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동의 비밀 아틀리에
지하 2층 보존과학실의 공기는 수장고 화재의 여파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매캐한 탄내와, 환풍기 너머로 역류한 유기 용제 냄새로 지독하게 뒤틀려 있었다. 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검은색 특수 방수 가방의 지퍼를 굳게 채웠다. 가방을 쥔 손가락 끝의 상처가 아릿하게 쑤셔왔다. 화재 현장에서 탈출할 때 달아오른 철제 선반 모서리에 긁힌 열상이었다. 붉은 피가 배어 나와 가방 표면에 작고 선명한 얼룩을 남겼지만, 설아는 제 몸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품에는 가방에 싸인 아드리안의 초상화가 들어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방수 천의 두꺼운 질감 너머로 미세한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고 있었다.
쿵. 쿵.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규칙적이고 서늘한 박동이었다.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이었지만, 설아는 직관적으로 알았다. 이 초상화를 김성태 과장에게 빼앗기는 순간,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비밀도, 이 액자 속에 갇힌 기이한 생명력도 영원히 지옥 같은 수장고 속으로 묻혀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윤설아 선생!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문 열어! 당장!”
문밖에서 들려오는 보존과장 김성태의 고함 소리에 설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거운 구두 발소리와 함께 보안요원들의 거친 숨소리가 보존처리실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화재 수습 대장이 작성되기도 전에 김성태는 사물함과 연구실을 뒤지며 사라진 초상화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설아는 급히 벽면에 설치된 카드리더기에 사원증을 태그했다. 문을 잠그고 반대편 비상구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삐익-! [권한이 없는 사용자입니다.]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리더기에 적색등이 들어왔다. 설아의 입술이 새하얗게 질렸다. 김성태가 이미 그녀의 박물관 출입 및 잠금 권한을 일시 정지시켜 놓은 것이 분명했다. 앞문은 김성태와 요원들이 가로막고 있었고, 뒷문은 차단되었다. 꼼짝없이 막다른 골목에 갇힌 꼴이었다. 복도에서는 철제 사물함이 거칠게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이 이 방으로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때, 설아의 코트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박은지: 언니, 김 과장이 보안팀 대동해서 제3실로 가고 있어요! 소지품 검사 강제로 하겠대요. 제 마스터 키로 지하 2층 비상 로그 우회 경로 열어둘 테니까, 문자 확인하는 즉시 반대편 폐기물 수송로로 뛰세요!]
보존과학실 행정원 박은지였다. 평소 설아의 묵묵한 성품과 복원 실력을 존경하던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내부 시스템을 조작해 준 것이었다.
동시에 보존과학실 전체에 요란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비상 상황 발생. 지하 2층 화재 잔여 가스 누출 및 소방 시설 오작동 경보. 모든 직원은 가스 마스크를 착용하고 즉시 대피하십시오.]
“뭐야? 또 불이 난 거야? 아니, 잔여 가스라고?”
복도에서 김성태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보 소리와 함께 스프링클러 배관이 요란하게 덜컹거렸고, 복도를 지키던 보안요원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분산되었다.
설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은지가 원격으로 잠금을 해제해 준 폐기물 수송용 철문을 밀치고 어두운 통로로 몸을 던졌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품에 안은 가방만큼은 품에서 절대 놓지 않았다. 차가운 한기가 가방을 뚫고 나와 그녀의 가슴뼈를 시리게 만들었지만, 그 서늘함이 오히려 설아의 정신을 맑게 깨웠다.
어둡고 비좁은 폐기물 수송로를 지나 마침내 박물관 지하 출구 게이트에 도달했다. 이곳만 통과하면 야외 광장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게이트 중앙에 설치된 고감도 유물 및 금속 탐지기 센서였다. 만약 초상화의 오래된 마 직물이나 액자 틀의 미세한 금속 성분, 혹은 그 안에 깃든 주술적 마력이 센서에 감지된다면 경보가 울려 즉시 요원들이 들이닥칠 터였다.
설아가 센서 라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게이트 상단의 경고등이 노랗게 명멸하며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띠리리릭-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설아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바로 그 찰나, 가방 속 초상화가 기이하게 반응했다. 가방 표면에 묻어 있던 설아의 미세한 핏자국과 초상화 내부의 고대 마 직물이 공명하듯, 서늘한 은빛 한기가 가방 주변의 공기를 급격히 얼려버렸다. 그 차가운 기운이 탐지기 센서 내부의 전류 흐름을 미세하게 교란했다. 노랗게 반짝이던 경고등이 순간적으로 깜빡이더니, 이내 정상 상태를 뜻하는 녹색등으로 돌아왔다.
삑. [정상 통과입니다.]
설아는 멈추었던 숨을 몰아쉬며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대기 중이던 택시에 몸을 싣고, 망원동으로 향하라는 말을 간신히 내뱉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거대한 실루엣을 바라보며, 설아는 자신이 방금 직업적 생명을 건 위험한 강을 건넜음을 실감했다. 이제 그녀는 공식적인 무단 반출범이었고, 내일 아침 김성태가 초상화의 부재를 확인하는 순간 추격이 시작될 것이었다.
늦은 밤, 택시가 망원동의 한적한 주택가 골목길에 멈춰 섰다. 설아는 낡은 빌라 건물 지하로 통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철문을 열자, 차갑고 밀폐된 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온습도 조절 장치와 오래된 한지, 시큼한 아교 냄새가 가득한 이곳은 설아의 할아버지 윤창현이 생전에 마련해 둔 사설 복원 연구소이자, 오직 설아만이 아는 안전한 요새인 한강 빌라 지하 아틀리에였다.
설아는 아틀리에 중앙, 달빛이 희미하게 내리쬐는 어두운 천창 아래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지퍼를 열고 조심스럽게 아드리안의 초상화를 꺼내 거치대에 올렸다.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아틀리에 내부의 공기가 기이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창을 통해 들어온 푸르스름한 밤빛이 초상화 표면에 닿는 찰나, 먼지와 그을음으로 뒤덮인 캔버스 표면에서 푸른빛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막한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우며, 캔버스 깊은 곳으로부터 낮고 슬픈 신음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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