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선의 대가
얼음장 같던 그의 손끝에서, 처음으로 미세하게 맥치는 미온(微溫)의 따스함이 설아의 살결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유령에게 체온이 존재할 수 없다는 상식은, 그들의 손끝이 맞닿는 순간 고요히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 미세한 온기가 선사한 경외감은 이내 해일처럼 밀려오는 극심한 고통에 잠식당했다.
“아……!”
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을 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 빙글빙글 돌았다. 시야가 사정없이 흔들리며 아틀리에의 어두운 천장이 왜곡되어 보였다. 뺨에 난 열상의 통증은 이미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전신에서 핏기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빠져나가는 듯한 탈진감이 그녀의 사지를 무겁게 짓눌렀다.
[설아……!]
머릿속을 직접 울리는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맴돌았다. 평소의 차갑고 오만한 음색은 간데없고, 날카로운 균열이 간 듯한 절박함과 죄책감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가 이토록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복원율 15%에 도달하며 맺어진 ‘피의 계약 결속’. 그로 인해 각성한 ‘영적 오감 동화’ 능력이 두 사람의 신경망을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옭아맨 것이었다. 설아는 아드리안이 느끼는 300년의 시린 고독과 가슴을 찌르는 듯한 한기를 느꼈고, 아드리안은 설아의 몸을 갉아먹는 처절한 빈혈의 고통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었다.
설아의 왼쪽 손목에는 방금 전 은제 미세 카테터 주사기로 피를 뽑아낸 자리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주변으로 자잘하게 새겨진 은빛 카테터 흉터들이 푸르스름한 촛불빛 아래에서 시리게 빛났다.
“괜찮…… 아요. 복원은 성공했으니까.”
설아는 이를 악물고 말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손끝이 제멋대로 부르르 떨렸다. 수호자의 피 한계 규칙은 냉혹했다. 하루 채혈 한계인 10ml를 아슬아슬하게 초과한 대가는 즉각적인 신체적 붕괴로 다가왔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쿵쾅거리며 부정맥 증상이 가슴을 압박했다. 손가락 끝마디부터 감각이 마비되듯 싸늘하게 식어갔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 마치 부서지기 쉬운 유리공예를 보듯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반투명한 은빛 실루엣이 흔들릴 때마다 아틀리에 바닥에 고인 빗물 잔해 위로 푸른 잔상이 어른거렸다.
“그만해라. 네 생명을 깎아 나를 붙잡아두는 짓은…… 이제 원치 않는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시린 온기가 설아의 귓가를 스쳤다. 하지만 설아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 초상화의 뒷면 지지층을 보강하기 위해 박물관 수장고에서 목숨을 걸고 빼돌린 ‘300년 된 고대 마 섬유’가 아직 작업대 위에 남아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육체의 한계는 정신의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아는 급격히 밀려오는 암전 속에서 비틀거리다 결국 아틀리에 구석에 놓인 작은 간이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무거운 눈꺼풀이 서서히 감기며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하 아틀리에의 두꺼운 철문 밖, 어둡고 습한 복도에서 기분 나쁜 구두 굽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터벅. 터벅. 터벅.
쇠가 콘크리트를 긁는 듯한 규칙적이고 묵직한 발소리였다. 침대 위에 쓰러진 설아는 눈을 뜰 수 없었지만, 아드리안과 동화된 오감을 통해 그 불길한 진동을 온몸으로 감지했다.
‘누구지……?’
의식이 흐릿한 설아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이 야심한 새벽, 망원동 한적한 골목길 지하의 사적 공간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최강준이라면 미리 연락을 했을 터였고, 위층 카페 사장 고아라는 이미 퇴근한 지 오래였다.
발소리는 아틀리에 철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스윽, 서걱.
철제 문 표면을 거칠게 훑는 금속성 마찰음이 들려왔다. 미행의 사냥개, 박물관 보안팀장 오동식이었다. 그는 김성태 과장의 사주를 받아 설아가 박물관 수장고에서 무단 반출한 ‘300년 된 고대 마 섬유’의 행방을 쫓아 이곳까지 들이닥친 것이었다. 합법적인 수색 영장도 없이, 오직 설아를 유물 절도범으로 몰아세워 초상화를 강탈하겠다는 탐욕스러운 야심을 품은 채.
“이 안이 확실하군. 퀴퀴한 화학 약품 냄새가 진동을 해.”
문밖에서 오동식의 차갑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에 든 무선 휴대용 디지털 도어락 해킹 장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군 특수부대 출신인 그에게 민간용 도어락을 무력화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삐빅. 삐비비빅.
도어락의 키패드가 강제로 활성화되며 기계음이 고요한 지하 복도에 날카롭게 울렸다. 해킹 장비가 도어락의 암호 프로토콜을 강제로 해체해 들어가는 소리였다. 이대로 문이 열린다면, 빈혈로 쓰러진 설아와 거치대 위의 아드리안 초상화는 무방비하게 노출될 판이었다.
설아는 침대 위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전신이 마비된 듯 무거웠고, 입술을 열어 비명을 지르려 해도 바람 빠지는 소리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극도의 공포와 절박함이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설아,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혀라. 내게 맡겨라.]
머릿속에서 아드리안의 차분하고 위엄 서린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은빛 영체가 거치대 앞을 떠나 철문 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비록 실체가 없는 유령이었으나, 복원율 15%의 생명선 결속은 그에게 미세한 물리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아드리안의 시선이 아틀리에 구석에 엎드려 있던 검은색 도베르만, 탄이에게 향했다. 최강준이 방범을 위해 데려다 놓은 군견 출신의 맹수였다. 평소 영적인 존재를 극도로 경계하며 으르렁대던 탄이였지만, 지금 이 순간 아드리안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영적 위엄과 가문의 가주로서의 권위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아드리안이 푸른 눈물 반지의 광채를 번뜩이며 탄이에게 영적인 명령을 내렸다.
[가라. 침입자를 찢어발겨라.]
“크르르르…….”
탄이의 붉은 눈동자가 허공의 아드리안을 향했다가, 이내 철문 쪽으로 고정되었다. 도베르만의 굵은 목덜미의 털이 곤두섰고,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침이 뚝뚝 떨어졌다.
왈! 왈! 으르르릉- 쾅!
탄이가 철문을 향해 온몸을 던지며 광포하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맹수의 거친 발톱이 철문을 긁는 쇳소리와 지하 공간을 뒤흔드는 우렁찬 포효가 복도 밖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끄악! 안에서 개 짖는 소리가……!”
문밖에서 오동식의 부하가 당황해 비명을 질렀다.
“조용히 해! 겁먹지 말고 장비 연결이나 확실히 해!”
오동식이 사납게 꾸짖으며 해킹 장비의 출력을 높였다. 도어락의 액정 화면이 미친 듯이 명멸하며 마지막 잠금 고리를 풀기 직전의 단계로 진입했다.
철컥, 철컥.
내부의 금속 걸쇠가 풀리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탄이가 문고리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거칠게 날뛰었지만, 물리적인 문이 열리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침대 위의 설아는 차오르는 눈물을 머금은 채 감기는 의식을 붙잡으려 애썼다.
‘안 돼…… 아드리안을 빼앗길 수는…….’
그 순간, 아드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가슴속에 잠재되어 있던 300년 전의 분노와 수호의 의지가 아틀리에 내부의 수분과 공명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발을 들이려 하느냐.]
아드리안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아틀리에 내부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설아의 날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흩어졌고, 바닥에 고인 빗물 잔해가 지직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얼어붙어 하얀 성에를 피워 올렸다.
‘서리 내림(Spiritual Frost).’
아드리안의 강력한 영적 냉기가 철문의 미세한 틈새를 타고 복도 밖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갔다.
“어, 어? 갑자기 왜 이렇게 추워……?”
오동식이 당황해 중얼거리는 순간, 그가 잡고 있던 철제 문고리가 순식간에 새하얀 서리로 뒤덮였다. 극도로 차가운 한기가 도어락 내부의 미세 금속 기어와 전자 기판으로 침투했다. 기계 내부의 수분이 얼어붙으며 찌르르하는 불길한 스파크 소리가 일어났다.
파지직! 퍽!
작은 불꽃과 함께 도어락 내부의 회로가 완전히 쇼트되어 타버렸다. 해킹 장비의 액정 화면 역시 과전류로 인해 검게 죽어버렸다.
“아악! 뜨거…… 아니, 차가워!”
도어락을 만지고 있던 오동식의 부하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뗐다. 그의 손가락 끝은 이미 가벼운 동상에 걸린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문고리 전체가 두꺼운 얼음 장막에 갇혀 완전히 고정되어 버렸다. 쇠지게나 물리적인 도구를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열 수 없는 철벽의 상태였다.
“치료 장비가 쇼트됐습니다! 문고리 자체가 완전히 얼어붙어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귀신 곡할 노릇이군.”
오동식이 신음하듯 내뱉었다. 문 안쪽에서는 여전히 탄이의 광포한 짖음과 문을 부술 듯한 타격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야심한 밤에 더 이상 소란을 피웠다간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칠 터였다. 김성태 과장 역시 비공식적인 조사를 원했기에, 여기서 일을 크게 키울 수는 없었다.
“쯧, 일단 철수한다. 장비를 새로 챙겨서 내일 정식으로 영장이나 법적 대집행 인력을 동원해 덮친다. 윤설아, 네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오동식의 차가운 발소리가 계단 위로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복도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아틀리에 내부의 하얀 서리가 서서히 녹아내리며 물방울로 변해 뚝뚝 떨어졌다. 영력을 한계 이상으로 소모한 아드리안의 영체 역시 급격히 흐려지며 캔버스 쪽으로 끌려가듯 회귀하기 시작했다.
그는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도 침대 위의 설아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설아는 얼어붙어 부서진 도어락 틈새로 스며드는 새벽녘의 시린 바람을 느끼며, 마침내 무거운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내일 아침 들이닥칠 공권력의 위협과 자신의 무너진 육체라는 잔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드리안의 차가운 수호 아래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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