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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별장의 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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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암 정상에서부터 흘러내린 피가 턱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송무현은 비틀거리는 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안개별장의 뒷마당으로 들어섰다. 단전은 가뭄이 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고, 심장은 백유리가 먹인 마비성 정제독과 고대 결계석을 무리하게 가동한 반동으로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무현은 [고통 억제] 기예를 가동했다. 뇌로 향하는 모든 통증의 신경을 강제로 비틀어 막자, 비명조차 나오지 않던 지옥 같은 극통이 서서히 현실감을 잃고 멀어졌다. 그는 가죽 장화로 마당에 흘린 핏자국을 흙으로 덮어 지우며, 완전히 하얗게 세어버린 은백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스승의 죽음과 전신의 경락이 찢어지는 과부하를 겪으며 변해버린 백발은, 차가운 새벽달 빛을 받아 기괴하리만치 시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도련님……!"


어둠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늙은 집사 노가가 소리 없이 달려와 무현의 팔을 붙잡았다. 노가의 손끝이 사르르 떨렸다. 무현의 가죽 갑옷 틈새로 배어 나오는 붉은 선혈과, 단 한 가닥의 어둠도 남지 않은 채 눈부시게 세어버린 은발을 목격한 늙은 집사의 눈에서 결국 피눈물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머리가…… 머리가 어찌 이리 되셨습니까……! 정녕 몸을 이리 버리시면서까지 아가씨들을 지키셔야 한단 말입니까?"


"목소리가 큽니다, 노가."


무현은 초점을 잃어 흐릿해진 눈동자로 노가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안개보다 더 낮고 고요했다.


"조태강의 정규군은 결계의 안개 장막에 막혀 퇴각했습니다. 당분간 별장의 위치는 안전할 겁니다. 아가씨들이 깨어나기 전에 방으로 들어가 몸을 정돈해야 하니, 물과 깨끗한 붕대를 준비해 주십시오."


"도련님……."


노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무현은 마비되어 감각이 없는 왼손 손가락을 가죽 망토 자락 아래로 깊숙이 숨기며 천천히 안채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복도 모퉁이의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기척이 느껴졌다.


유리였다. 그녀는 단정한 안경알 너머로 날카롭고 예리한 고양이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무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무현의 얼굴을 지나, 그의 어깨 너머로 흘러내린 투명한 은백발에 멈췄다. 유리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머리카락이……."


유리의 목소리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희끗희끗한 흔적만 있던 사내의 머리가, 하룻밤 사이에 완벽한 백발로 변해 있었다. 가문을 배신하고 아버님을 밀고한 더러운 역적의 얼굴이라기엔, 그 은발은 너무나도 기이하고 처절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 유리는 소매 속에 숨겨둔 마도 독병을 만지작거리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가증스러운 연극을 또 시작했군. 아버님을 팔아넘긴 죄책감에 머리라도 센 척하는 건가? 아니면 우리 동정심이라도 유발하려는 수작인가?"


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유리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여 목례를 올렸을 뿐이다. 변명은 필요 없었다. 그녀들의 증오가 깊어질수록 복수를 향한 칼날은 날카로워질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스승 백무진 대장군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는 길이었다. 무현은 유리의 곁을 스쳐 지나 자신의 방으로 묵묵히 걸어갔다. 유리는 그의 어깨에서 풍겨오는 짙은 피비린내와 흔들림 없는 침묵에 알 수 없는 도덕적 소름과 정서적 흔들림을 느끼며 이를 갈았다.


* * *


넷째 날 새벽녘, 안개별장을 둘러싼 보라색 마도 안개 장벽은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결계가 가동되며 일어난 일시적인 마력의 뒤틀림은,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들을 별장 안마당으로 이끌었다.


사공혁의 사주를 받고 조태강의 거액의 현상금을 노린 일류 살수 집단, 흑풍회(Heukpung-hoe)의 살수들이 안개 장벽의 틈새를 비집고 별장 담벼락을 넘어 침투한 것이었다.


스스스슥.


바람 소리조차 내지 않는 기묘한 신형들이 별장의 기와지붕과 마당의 그늘을 타고 빠르게 움직였다. 흑풍회의 전위 대장이자 쌍검을 사용하는 기민한 살수 잔랑(Zan-rang)이 이빨 모양의 쌍검을 뽑아 들고 자매들의 처소가 있는 안채를 향해 도약했다.


"역적의 핏줄들을 생포하라! 거역하는 자는 사지를 잘라라!"


잔랑의 나직한 명령과 함께 서너 명의 살수들이 안채의 창문을 깨부수며 난입했다.


"아악!"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셋째 백여진이었다. 멸문의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채 악몽에서 깨어난 여진은, 창문을 깨고 들어온 검은 복면의 살수들을 마주하자 공포에 질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머리맡에 있던 [백여진의 정령 방울]이 잘게 흔들리며 가녀린 소리를 냈으나, 정령을 소환하기에는 그녀의 심장이 너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진아!"


옆방에서 검을 수련하던 장녀 백설화가 백화검을 뽑아 들고 벽을 부수며 난입했다. 설화의 백화검 끝에서 서늘한 빙결 검기가 피어올랐으나, 아직 무공이 불완전하게 봉인된 그녀의 검로는 잔랑의 정교한 쌍검 연환살격에 가로막혔다.


챙! 채쟁!


"과거 대장군의 딸이라더니, 힘이 턱없이 부족하구나! 얌전히 밧줄을 받아라!"


잔랑이 이빨 모양의 쌍검을 기괴한 궤적으로 휘두르며 설화의 백화검을 얽어맸다. 설화의 가냘픈 손목이 잔랑의 강력한 완력에 밀려 부르르 떨렸다. 유리가 급히 손가락 끝에 마력을 모아 마도 연금술을 시전하려 했으나, 살수들의 신속한 신형은 이미 유리의 등 뒤를 선점하고 있었다.


세 자매가 완벽하게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안채의 대청마루 바닥이 폭발하듯 내려앉으며, 눈부신 은백색 빛무리가 번개처럼 공간을 가르고 나타났다.


[뇌전 보법(Noejeon Bobeop)].


다리의 혈도를 내력으로 강제 자극하여 공간을 접어 달리는 초고속 신법이었다. 전신에 피투성이 붕대를 감고, 단 한 가닥의 어둠도 없는 은백발을 거칠게 휘날리는 사내—송무현이 자매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역적…… 송무현?"


잔랑이 경악하며 쌍검을 뒤로 물렸다. 무현의 흐릿한 은회색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마비된 왼손 대신, 오른손으로 낡은 은랑 기사단의 제식 장검을 쥐고 있었다. 검자루를 감은 가죽 끈 위로 무현의 정화된 피가 스며들어 붉게 물들었다.


"내 뒤로 물러서십시오, 아가씨들."


무현의 나직한 목소리가 자매들의 귓가를 때렸다. 여진은 무현의 넓고 피투성이인 등을 바라보며 떨림을 멈추었고, 설화와 유리는 그의 완벽한 은발 비주얼과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압도적인 살기에 숨을 죽였다.


"하하! 만신창이가 된 배신자 기사 놈이 허세를 부리는구나! 죽여라!"


잔랑의 외침과 함께 살수들이 사방에서 무현을 향해 쇄도했다. 무현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는 검집째로 장검을 쥐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불살의 방어막].


푸른빛의 반투명한 거대한 기사도 장벽이 무현의 전방에 형성되며 날아오는 살수들의 비수와 암기들을 모조리 튕겨냈다. 콰콰쾅! 하는 격렬한 충격음과 함께 살수들의 신형이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무현은 아가씨들이 다치지 않도록 검날을 세우지 않고 오직 검집의 타격과 내력의 장벽만으로 적들을 밀쳐내는 고결한 불살의 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놈이 검을 뽑지도 않고 감히 우리를 무시해?"


잔랑이 분노하며 쌍검을 교차해 무현의 목덜미를 겨누고 쇄도했다. 무현은 [뇌전 보법]으로 순간적으로 공간을 좁혀 잔랑의 쌍검 궤적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낡은 제식검의 검집 끝으로 잔랑의 손목 혈도를 정확히 가격했다.


빡!


"크아악!"


잔랑의 쌍검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의 신형이 뒤로 비틀거렸다.


하지만 무현의 몸은 이미 한계였다. 무리하게 내력을 쥐어짜 방어막을 유지하느라 심장 경락의 괴사 부위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전신의 모세혈관이 터져 붕대가 순식간에 붉은 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 찰나의 빈틈을 살수들이 놓치지 않았다.


서걱!


일반 살수 한 명의 검날이 무현의 무방비한 등 뒤를 길게 베고 지나갔다. 가죽 갑옷이 찢어지고 붉은 선혈이 허공에 비산했다. 하지만 무현은 [고통 억제] 기예 덕분에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오히려 몸을 돌려 그 살수의 가슴을 장화 발로 걷어차 벽에 처박아버렸다. 자매들을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그의 절대적인 호위 의지는 광기에 가까웠다.


그때였다.


별장의 짙은 안개 속에서, 단 한 줄기 소리도 기척도 없이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흑풍회의 수장, 골사(Gol-sa)였다. 해골 같은 얼굴에 외눈박이 살기를 빛내는 골사는 무현이 등을 베여 중심이 흔들린 찰나의 순간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골사의 소리 없이 뼈를 깎아내는 흑풍 도가 무현의 심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찔러 들어왔.


보통의 무인이라면 인지조차 하지 못했을 암습이었다. 하지만 무현의 머릿속에는 이미 주변 수십 보 안의 적들의 궤적이 은빛 실선으로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심안 - 마력 감지].


무현은 감고 있던 눈을 번뜩이며 오른손의 제식검을 비스듬히 치켜 올렸다. 소리도 형체도 없는 검기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무형아 - 그림자 베기(Silent Sword)].


스릉!


파공음조차 나지 않는 예리한 은빛 궤적이 골사의 흑풍 도 날을 정확히 맞받아쳤다. 콰직! 하는 날카로운 파쇄음과 함께 골사의 명검이 반으로 부러져 나갔다. 무현의 보이지 않는 검기는 골사의 부러진 검 날을 타고 올라가 그의 가슴팍을 깊숙이 베어 넘겼다.


"컥……!"


골사는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가 마당의 얼어붙은 대지 위로 굴러떨어졌다. 무현의 초월적인 기예와 은밀한 쾌검 앞에 일류 살수 집단의 수장이 일격에 치명상을 입은 것이었다.


"수장님!"


잔랑과 살아남은 살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골사를 부축해 안개 속으로 신속하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무현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이미 터지기 직전이었고, 입술 틈새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투는 승리로 끝났고, 자매들은 단 한 군데의 상처도 없이 무사했다.


무현은 안도하며 검을 거두려 했다. 완전히 세어버린 은백발의 머리칼 사이로 흐릿해진 시야를 억지로 바로잡으며, 그는 등 뒤에 서 있는 설화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안개 속으로 도망치던 골사가 품속에서 마지막 발악으로 소형 발사기를 꺼내 들었다.


핏빛 살기가 서린 미량의 추적 은침—[흑풍회의 추적 침]이 시퍼런 독기를 머금은 채 허공을 갈랐다. 은침의 궤적은 무현이 아닌, 그의 등 뒤에서 넋을 잃고 서 있던 첫째 백설화의 이마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설화 아가씨……!"


무현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단전에서 마지막 남은 내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뇌전 보법]이 다시 한번 시전되며 무현의 신형이 번개처럼 설화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푸슉!


차가운 쇠붙이가 살을 뚫고 뼈에 박히는 둔탁한 파열음이 안개별장의 마당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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