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흐느낌
시큼한 아교 냄새와 화학 용제의 자극적인 향이 망원동 한강 빌라 지하 아틀리에의 밀폐된 공기 속에 뒤섞여 있었다.
지하로 이어진 가파른 계단 끝, 무거운 철문 뒤에 숨겨진 이 공간은 설아에게 오직 자신만을 위한 유일한 안식처이자 요새였다. 천창을 통해 흘러드는 창백한 보름달 빛이 아틀리에 중앙에 놓인 거치대와 그 위의 초상화를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설아는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가다듬으며 외투를 벗어 던졌다. 박물관 수장고 화재 현장에서 탈출할 때 선반 모서리에 긁힌 왼쪽 손가락 끝의 열상이 아릿하게 쑤셔왔다. 가방 표면에 묻었던 그녀의 붉은 피는 이미 가죽 틈새로 스며들어 흔적만 남은 상태였다. 설아는 지혈용 붕대를 손가락에 대충 감아쥐고는, 책상 위에 놓인 현미경의 전원을 켰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설아는 주머니에서 평생을 고미술 복원에 바쳤던 할아버지가 남긴 독일제 빈티지 메스를 꺼내 들었다. 1970년대 솔링겐사에서 고탄소강으로 특별 제작한 이 정밀 수술용 메스는 설아의 손끝 감각을 극대화하는 분신과 같은 도구였다. 메스의 차가운 금속 자루를 쥐자, 신기하게도 요동치던 심장 박동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녀는 초상화를 현미경 안착대 위에 조심스럽게 올리고 접안렌즈에 눈을 대었다.
설아의 눈동자가 일시적으로 깊게 침잠하며 각성했다. 현미경의 배율을 넘어서 안료의 미세한 입자 크기와 덧칠된 먼지의 층위를 투시하는 그녀만의 천재적 재능, '미세 안료 분석안(Micro-Eye)'이 발동한 것이다.
렌즈 너머로 비친 초상화의 상태는 처참했다. 300년의 세월 동안 엉겨 붙은 타르 질감의 먼지와 그을음이 그림 표면을 두껍게 뒤덮고 있었다. 물감층은 곳곳이 박리되어 미세한 균열이 가 있었고, 캔버스 마 직물은 습기를 먹어 울퉁불퉁하게 뒤틀려 있었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그을음의 성질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그을음이 아니었다. 그림 속 영혼을 옭아매고 있는 끈적이고 사악한 오컬트적 저주의 타르였다.
설아는 우선 표준 보존처리 방식대로 정제수와 에탄올을 미세 면봉에 묻혀 그림 우측 하단의 그을음층에 살며시 가져다 대었다. 치익, 가벼운 마찰음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캔버스 표면에서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 ……아…… 으윽…….
동시에 적막한 지하 아틀리에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 서린 신음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설아가 면봉을 떼어내고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에탄올이 닿은 부위의 미세한 물감층이 하얗게 일어나며 박리되려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용제는 이 저주의 타르를 녹이기는커녕, 오리지널 안료층까지 함께 찢어발기며 영혼에게 극심한 상처를 남길 뿐이었다.
"안 돼. 일반 용제로는 닦아낼 수 없어. 이 그을음은 그림과 영혼을 통째로 묶어 누르고 있어."
설아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일지 속에 적혀 있던 고대 연금술 배합 공식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떠올렸다. 천연 테레빈유와 정제된 라벤더 에센셜 오일, 그리고 순도 높은 식물성 에탄올을 정밀한 비율로 혼합해야 했다.
그녀는 은제 비커를 꺼내 용액들을 소수점 단위까지 정밀하게 계량하여 섞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남긴 특별한 연금술 용제, '솔벤트 오리진(Solvent Origin)'의 완벽한 조제였다. 은 막대로 용액을 젓자, 비커 내부에서 은은한 보랏빛 광채가 돌며 독특한 라벤더 향과 찌르는 듯한 화학적 향취가 피어올랐다.
설아는 완성된 솔벤트 오리진을 초미세 분무기에 담았다. 그리고 초상화 표면의 그을음층을 향해 아주 얇은 안개처럼 용액을 분사하는 '솔벤트 미세 분무 클리닝'을 시작했다.
쉬이익-
분무된 미세 입자들이 300년 묵은 검은 타르 층에 닿자, 단단하게 굳어 있던 저주의 장막이 부드럽게 연화되며 본래의 물감층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다. 주술적 타르가 화학적으로 분해되며 보랏빛 이슬로 변해 흘러내렸다.
설아는 할아버지의 빈티지 메스를 다시 고쳐 잡았다. 오직 그을음층과 원작 안료층 사이의 0.01mm도 되지 않는 미세한 틈새만을 공략해야 하는 극정밀 작업이었다. 조금만 붓끝이나 칼끝이 흔들려도 300년 전의 채색이 영구히 훼손될 수 있었다.
서늘한 긴장감 속에서 메스 끝을 검은 타르 경계면에 대고 조심스럽게 긁어내기 시작한 순간, 갑자기 설아의 머릿속이 핑 돌았다.
"아윽……!"
메스를 매개로 하여, 초상화 깊은 곳에 가두어진 존재의 감정이 설아의 뇌파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끔찍한 배신의 고통, 춥고 어두운 액자 속에 홀로 300년을 갇혀 지내야 했던 절망, 그리고 살을 에는 듯한 지독한 분노였다.
감정의 파도가 뇌신경을 사정없이 흔들자 설아의 오른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메스의 날카로운 끝이 오리지널 안료층을 찢기 일보 직전이었다. 설아는 입술을 깨물며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강하게 붙잡았다.
"흔들리지 마, 윤설아. 나는 복원가야. 이 슬픔에 삼켜지면 그림을 영영 살릴 수 없어."
그녀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감정의 동조를 차단하며 이성적인 벽을 세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게 정돈되어 있었다. 설아는 떨림을 멈춘 손끝으로 메스를 움직여, 연화된 검은 타르를 정교하게 긁어내기 시작했다. 메스가 지나간 자리마다 300년 동안 감춰져 있던 영롱하고 깊은 청색 안료, 즉 천연 라피스 라줄리의 푸른빛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며 노출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틀리에 내부의 공기가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스으으으…….
벽면에 걸린 아날로그 온도계의 바늘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영상 18도를 가리키던 바늘은 순식간에 영하로 내려앉았다. 천창 유리창 표면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눈꽃 모양의 서리가 하얗게 피어오르며 서리 내림 현상이 발생했다. 설아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고, 메스를 쥔 손가락 끝이 냉기에 노출되어 감각을 잃어가며 새하얗게 질려갔다. 가벼운 동상 증상이었다.
하지만 설아는 메스를 놓지 않았다. 그림의 우측 하단, 아드리안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모서리 부위의 그을음이 완벽히 제거되는 순간이었다.
[복원율 5% 도달 - 자각 단계 진입]
그 순간, 아틀리에 구석에 설치된 영적 파동 주파수 기록기의 스피커에서 지지직거리는 날카로운 전파 노이즈와 함께, 애절하고 시린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누구……냐…….
그것은 300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영혼의 흐느낌이자, 현세에 던지는 첫 번째 자각의 목소리였다.
설아는 소름이 돋는 팔을 문지르며 시계를 보았다. 밤 11시 59분. 자정이 오고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아틀리에의 모든 형광등과 LED 전원을 껐다. 오직 천창을 통해 수직으로 쏟아지는 푸르스름한 보름달 빛만이 아틀리에를 차갑게 채웠다. 설아는 초상화 주변에 미리 준비해 둔 세 개의 천연 소이 캔들에 성냥불을 당겼다. '자정의 개방 의식(Midnight Rule)'을 위한 준비였다.
째깍.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망원동 주택가 너머로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
화르륵!
세 개의 촛불 불꽃이 동시에 흔들리더니, 이내 기이하고 영롱한 사파이어 푸른빛으로 물들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거치대 위의 초상화 표면에서 피어오르던 푸른빛 연기가 한곳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천창의 달빛과 푸른 촛불의 일렁임 속에서, 캔버스 너머의 어둠이 허공으로 흘러나와 하나의 형상을 갖추어 나갔다.
설아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흐릿하지만 감출 수 없이 우아하고 고고한 풍채를 지닌, 17세기 유럽 귀족의 반투명한 실루엣이었다. 은발의 머리칼과 슬픔이 가득 서린 푸른 눈동자의 흔적이 안개 속에서 깜빡이며 설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300년의 저주를 깨고, 초상화 속 귀족 아드리안의 영혼이 마침내 설아의 눈앞에 그 차가운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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