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 뒷장의 음모
지독한 한기와 퀴퀴한 화학 약품 냄새가 뒤섞인 망원동 지하 아틀리에. 깨진 시약병 잔해와 하얗게 얼어붙은 서리의 한가운데, 윤설아는 간이 침대 위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대량의 채혈로 인해 온몸의 혈액이 말라버린 그녀의 얼굴은 캔버스의 백색 프라이머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왼손목에 촘촘하게 누적된 은빛 카테터 흉터 자국만이 그녀가 살아온 처절한 복원의 대가를 대변하고 있었다.
철컥, 콰직!
그때, 아틀리에의 파손된 철문이 거칠게 밀려 열렸다. 얼어붙어 쇼트가 난 도어락의 잔해가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문을 열고 들이닥친 사내는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입에 막대사탕을 문 청년, 설아의 유일한 친구이자 사설 탐정인 최강준이었다. 설아의 연락 두절에 심상치 않은 위험을 감지한 그가 신촌의 탐정 사무소에서 망원동까지 단숨에 달려온 것이었다.
“설아여! 윤설아! 정신 차려봐!”
강준은 아틀리에 내부를 가득 채운 비정상적인 냉기와 바닥의 서리를 보고 경악했다. 침대 위로 달려간 그가 설아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그녀는 미세한 신음만을 흘릴 뿐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강준은 다급하게 자신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단축번호를 눌렀다. 그가 부를 수 있는 현실 세계의 유일한 전문가는 단 한 명뿐이었다.
“야, 강동현! 지금 당장 망원동 지하로 와라. 설아가 쓰러졌어.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빨리!”
한 시간 같은 십 분이 흐른 뒤, 서울대학병원 응급의학과 전문의이자 두 사람의 대학 동창인 강동현이 의학용 왕진 가방을 들고 허겁지겁 아틀리에로 들어섰다. 동현은 아틀리에 내부의 기괴한 광경에 멈칫했으나, 이내 의사로서의 냉철함을 되찾고 설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청진기를 대고 맥박을 짚는 동현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졌다.
“체온이 너무 낮아. 혈압은 80에 50…… 심각한 저혈압 쇼크에 아급성 빈혈이다. 강준아, 얘 최근에 무슨 일 있었어? 온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어.”
동현은 설아의 소매를 걷어올리다 그녀의 왼쪽 손목에 남겨진 은빛 주사 자국과 흉터들을 발견하고 굳어버렸다.
“이 상처들 뭐야? 주사바늘 자국이잖아. 설아 너, 설마 사적으로 약물이라도 손댄 거야?”
“그럴 애가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일단 살리고 봐, 동현아.”
강준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동현의 어깨를 짚었다. 동현은 혀를 차며 가방에서 고농축 철분 주사제와 수혈용 영양 수액을 꺼냈다. 그는 능숙하게 설아의 정맥에 바늘을 꽂고 링거 거치대에 수액 팩을 걸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투명한 수액이 라인을 타고 설아의 혈관으로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 수액 다 맞을 때까지 절대 침대에서 움직이게 하지 마. 그리고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피를 흘리거나 채혈을 감행하면 정말로 심정지가 올 수 있어. 의사로서 하는 엄중한 경고야.”
동현의 단호한 목소리가 아틀리에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수액이 들어가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설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강준과 동현의 얼굴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강…… 준아…….”
“정신이 드냐? 너 진짜 죽을 뻔했어, 이 미련한 인간아.”
강준이 한숨을 내쉬며 설아의 머리맡에 따뜻한 물컵을 대주었다. 설아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서서히 흐려졌던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방 중앙의 거치대에 놓인 아드리안의 초상화로 향했다. 다행히 초상화는 무사했다. 아드리안의 영혼은 힘을 소모하고 캔버스 깊은 곳으로 회귀해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차가운 수호의 잔해가 아틀리에 구석구석에 얇은 성에로 남아 있었다.
동현이 신변 안전을 신신당부하며 수액 치료를 마치고 돌아간 후, 아틀리에에는 설아와 강준 두 사람만이 남았다. 기력을 다소 회복한 설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작업 테이블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강준이 그녀를 만류하려 했으나, 설아의 눈빛에 서린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강준아, 할아버지의 가죽 일지 좀 이쪽으로 가져다줘.”
설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기묘한 확신에 차 있었다. 강준은 투덜거리면서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윤창현의 가죽 일지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평생 동안 아드리안의 초상화를 추적하며 기록한 할아버지의 마지막 유산이었다.
설아는 정밀 광학 현미경의 전원을 켜고, 가죽 일지의 두께를 마이크로미터 단위로 측정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예리한 미세 안료 분석안이 일지의 표지 표면을 샅샅이 훑었다.
“이 일지의 두께가 이상해. 할아버지는 평소 제본 도구와 가죽의 사양을 칼같이 맞추던 분이셨어. 그런데 이 일지의 앞표지 가죽 두께는 3.2밀리미터인데, 뒤표지의 두께는 3.4밀리미터야. 가죽 내벽에 미세한 두께 오차가 존재해.”
“두께 오차? 제본할 때 생긴 단순한 불량 아니야?”
강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설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할아버지는 이런 비합리적인 오차를 허용할 학자가 아니야. 뒤표지의 가죽 내벽 사이에 무언가 숨겨져 있어.”
설아는 주머니에서 할아버지가 남긴 유품인 독일제 빈티지 메스를 꺼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고탄소강의 감각이 그녀의 흐트러진 집중력을 단단하게 붙잡아주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일지 뒤표지의 안쪽 가죽 마감선을 향해 메스 날을 대었다. 0.0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극미세 붓질을 하듯, 그녀의 손끝이 가죽의 결을 따라 정교하게 움직였다.
서걱, 서걱.
얇은 가죽 내벽이 메스의 날카로운 칼날에 의해 부드럽게 갈라졌다. 가죽 틈새를 벌리자, 그 안에서 누렇게 바랜 얇은 양장 종이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30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비밀의 조각이었다.
바로 그 순간, 가죽 틈새로 공기가 유입되자 양장 종이 표면에 새겨진 검은색 글씨들이 마치 불타오르듯 붉게 변하며 흐려지기 시작했다.
“어? 글씨가 사라지는데?!”
강준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최종 흑막인 서지훈이 일지의 비밀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걸어둔 미세한 마멸 주술이었다. 시간이 지나거나 외부 공기에 노출되면 글씨의 안료 성분을 강제로 탄화시켜 날려버리는 사악한 오컬트적 덫이었다.
“가만히 있어, 강준아!”
설아는 당황하지 않고 아틀리에의 자외선 미세 형광 램프(UV-365)를 켜고 365나노미터 파장의 특수 광선을 종이 표면에 조사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축적된 고대 텍스트 해독 지식이 번뜩였다. 자외선 광선이 닿는 순간, 공기 중으로 기화하려던 탄화된 안료의 미세한 궤적들이 형광 푸른빛을 발하며 스펙트럼 형태로 고정되었다. 설아는 메스로 가죽 틈새를 고정하며, 빛바래 가는 글씨의 흔적을 역추적해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복구해 나갔다.
마침내 완전히 해독된 종이의 정체는 30년 전 메디치 미술 재단의 이사장 서지훈이 윤창현 교수에게 보낸 잔혹한 협박 편지 실물이었다.
[윤창현 교수. 당신이 소장한 아드리안의 초상화 연구 일지와 고대 연금술 안료 배합 공식을 재단으로 넘기시오. 만약 이를 거부하고 학계에 공표하려 한다면, 당신의 하나뿐인 어린 손녀 윤설아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을 것이오. 명망 높은 학자의 단순한 추락사는 현대 사회에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편지 하단에는 붉은색 밀랍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강준이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 인장의 문양을 대조했다.
“이 문양…… 까마귀와 방패 문양이야. 메디치 미술 재단의 공식 로고와 완벽하게 일치해. 그리고 편지에 쓰인 독특한 보랏빛이 도는 검은색 잉크…….”
강준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설아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3년 전, 평창동 절벽 아래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할아버지의 죽음. 경찰은 단순 실족사로 결론짓고 사건을 종결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고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서지훈의 탐욕스러운 위협으로부터 설아의 목숨과 아드리안의 초상화 비밀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결국 그들에 의해 절벽 아래로 떠밀려 살해당한 것이었다.
“할아버지…… 나 때문에…….”
설아의 눈에서 참았던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할아버지의 단순 사고사로만 믿었던 가문의 비극이, 사실은 자신을 인질로 삼은 서지훈의 추악한 기획 살인이었다는 참혹한 진실이 그녀의 영혼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오열하는 설아의 눈물이 가죽 일지 위로 뚝뚝 떨어져 번졌다.
스으으으-
그 순간, 아틀리에 내부의 공기가 다시 한번 급격히 차가워졌다. 거치대 위의 초상화 표면에서 푸른빛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아드리안의 반투명한 영체가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설아의 찢어지는 듯한 슬픔과 분노가 피의 계약을 통해 아드리안의 영혼에 고스란히 전이된 것이었다.
아드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격렬한 분노로 물들며 은빛 광채를 내뿜었다. 아틀리에 유리에 미세한 서리가 내리며 징벌의 냉기가 소용돌이쳤다.
[설아, 울지 마라. 네 가문의 원수이자 나를 가둔 자들의 배후…… 그들의 피로 네 눈물을 닦아주마. 내 영혼의 소멸을 걸고서라도 그들에게 영원한 어둠을 선사하겠다.]
아드리안의 낮고 시린 목소리가 설아의 뇌파를 흔들며 복수를 약속했다. 설아는 소매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그녀의 슬픔은 이내 서지훈을 향한 차가운 증오와 복수의 결의로 화했다. 복원가로서의 사명감은 이제 가문의 원수를 파멸시키겠다는 사적 복수라는 강력한 엔진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설아는 다시 한번 현미경 접안렌즈에 눈을 대고 협박 편지에 쓰인 잉크의 미세 단면을 분석했다. 그녀의 형형한 눈빛이 번뜩였다.
“이 잉크 성분…… 단순한 탄소 먹이 아니야. 극소량 정제된 ‘라피스 퍼플’ 성분이 섞여 있어. 이건 메디치 재단의 전속 복원사들만이 기밀 문서 서명용으로 사용하는 독독특한 만년필 안료야. 현재 이 안료를 다루는 자는 한국에 입국한 서지훈의 심복, 루카스 벨뿐이야.”
설아의 목소리에 서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할아버지를 죽인 살인마의 펜 끝과 현대의 적들이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메스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어둠 속의 흑막 서지훈을 향한 잔혹한 전쟁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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