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침입자들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잉크, ‘라피스 퍼플’.
그 서늘한 보랏빛 얼룩이 남긴 증오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 이른 오후였다. 수액 주사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윤설아는 한강 빌라 지하 아틀리에의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간이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녀가 한 일은 도구들을 정돈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독일제 빈티지 메스, 그리고 깨진 시약병들의 잔해를 쓸어 담는 내내 왼손목의 은빛 카테터 흉터 자국이 아릿하게 쑤셔왔다.
하지만 육체적인 피로보다 설아의 신경을 긁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아틀리에 철문이었다. 지난밤 아드리안이 폭주하며 내뿜은 영적 냉기 탓에 디지털 도어락의 내부 기판은 완전히 쇼트가 나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두꺼운 쇠 빗장을 걸어 잠갔지만, 외부의 물리적인 타격에는 한없이 취약한 상태였다. 불안감은 안개처럼 조용히 아틀리에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콰아앙!
갑작스러운 굉음이 지하의 고요를 찢어발겼다. 낡은 콘크리트 벽이 크게 흔들리며 미세한 시멘트 가루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설아는 본능적으로 작업대 위에 놓인 아드리안의 초상화를 품에 안았다.
쾅! 콰직, 콰강!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안쪽으로 찌그러졌다. 문틈 사이로 굵고 투박한 쇠지게(빠루)의 날카로운 끝부분이 파고들었다. 누군가 밖에서 무지막지한 힘으로 철문을 뜯어내고 있었다. 쇠 빗장이 버티는 소리는 길지 않았다. 우지끈하는 파열음과 함께 고정용 나사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고, 무거운 철문이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뿌연 먼지 구덩이 사이로 거친 구두 발소리가 들이닥쳤다. 한눈에 봐도 험악한 덩치들의 사내들이 좁은 계단을 가득 메우며 내려왔다. 그들의 중심에 선 사내는 가죽 일수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번쩍이는 금이빨을 드러내며 비열하게 웃고 있었다. 명동의 악덕 사채업자, 마동필이었다.
“야, 여기가 그 귀신 흘린 유물들이 가득하다는 비밀 창고냐? 냄새 한번 퀴퀴하네.”
마동필이 코를 킁킁거리며 아틀리에 내부를 둘러보았다. 설아는 초상화를 품에 더 단단히 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차갑게 유지하려 애썼다.
“무단 침입입니다. 당장 나가세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경찰? 크하하핫! 야, 배창두! 이 기집애가 뭐라는 거냐? 경찰이란다!”
마동필의 등 뒤에 서 있던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의 행동대장, 배창두가 무식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마동필은 비웃음을 싹 거두고 품 안에서 구겨진 종이 뭉치 몇 장을 꺼내 설아의 얼굴을 향해 사정없이 던졌다. 종이 가닥들이 흩날리며 설아의 뺨을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의 맨 위에는 ‘연대보증서’라는 굵은 글씨와 함께, 할아버지 윤창현의 이름이 조잡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윤창현의 불법 사채 채권 서류였다.
“네 할배 윤창현이가 살아생전에 우리한테 빌린 원금이 오억이야, 오억. 그 노인네가 절벽에서 떨어져 뒤지는 바람에 이자가 눈더미처럼 불어났거든? 현재 총채무액 십이억 오천만 원. 네 친척 놈인 윤창식이가 그러더군. 네년이 할배 유산을 독차지하고 망원동 지하 구석에서 수십억짜리 그림을 만지고 있다고.”
“윤창식…….”
설아의 이가 갈렸다. 돈에 눈이 멀어 사채업자들에게 자신의 사적 공간과 할아버지의 유품 정보를 팔아넘긴 비열한 방계 친척. 내부의 밀고자가 아니고서는 이 비밀스러운 아틀리에의 위치를 이렇게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이 보증서는 위조된 겁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사채 따위에 손을 댈 분이 아니에요. 당장 이 불법 추심을 멈추지 않으면 법적으로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설아는 이성적으로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무법자들에게 법이라는 단어는 한낱 농담에 불과했다. 마동필은 이빨 사이에 낀 침을 바닥에 뱉으며 사방을 향해 턱짓을 했다.
“법? 여기 법보다 가까운 주먹들이 널렸는데 뭔 헛소리야. 야, 돈 될 만한 건 싹 다 가방에 담아. 저기 구석에 있는 저 현미경이랑 약품들도 꽤 비싸 보이네. 싹 쓸어라.”
“예, 형님!”
조폭들이 아틀리에 내부로 흩어지며 섬세한 복원 도구들을 마구잡이로 다루기 시작했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독일제 정밀 현미경 렌즈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설아가 밤새 정제해 둔 천연 안료 가루들이 든 유리 용기들이 깨지며 붉고 푸른 가루들이 먼지와 섞여 난장판이 되었다. 아교를 고으기 위해 준비해 둔 유리 진공 챔버의 기초 자재들 역시 그들의 거친 군화발에 밟혀 사정없이 파손되었다.
“그만둬……! 만지지 마!”
설아는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배창두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녀의 어깨를 밀쳐냈다. 바닥으로 쓰러지면서도 설아는 품에 안은 아드리안의 초상화만큼은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한기가 뺨에 닿았지만, 품 안의 초상화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한기는 그보다 더 깊은 분노를 품고 있었다.
‘아드리안…… 안 돼, 지금 나오면 안 돼…….’
설아는 마음속으로 필사적으로 아드리안을 말렸다. 아직 한낮이었다. 태양광이 완벽히 차단된 지하 공간이라 할지라도, 아드리안의 영력이 완전히 복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낮에 무리하게 힘을 쓰면 그의 영혼 자체가 기화해 소멸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마동필의 눈빛은 이미 설아의 품에 안긴 오동나무 액자로 향해 있었다. 300년 전의 고풍스러운 기품을 풍기는 액자와, 먼지가 걷히며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은발 귀족의 초상화. 미술품 매매업을 겸하는 마동필의 탐욕스러운 안목이 번뜩였다.
“야, 그 가슴에 안고 있는 그림. 그게 진짜 노다지 같은데? 당장 이리 내놔.”
“싫어……! 이건 당신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니야!”
설아는 바닥을 기며 초상화를 등 뒤로 숨겼다. 그녀의 눈에 작업대 위에 놓인 솔벤트 오리진 용제 병이 들어왔다. 화학적으로 극도로 민감한 휘발성 물질. 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병을 움켜쥐고 마동필을 향해 겨누었다.
“다가오지 마세요! 이 병에 든 건 강력한 유기 용제예요. 한 발짝만 더 오면 이 그림 표면에 뿌려버릴 겁니다! 그림이 녹아내리면 당신들은 단 일 원도 건지지 못해!”
목숨을 건 배수진이었다. 마동필 일당이 돈이 되는 미술품 자체의 훼손을 두려워한다는 점을 파고든 대담한 전술이었다. 과연 마동필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림 표면의 안료가 녹아내리면 장물로서의 가치가 완전히 말살된다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치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노련한 사채업자 보스는 설아의 손끝이 빈혈로 인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기집애가 제법 배짱을 부리네. 하지만 손이 그렇게 떨려서야 뭘 뿌리겠냐?”
마동필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배창두에게 명령했다.
“배창두, 저년 멱살 잡고 끌어내. 그림 상하지 않게 손목만 꺾어놓고 뺏어.”
“예, 형님. 흐흐.”
배창두가 거대한 쇠파이프를 바닥에 쓸며 설아를 향해 다가왔다. 쇠파이프가 대리석 바닥을 긁는 쇳소리가 기분 나쁜 전율을 일으켰다. 설아는 숨을 들이쉬며 용제 병을 높이 들었지만, 배창두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거구의 사내가 설아의 손목을 낚아채며 힘을 주자,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용제 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허무하게 깨져버렸다.
“아악!”
설아의 비명이 지하실을 울렸다. 배창두는 자비 없이 설아의 목덜미와 멱살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그녀를 바닥으로 내팽개치려 했다. 무방비 상태로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기 직전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갑자기 설아의 왼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발렌시아의 푸른 눈물 반지’가 핏빛처럼 붉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반지의 보석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영적 충격파가 배창두의 거구에 직격했다.
“어, 어억?!”
배창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힌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뒤로 서너 걸음 비틀거렸다.
동시에 아틀리에 내부의 모든 공기가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 순식간에 동결되기 시작했다. 숨을 쉴 때마다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왔고, 바닥에 깨진 용액 잔해 위로 하얀 서리꽃이 무서운 속도로 피어났다.
지하실 중앙, 캔버스 거치대 위에 놓여 있던 아드리안의 초상화가 눈부신 푸른빛의 안개를 뿜어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지옥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듯한, 낮고 웅장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뇌파가 아닌 공기 자체를 진동시키며 울려 퍼졌다.
아틀리에 전체에 휘몰아치는 푸른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복원율 20%에 도달한 아드리안의 얼굴 턱선과 어깨선이 영롱한 푸른빛과 함께 형상화 단계의 힘으로 허공에 반투명한 육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각처럼 날카로운 턱선과 어깨를 감싼 17세기 벨벳 코트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분노로 가득 찬 그의 은빛 눈동자가 마동필 일당을 향해 고정된 것은 바로 그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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