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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장벽을 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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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의 서늘한 시선이 무현의 피 묻은 입술에 닿는 순간, 무현은 요동치는 단전의 독기를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차가운 달빛이 두 사람의 대치선을 비추고 있었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만이 적막한 안개별장의 안마당을 채웠다. 무현은 바닥에 뱉어낸 검붉은 피를 가죽 장화로 소리 없이 문질러 지우며, 터진 입술을 망토 자락으로 덤덤하게 훔쳐냈다.


복도 그늘에 서서 그를 지켜보던 백유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의 단정한 안경알 너머로 차갑고 예리한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무현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해부하듯 쫓았다. 그녀의 소매 안쪽에는 여전히 보랏빛 마도 독병이 숨겨져 있었고, 그 끝에서는 방금 전까지 무현의 심장을 불태웠던 [마비성 정제독]의 잔향이 미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직도 살아 있군, 배신자."


유리의 목소리는 얼음송곳처럼 날카롭고 지적이었다. 그녀는 무현이 고통에 겨워 바닥을 기어 다니며 목숨을 구걸하기를 바랐다. 가문을 팔아넘긴 더러운 역적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피를 토하면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은회색 눈동자로 자신을 차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무현은 [고통 억제] 기예를 극한으로 가동하고 있었다. 심장이 쪼개지는 듯한 극통이 전신을 찢어발기고 있었고, 왼손의 손가락들은 독소의 침투로 인해 일시적으로 완벽히 마비되어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망토 아래로 마비된 왼손을 숨긴 채, 오른손으로 가볍게 가죽 망 망토를 정돈하며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가씨들이 안전하게 이곳에 머무는 한, 저는 죽지 않습니다."


"위선 떨지 마라." 유리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안경 너머의 눈빛에 깃든 살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네가 아버님을 밀고하고 얻은 그 더러운 목숨이, 겨우 이 정도 독으로 끊어질 리 없겠지. 내일 차에는 더 강한 독을 타 주마. 네놈이 숨겨둔 가문의 비전서를 불 때까지, 매일 밤 심장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 버텨봐라."


무현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독설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유리는 그의 기이할 정도의 고결함과 침묵에 알 수 없는 도덕적 불쾌감과 소름을 느끼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 안채로 사라졌다. 그녀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무현은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도련님……."


어둠 속에서 늙은 집사 노가가 피눈물을 흘리며 다가왔다. 무현은 말없이 손을 들어 노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어버린 왼손을 들어 올려 미세하게 내력을 순환시켰다. 정화 혈맥이 독소를 억누르고는 있었으나, 심장 경락의 70%가 괴사한 상태에서 유리의 독은 그의 육체를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그때, 무현의 예리한 [심안 - 마력 감지] 기예가 골짜기 외곽의 대지를 울리는 불길한 진동을 포착했다.


쿵. 쿵. 쿵.


단순한 야생동물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철갑을 두른 수많은 군마들의 말발굽 소리, 그리고 쇠붙이가 부딪히는 서늘한 파공음이 안개골짜기의 입구를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무현의 안색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노가, 아가씨들을 안채 깊숙이 대피시키십시오. 적들이 왔습니다."


"예? 그게 무슨…… 이 짙은 안개를 뚫고 들어올 자들이 있단 말입니까?"


"조태강입니다."


무현의 입에서 주신제국 국경 수비대 사령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탐욕스럽고 잔인한 사내. 백씨 가문의 세 딸을 체포해 황실에 바치고 중앙 권력으로 복귀하려는 조태강이, 결국 수백 명의 [철위 기사]들과 수색견들을 이끌고 안개골짜기 경계선 턱밑까지 육박해 온 것이었다. 현재 골짜기를 덮고 있는 안개는 너무 얇았다. 고대의 결계가 완전히 활성화되지 않아, 수색견들의 예리한 후각과 마도 추적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터였다.


이대로 둔다면 별장의 위치가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무현은 마비된 왼손을 억지로 쥐었다 펴며 결단을 내렸다. 자매들을 피신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태강의 포위망은 이미 골짜기 전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었다.


안개골짜기 최고봉인 백호암 정상에 위치한 [고대 결계석]을 가동하는 것.


무현은 노가에게 아가씨들을 부탁한다는 짧은 목례를 남긴 뒤, 가죽 망토를 휘날리며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심장의 극통이 매 걸음마다 각혈을 유도했으나, 그는 이빨을 악물고 통증을 강제로 억누르며 백호암의 가파른 절벽으로 향했다.


백호암 절벽은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밤이 깊어 서리까지 내려앉아 극도로 미끄러웠다. 정상적인 적혈기사급 무인이라도 오르기 힘든 험로를, 무현은 내상과 독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이끌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스슥. 스스슥.


오른손 끝이 날카로운 바위 모서리에 찢겨 나가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마비된 왼손은 바위 틈새에 억지로 끼워 넣어 몸뚱이를 지탱하는 지지대로만 사용했다. 가슴팍에 새겨진 백설화의 비수 상처가 벌어지며 하얀 붕대 위로 선혈이 붉게 배어 나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품속에 품은 스승 백무진 대장군의 피 묻은 가죽 편지갑이 그의 가슴을 차갑게 누르며 기사로서의 맹세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지켜야 한다. 스승님의 딸들을…… 내 목숨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한참을 기어오른 끝에, 무현은 마침내 백호암 정상의 평지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고대 마도 문자가 빼곡히 새겨진 거대한 기암괴석, [고대 결계석]이 장엄하게 서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마력이 오염되고 노후화된 석판 위로 밤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자, 수백 개의 횃불이 안개골짜기 입구를 붉게 물들이며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이 보였다. 조태강의 국경 수비대 정찰병들이 수색견들의 짖는 소리를 따라 별장 방향의 계곡으로 진입하기 직전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무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결계석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찢어진 오른손바닥을 결계석 중앙의 마도 인장에 단단히 밀착시켰다. 쇠비린내 나는 피가 고대 룬 문자 위로 스며들었다. 무현은 깊은 호흡을 내쉬며, 스승이 전해준 고서에서 익혔던 [안개골짜기 고대 결계식]의 구결을 나직하게 암송하기 시작했다.


"천지혼돈, 안개 장벽을 세워라……."


구결이 완성되는 순간, 고대 결계석이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무현의 손바닥을 빨아들이듯 고정시켰다.


위이이이잉!


그것은 굶주린 야수와도 같았다. 결계석은 노후화된 작동 부위를 가동하기 위해, 시술자인 무현의 단전에서 내력을 사정없이 쥐어짜기 시작했다. 무현의 몸속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순수한 내공이 폭풍처럼 결계석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아악……!"


초인적인 인내심을 지닌 무현조차 참지 못하고 비장한 비명을 질렀다. 전신의 모세혈관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가며 그의 가죽 갑옷 틈새로 피가 배어 나왔다. 단전이 통째로 뒤틀리고 심장 주변의 괴사된 혈맥들이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과부하가 밀려왔다.


당초 예상했던 내공의 두 배 이상이었다. 결계석의 마도 오염이 너무 심해, 결계를 켜기 위해서는 무현의 생명력 그 자체를 제물로 바쳐야만 했다. 무현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오른손을 결계석에서 떼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푸른빛 기사도의 영력이 뿜어져 나와 결계석의 붉은 오염을 하얗게 정화해 나갔다.


그 처절한 정화의 대가로, 무현의 머리칼에 남아 있던 마지막 검은빛마저 완벽히 바래지기 시작했다. 스승의 죽음으로 하얗게 세어버렸던 그의 머리카락은, 이제 단 한 가닥의 어둠도 남지 않은 채 완벽하고 투명한 눈부신 은백발(은발)로 완전히 변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결계석이 장엄한 빛을 발하며 가동되었다.


콰아아아아!


백호암 정상을 시작으로, 짙고 무거운 보라색 마도 안개 장막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와 안개골짜기 전역을 덮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골짜기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거대한 안개의 감옥으로 변모했다.


절벽 아래, 계곡 입구까지 진입했던 조태강과 국경 수비대 병사들은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마도 안개는 시야를 완벽히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무현이 미리 살포해 둔 안개꽃 가루의 성분과 결합하여 수색견들의 코를 완벽히 마비시켰다. 사방에서 환각을 일으키는 안개 장벽의 압박에 군마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으악! 눈이 보이지 않는다!"


"개들이 갈팡질팡합니다! 사령관님, 결계입니다! 고대의 마도 결계가 작동했습니다!"


조태강은 황금 검을 뽑아 들고 허공을 베었으나, 사방을 메운 짙은 보라색 안개 장막은 검기로는 벨 수 없는 무형의 벽이었다. 진입로조차 찾지 못하고 군마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조태강은 이를 갈며 퇴각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퇴각하라! 일단 골짜기 밖으로 물러선다!"


수백 명의 정규군이 혼비백산하여 골짜기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간 전체를 왜곡한 무현의 처절한 수호 전략이 완벽한 대승을 거둔 순간이었다.


하지만 백호암 정상에 선 무현의 상태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결계석에서 손이 떨어지는 순간, 무현은 무릎을 꿇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단전의 기가 완전히 고갈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심장 경락의 봉인이 과부하로 인해 일시적으로 완전히 풀리며, 그는 가슴을 쥐어짜며 차가운 암석 위로 거대한 선혈을 토해냈다.


"우욱…… 쿨럭! 컥!"


토해낸 피가 그의 완전히 하얗게 세어버린 은백발 머리칼 끝을 붉게 물들였다. 눈동자의 초점은 흐릿해져 밤하늘의 달빛조차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였다. 일시적인 실명과 전신 마비의 전조였다.


그는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린 채,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묵묵히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속 편지갑이 그의 멈추려는 심장을 억지로 뛰게 만들고 있었다.


적들은 일시적으로 돌려보냈으나, 이 결계는 영구적이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자신의 내력을 제물로 바쳐야만 유지되는 가혹한 족쇄가 채워진 것이었다.


한편, 안개골짜기 외곽으로 퇴각한 조태강 사령관은 분노로 가득 차 주먹을 쥐었다. 정규군으로 골짜기를 뚫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지하의 살수 집단을 떠올렸다.


"흑풍회(Heukpung-hoe)의 골사(Gol-sa)를 불러라.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서라도, 그 안개 속으로 침투해 역적의 딸들과 송무현의 목을 가져오라 해라."


짙은 마도 안개가 골짜기를 완벽히 뒤덮어 적들이 발길을 돌리는 데 성공하지만, 결계석에서 내려온 무현의 머리카락은 이전보다 훨씬 하얗게 세어버려 완벽한 은발이 되어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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