣게 죽어가는 혈관들에 멈췄다. 유리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갔다.
"저 독은…… [흑영]의 적혈 독침이야. 스치기만 해도 심장을 마비시키는 흉포한 마도 맹독……."
유리는 자신의 소매 속에 숨겨진 마도 독병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직감했다. 무현의 심장 경락이 저토록 처참하게 괴사해 가고 전신이 마비된 진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매일 밤 그의 찻잔에 미량으로 섞어 넣었던 [마비성 정제독]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먹인 독이 그의 면역 체계를 무너뜨려 놓았기에, 살수의 독침이 그의 몸속에서 이토록 잔인하게 폭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내가 그를 죽이고 있었던 건가?"
유리의 이성적인 머릿속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가문의 복수를 한답시고 행했던 자신의 독살 기도가, 실상은 자신들을 목숨 바쳐 지키던 유일한 수호자의 심장을 가장 잔인하게 갉아먹고 있었다는 역설적인 진실. 유리는 다리가 풀려 비틀거렸다.
"도련님……! 도련님!"
그때, 마당 구석에서 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던 늙은 집사 노가가 참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노가는 무현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피투성이 옷자락을 붙잡으며 통곡했다.
"어찌하여 이리 미련하십니까! 아가씨들이 도련님을 오해해 칼을 꽂고 독을 먹이는데도, 왜 한마디 변명도 없이 몸으로 다 받아내시는 겁니까! 아가씨들, 제발 눈을 뜨십시오! 도련님은 가문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도련님은—"
"노가!"
무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노가의 말을 매섭게 자르고 나섰다. 그의 눈동자에서 서늘하고 무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면 내 손으로 먼저 당신의 목을 벨 것입니다. 아가씨들을 안채로 모시고, 마당의 시체들을 조용히 치우십시오."
무현은 노가를 향해 미세한 기공을 방출해 그의 목소리를 강제로 억눌렀다. 그의 눈빛은 절박하게 노가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말하지 마십시오. 아가씨들이 진실을 알게 되면 죄책감으로 무너집니다. 제발 침묵해 주십시오.* 노가는 가슴을 치며 오열했으나, 도련님의 완강한 의지와 [집사 노가의 침묵의 맹세] 족쇄에 가로막혀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설화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심장이 찢겨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무현의 차가운 태도와 노가의 절박한 오열 사이에서, 그녀가 그동안 믿어왔던 세상의 진실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있었다.
설화는 떨리는 걸음으로 무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의 눈가에 마침내 맑은 눈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차가운 얼음조각 같던 장녀의 철옹성이 완벽하게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송무현…… 대체 왜……."
설화가 떨리는 손을 뻗어 무현의 가슴팍에 감긴, 피로 붉게 물든 붕대를 만지려 했다. 과거 자신이 찔렀던 비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진물을 흘리고 있는 그 비극의 자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스윽.
하지만 무현은 그녀의 손길이 닿기 직전,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녀의 손을 거절했다. 그의 은빛 머리칼이 달빛 아래 쓸쓸하게 흔들렸다.
"몸이 더러우니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아가씨. 피가 묻습니다."
무현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낡은 제식 장검을 꽉 쥔 채 몸을 돌렸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자신의 어두운 방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붉은 핏자국이 그의 비장한 행보를 증명하고 있었다.
탁.
방 문이 굳게 닫히고 마당에는 오직 살수들의 시체와, 진실을 마주하고 얼어붙은 자매들의 숨 막히는 침묵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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