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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곡현의 그림자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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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골짜기의 아침은 언제나 서글픈 침묵으로 시작된다. 사방을 메운 짙은 안개는 별장의 낡은 기와 틈새로 스며들어 뼛속까지 시린 한기를 몰고 왔다.


송무현은 마당 구석에서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피 묻은 입술을 닦아냈다. 어제 백유리가 건넸던 차에 담겨 있던 마비성 정제독의 열기가 아직도 심장 주변의 혈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고통 억제] 기예로 통증을 강제로 잠재웠으나, 내공의 70%가 봉인된 만신창이의 몸에 가해진 독소의 여파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단전에서 솟구치는 기운이 불규칙하게 요동칠 때마다 목덜미에 솟아오른 검은 핏줄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무현에게는 자신의 몸 상태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는 낡은 창고의 문을 열고 내부를 살폈다. 별장에 남아 있는 식량은 이제 며칠 분의 밀가루와 말린 고기 몇 조각이 전부였다. 혹독한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대장군의 세 딸—백설화, 백유리, 백여진—에게 입힐 두꺼운 방한복이나 추위를 이겨낼 숯조차 턱없이 부족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복수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녀들이 먼저 이 차가운 요새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터였다. 스승 백무진 대장군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무슨 수를 써서든 물자를 구해와야 했다.


무현은 방 한구석에 놓인 자신의 무기를 내려다보았다.


낡은 은랑 기사단의 제식 장검. 과거 제국 최정예 기사단 중 하나인 은랑 기사단에서 수여받은, 기사로서의 유일한 긍지이자 영광의 상징이었다. 비록 지금은 가문을 배신했다는 더러운 누명을 쓰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나, 이 검만큼은 그의 고결했던 과거를 증명하는 마지막 물증이었다. 무현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장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때 묻고 낡은 가죽 끈을 가져와 검자루와 검집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은빛으로 빛나던 기사단의 문양과 푸른 보석이 거친 가죽 뒤로 완전히 가려졌다. 이제 이 검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해 빠진 용병의 녹슨 철검처럼 보일 뿐이었다.


"노가."


무현은 별장 뒤편에서 말없이 서 있던 늙은 집사를 불렀다.


"예,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노가의 눈가에는 밤새 흘린 눈물 흔적이 역력했다. 무현이 유리의 독배를 군말 없이 삼키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노가였다. 그의 가슴은 이미 도련님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갈가리 찢겨 있었다.


"밤을 틈타 귀곡현으로 다녀오겠습니다. 아가씨들이 깨어나기 전에 돌아올 테니,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안채를 지켜주십시오. 특히 여진 아가씨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니 문밖에서 기척을 살피셔야 합니다."


"도련님, 하지만 그 몸으로 귀곡현까지 가시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황실 추격대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고 있고, 국경 수비대의 검문이 극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몸속의 마비독이 아직……."


"상관없습니다. 제 정화 혈맥이 독소를 억누르고 있으니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식량과 방한복이 없으면 아가씨들이 겨울을 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더 급합니다."


무현은 노가의 만류를 단호하게 가로막고 회색 가죽 망토를 깊게 눌러썼다. 그의 하얗게 센 은발이 망토 자락 뒤로 숨겨졌다. 품속에는 스승의 피 묻은 가죽 편지갑을 소중히 품고, 가죽으로 감싼 제식 장검을 허리에 찬 채 그는 안개 속으로 소리 없이 신형을 날렸다.


* * *


주신제국의 남부 국경 지대에 위치한 귀곡현(Gwigok-hyeon)은 제국의 법보다 칼과 돈이 먼저 통하는 무법천지였다. 온갖 밀수꾼, 현상금 사냥꾼, 그리고 전쟁 난민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이곳은 짙은 흙먼지와 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귀곡현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관문인 동쪽 검문소에는 횃불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국경 수비대 사령관 조태강의 부하들이 삼엄한 표정으로 출입하는 이들의 소지품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다. 대장군 가문의 생존자들을 체포하라는 황실의 교지가 내려진 이후, 검문은 평소보다 배는 더 까다로워져 있었다.


무현은 낡은 가죽 망토의 깃을 올린 채 천천히 검문소로 걸어갔다. 그의 거대한 체구와 허리에 찬 묵직한 검자루가 수비대 초소병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멈춰라!"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두 명의 초소병이 창끝을 무현의 가슴팍으로 겨누었다.


"망토를 벗고 얼굴을 보여라. 그리고 그 허리에 찬 검은 무엇이냐? 흔한 뜨내기 용병치고는 기백이 심상치 않구나."


무현은 고개를 숙인 채, 내공을 제어하여 기의 흐름을 극도로 낮추었다. 지금 그의 상태는 겉보기에는 그저 몸이 상한 삼류 무인에 불과해 보였다. 그는 쉰 목소리로 위장하여 대답했다.


"국경 너머에서 가벼운 일거리를 찾으러 온 낭인입니다. 검은 그저 호신용일 뿐입니다."


초소병 한 명이 다가와 무현의 허리에 찬 검자루를 거칠게 움켜쥐려 했다. 가죽으로 감싸여 있었으나, 기사단 제식 장검 특유의 단단한 강철 무게감이 손끝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초소병의 눈빛에 의심이 서렸다.


"호신용이라기엔 검의 무게가 심상치 않군. 신분을 증명할 마패를 제시해라. 없다면 즉시 지하 감옥으로 압송하겠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무현의 심장 경락이 긴장감으로 인해 요동치며 마비독의 열기가 가슴팍을 찔렀다. 그는 고통을 억누르며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과거 설태평이 은밀히 전해주었던 귀곡현 흑시장 위조 마패를 꺼내 조용히 내밀었다.


초소병은 마패를 받아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흑시장 마패인가…… 요즘 위조품이 판을 쳐서 말이지. 정밀 감지기를 가져와라!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다른 병사가 품속에서 푸른빛을 내뿜는 마도 감지기를 꺼내 들었다. 감지기의 마력 파동이 위조 마패에 닿는 순간, 미세한 경고음이 울릴 것이 뻔했다. 무현은 망토 자락 속에서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의 정교한 기의 흐름이 허공을 가르고 초소병의 손목 혈도를 미세하게 자극했다.


"앗 차가워!"


병사가 순간적으로 손목에 한기를 느끼며 감지기를 떨어뜨리려 했다. 무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매 속에서 빛나는 주신 제국 금화 세 닢을 초소병의 손바닥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금화가 부딪히는 묵직하고 맑은 소리가 병사의 귓가를 자극했다.


"먼 길을 오느라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귀곡현 안에서 조용히 약을 구하고 떠날 테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손바닥에 닿은 금화의 묵직한 촉감에 초소병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탐욕으로 물들었다. 주신 제국 금화 세 닢은 변방의 말단 병사들이 서너 달을 꼬박 일해야 만질 수 있는 거금이었다. 감지기를 들고 있던 병사는 슬그머니 도구를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마패를 무현에게 돌려주었다.


"흠, 정밀 감지기까지 쓸 필요는 없겠군. 마패의 각인이 확실하다. 통과해라. 대신 현 안에서 소란을 피우면 그 즉시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감사합니다."


무현은 고개를 숙이고 삼엄한 검문소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병사들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으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각했다. 기사로서의 명예와 긍지를 돈으로 사버린 비참한 현실이었지만, 안개별장에 홀로 남겨진 자매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수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귀곡현 중심가에 위치한 만풍객잔(Manpung Tavern)은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낭인들과 현상금 사냥꾼들의 거친 고함과 술잔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다. 무현은 객잔의 혼잡한 대청을 지나, 미리 약속된 안쪽 비밀 방의 문을 두드렸다.


똑, 똑똑, 똑.


특유의 규칙적인 음률로 문을 두드리자, 문이 조용히 열리며 화려한 비단 옷을 걸친 미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 흑시장의 대부이자 태평상회(Taepyeong Merchant House)의 주인, 설태평이었다.


"무현이냐?"


태평은 무현의 가죽 망토를 걷어내며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하얗게 세어버린 은발과 창백한 안색을 보는 순간, 태평의 매서운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 바보 같은 녀석…… 몸이 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거냐? 어깨의 상처는 무엇이고, 숨결은 왜 이리 가쁜 게야? 그 백씨 가문의 계집들이 또 네게 칼을 들이댄 것이냐?"


태평은 무현을 방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따뜻한 보혈 차를 무현에게 건넸다.


"마셔라. 네놈의 심장 맥박이 지금 정상적인 기사의 그것이 아니다. 정화 혈맥을 가졌으면서도 독기에 절어 있다니,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건가?"


무현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내면의 열기를 식혔다.


"유리 아가씨가 차에 마비독을 탔더군. 알고 마셨다."


"뭐라?! 알고도 마셨다고? 네놈이 드디어 미친 게로구나!" 태평이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금반지를 낀 그의 손가락이 분노로 가늘게 떨렸다. "스승의 딸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네 목숨을 통째로 바칠 셈이냐? 세상 사람들은 모두 네놈을 가문을 팔아먹은 배신자라 욕하는데, 정작 너는 원수의 딸들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삼키고 있어! 이 사실을 그 계집들이 알기나 한단 말이냐?"


"알 필요 없다." 무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녀들이 진실을 알면 죄책감에 무너질 거다. 나를 향한 증오가 살아갈 원동력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배신자로 남을 것이다. 태평아, 우린 오랜 친구지 않느냐. 내 결정을 존중해 다오."


태평은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현의 완고한 기사도적 신념을 꺾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그래, 네놈 고집을 누가 말리겠느냐. 그래서, 오늘 밤 이 위험한 무법지대까지 나를 찾아온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


무현은 허리에 차고 있던 가죽으로 감싼 은랑 기사단의 제식 장검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가죽 끈을 천천히 풀어내며 은빛으로 빛나는 검신을 드러냈다. 비록 상처투성이였으나, 명검 특유의 서늘한 영기가 비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 검을 저당 잡히러 왔다."


"무현아…… 너 지금 제정신이냐?" 태평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 검은 네가 은랑 기사단장이 될 때 황실에서 수여받은, 네 기사로서의 영혼이자 목숨이다. 이것을 저당 잡히겠다고?"


"별장에 식량이 바닥났다. 겨울을 날 방한복과 숯, 그리고 아가씨들의 치료약이 시급하다. 지금 내게 남은 재화는 없다. 이 검을 맡길 테니, 태평상회의 이름으로 삼엄한 감시를 피해 안개별장 외곽까지 물자를 보급해 다오. 주신 제국 금화로 환산하여 선금을 쳐다오."


태평은 탁자 위의 장검을 어루만졌다. 기사로서 무기를 저당 잡히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현의 자학적인 희생정신에 가슴이 아려왔다.


"이 검은 내가 고이 보관하마. 결코 다른 이의 손에 넘기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물자는 내일 새벽, 태평상회의 비밀 위장 마차를 통해 안개골짜기 경계선 바위 밑에 안전하게 묻어두겠다. 금화 백 닢과 최고급 방한 누비옷, 그리고 식량을 넉넉히 준비하지."


"고맙다, 친구여."


무현이 고개를 숙이자, 태평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고마워할 것 없다. 하지만 무현아,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내가 지하 정보망을 통해 입수한 사실이 있다. 백무진 대장군에게 반역 누명을 씌운 장본인인 대재상 사마충(Sama Chung)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무현의 은회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사마충이 왜?"


"백가 가문이 대대로 수호하던 북부 영지의 군사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도 모자라, 가문의 비전서와 대장군의 사유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액수의 제국 군비를 횡령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즉, 대장군의 반역죄는 사마충이 자신의 거대한 정적 숙청과 재산 착복을 가리기 위해 철저히 기획하고 조작한 가짜 음모라는 뜻이다. 황실 내부의 고위 관료들도 이 비리에 얽혀 있어,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세 딸의 목을 더욱 악착같이 노리고 있는 게야."


태평의 폭로는 무현의 가슴속에 거대한 분노의 불꽃을 지폈다. 스승 백무진 대장군은 제국의 충신이었으나, 탐욕스러운 간신 사마충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희생당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태평이 목소리를 한층 더 낮췄다. "적혈기사단(Red Blood Knights)의 부단장 진태성이 국경 지대에 특수 전령들을 배치했다. 최근 안개골짜기 주변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의 검로를 분석하여, 은랑 기사단이나 백가 가문의 정통 무공이 사용되었는지 추적하기 위함이다. 만약 네가 검을 뽑아 은랑 기사단의 검기를 일이라도 드러내는 순간, 안개별장의 위치는 즉시 탄생당할 것이다. 절대 검을 함부로 뽑지 마라."


"명심하마. 검로를 숨기고 오직 심검의 기예로만 대처하겠다."


무현은 태평이 건넨 금화 주머니를 망토 속에 품고, 가죽으로 감싸인 검집만을 허리에 찬 채 비밀 방을 나섰다. 기사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저당 잡힌 대가로 얻은 차가운 금화들이 품속에서 짤랑거렸다. 비참함이 뼈를 찔렀으나, 이것으로 자매들이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그의 무거운 발걸음을 지탱해 주었다.


* * *


새벽녘, 안개골짜기로 돌아가는 도중 무현은 태평상회의 마차 뒤를 조용히 미행하며 주위를 경계했다. 마차 바닥의 이중 격벽에는 백 닢의 주신 제국 금화로 구매한 식량 포대와 숯, 그리고 세 자매를 위한 따뜻한 방한복이 가득 실려 있었다.


차가운 새벽 안개가 대지를 두껍게 덮고 있었다. 무현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흐려지는 시야를 집중시키며 주변의 미세한 공기 흐름을 감지하려 애썼.


스스스슥.


순간, 무현의 [심안 - 마력 감지] 영역 속으로 하늘 높은 곳에서 이질적인 마력 파동이 포착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대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가르는 가늘고 날카로운 마력의 궤적이었다.


무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회색 안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안개 장벽을 뚫고, 피처럼 붉은 안광을 빛내는 거대한 매 한 마리가 허공을 가르며 날개를 펼쳤다. 일반적인 야생 매가 아니었다. 깃털 끝마다 불길한 붉은색 마력이 서려 있는, 황실 직속 적혈기사단의 정찰 정령매(Reconnaissance Spiritual Hawk)였다.


정령매는 소리 없이 마차와 무현의 머리 위를 선회하며, 예리한 눈동자로 아래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정령매가 보는 시각 정보는 실시간으로 국경 지대에 주둔한 적혈기사단의 마도 나침반으로 전송되고 있을 터였다.


무현의 손끝이 가죽으로 감싸인 검자루 위로 조용히 올라갔다. 안개별장의 은밀한 생존을 위협하는 붉은 그림자가, 마침내 그의 머리 위에서 무서운 날갯짓을 시작하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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