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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속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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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개방 의식으로 아드리안의 반투명한 실루엣을 목격한 그 경이로운 밤이 지나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설아는 낮 동안 박물관에서 김성태 과장의 따가운 눈총을 견뎌내야 했다. 수장고 화재 이후, 김성태는 대놓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사물함은 물론이고 퇴근길 가방 속까지 뒤지려는 음험한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설아는 주머니 속 할아버지의 메스를 꾹 쥐며 이성을 유지했다. 수장고에서 구출해낸 아드리안의 초상화는 이미 망원동 지하 아틀리에 거치대 위에 안전하게 안치되어 있었기에, 그녀는 철저히 평범한 일상을 연기해야만 했다.


밤이 깊어 서둘러 아틀리에로 돌아온 설아는 밤샘 작업을 시작했다. 돋보기안경 너머로 비치는 초상화의 배경 부위는 300년 묵은 흙먼지와 타르로 가득 차 있었다. 설아는 정제 아교와 특수 용제를 미세 분무하며, 메스 끝으로 어두운 배경의 오염물질을 한 올 한 올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숨 막히는 집중 끝에, 마침내 배경 구석에 묻혀 있던 고풍스러운 대리석 기둥의 윤곽이 드러났다.


[복원율 10% 도달 - 실루엣의 출현]


그 순간, 캔버스 표면에서 푸르스름한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아드리안의 형상이 이전보다 한층 더 뚜렷하게 허공에 맺혔다. 이목구비는 여전히 안개에 가려져 있었지만, 은발의 실루엣과 슬픔이 서린 푸른 눈동자의 흔적은 이제 인간의 형태에 가까워져 있었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업을 마친 설아는 깨질 듯한 편두통과 오른손 검지의 시린 통증을 느꼈다. 지난밤 아드리안이 깨어날 때 방출한 영적 냉기 때문에 손가락 끝에 경미한 동상이 걸린 탓이었다. 설아는 약을 사기 위해 아틀리에의 철문을 걸어 잠그고 망원동의 쓸쓸한 밤 골목길로 나섰다.


새벽 2시의 망원동 골목은 짙은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희미한 주황빛 가로등만이 젖은 아스팔트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 음료와 소독약을 사 들고 돌아오는 길, 설아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이질감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스윽, 사각.


안개 너머에서 나직하고 일정한 간격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행인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군인처럼 단단하고 무게감 있는, 그리고 의도적으로 소리를 죽인 묵직한 구두 굽 소리였다. 설아는 젖은 길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통해 슬쩍 뒤를 살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검은 코트 깃을 세운 채 그녀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무표정한 얼굴. 국립중앙박물관의 보안팀장 오동식이었다.


‘김성태 과장이 보낸 사냥개야.’


설아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동식은 단순한 경비원이 아니었다. 군 특수부대 출신으로, 김성태의 지시라면 불법적인 감시나 미행도 서슴지 않는 냉혈한이었다. 그가 이 늦은 밤에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것은, 아드리안의 초상화가 숨겨진 지하 아틀리에의 위치를 알아내려 한다는 뜻이었다.


설아는 태연한 척 걸음걸이를 유지하며 망원동의 복잡한 주택가 미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오동식의 발소리 역시 그녀의 속도에 맞춰 빨라졌다. 설아는 골목 모퉁이를 돌자마자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담벼락 사이의 좁은 틈새와 가파른 계단 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지만, 오동식의 추격은 집요했다. 뒤를 돌아볼 때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오동식의 차가운 눈빛과 그가 쥔 고성능 랜턴의 날카로운 불빛이 좁혀오는 것이 보였다.


설아는 막다른 골목 끝, 한강 빌라 지하 아틀리에 입구 계단 밑 어둠 속에 도달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철문의 디지털 도어락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다면, 바로 뒤쫓아온 오동식에게 아틀리에의 존재를 완전히 들키게 될 터였다. 숨을 죽인 채 낡은 보일러실 환기구 사각지대에 몸을 밀착한 설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오동식의 무거운 발소리가 계단 위쪽에서 멈추었다.


“윤설아 씨. 거기 있는 거 다 압니다. 가방 속에 든 유물, 순순히 반납하시지 않겠습니까.”


오동식의 차갑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울렸다. 그의 구두 굽이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설아는 절망감에 휩싸여 스마트폰을 꺼내려 했지만, 오동식이 주머니에서 가동한 휴대용 전파 방해기 때문에 화면에는 ‘서비스 없음’이라는 붉은 경고등만 깜빡일 뿐이었다. 최강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포위망이 완전히 좁혀진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 ……나의 복원가여.


설아의 머릿속에서 낮고 우아한, 서늘한 바람 같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귓가를 스치는 미세한 주파수 노이즈와 함께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뇌파로 직접 전송된 것이다. ‘무음의 대화(Mind Link)’였다. 물리적 실체가 없는 아드리안이 복원율 10%의 영력을 발동해 그녀에게 직접 텔레파시를 보낸 것이었다.


- 두려워하지 마라.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추어 있어라.


머릿속을 울리는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우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설아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설아는 그의 지시에 따라 벽면에 몸을 단단히 밀착한 채 숨을 참았다.


계단 끝까지 내려온 오동식이 손전등을 켜고 어두운 복도 구석구석을 비추기 시작했다. 강력한 랜턴 불빛이 설아가 숨은 보일러실 문 앞을 향해 서서히 회전했다. 불빛이 그녀의 코트 자락을 비추기 직전, 아틀리에 내부에서 무서운 영적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콰르르릉!


갑자기 지하 복도의 공기가 영하 15도 이하로 급격히 강하하기 시작했다. 벽면에 설치된 낡은 파이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얼어붙었고, 복도 유리에 정교하고 날카로운 눈꽃 모양의 성에가 순식간에 피어올랐다. 극심한 ‘서리 내림(Spiritual Frost)’ 현상이었다.


“윽……! 이, 이게 무슨……!”


오동식이 갑작스러운 극저온의 한기에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들고 있던 고성능 랜턴의 렌즈 표면에 순식간에 두꺼운 성에가 끼더니,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가 갈라지며 불빛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암흑 속에서 오동식은 당황하여 이리저리 랜턴을 흔들었지만, 사방을 가득 채운 차가운 영적 안개 때문에 시야를 완전히 상실했다.


그럼에도 오동식은 집요하게 손을 뻗어 설아의 아틀리에 철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주머니에서 마스터 키를 꺼내 얼어붙은 디지털 도어락의 키패드를 누르려 손가락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치이이익!


아드리안의 영적 분노가 서린 냉기가 도어락 내부의 미세 금속 기어와 전자 기판을 강타했다. 키패드 표면이 새하얀 얼음 장막으로 덮이며 쇼트가 일어났고, 경보 장치가 삐익 하는 단말마의 소리를 내며 완전히 먹통이 되어 굳어버렸다.


오동식은 강철처럼 얼어붙은 문고리에서 손을 때며 공포에 질린 숨을 몰아쉬었다. 귀신에 홀린 듯한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는 특수부대 출신의 그 역시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제발…… 돌아가라.”


설아의 머릿속에서 아드리안의 낮고 경고조 짙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복도 전체를 뒤덮은 서리 안개 속에서 오동식은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어둠 속으로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오동식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 설아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어붙은 도어락 너머, 철문 틈새로 아드리안의 시린 푸른빛 연기가 은은하게 새어 나와 그녀의 주위를 감싸 안았다. 비록 보이지 않는 그림자 속의 경고였지만, 두 사람의 운명이 이제 돌이킬 수 없이 하나로 묶였음을 보여주는 시린 인연의 증표였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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