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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무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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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의 밤은 축축한 빗물과 함께 깊어 가고 있었다. 낡은 화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 구석,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모퉁이에 한 남녀가 멈춰 섰다.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머금은 검은색 우산 아래로, 은색 가면을 쓴 윤설아의 옆모습이 차갑게 빛났다.


설아는 거칠게 몰아쉬는 숨을 애써 가다듬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피의 복원 작업과 잦은 채혈 탓에 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만성 빈혈로 인해 시야는 가끔씩 흐릿하게 번졌고, 왼손목의 깃털 같은 레이스 장갑 아래 감춰진 은빛 카테터 흉터 자국들은 아드리안과의 정서적 공명이 깊어질 때마다 욱신거리며 시린 통증을 내뿜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아드리안의 소멸을 막기 위한 심장 조각이 바로 이 지하 복마전에 출품되기 때문이었다.


“설아, 괜찮아? 페이스가 너무 창백해.”


옆에 선 최강준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평소의 헐렁한 가죽 재킷 대신 이태리제 최고급 블랙 슈트를 매끄럽게 차려입은 그는, 얼굴을 반쯤 가리는 메탈릭한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의 손끝은 언제든 품 안의 삼단봉을 쥘 수 있도록 예리하게 긴장해 있었지만, 겉으로는 여유로운 자산가 남편의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괜찮아. 조금 어지러울 뿐이야. 가자, 강준아.”


설아는 마광식 옹에게 받았던 묵직한 검은색 메탈 초대장을 손에 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흐르자, 기묘하게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아드리안의 서늘한 기운이 번져와 그녀의 어지럼증을 일시적으로 지탱해 주었다.


두 사람은 낡은 전통 갤러리 ‘고운재’의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동양화 전시장에 불과한 곳이었지만, 안내원이 설아가 내민 검은 메탈 초대장을 확인하자 태도가 돌변했다. 안내원은 묵묵히 전시장 뒤편의 대형 병풍을 밀어 젖혔다. 그 뒤에는 굳건한 강철로 주조된 비밀 엘리베이터 통로가 숨겨져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깊숙이 내려갈수록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미세한 진동음이 느껴졌다. 마침내 문이 열리자, 지상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세계가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졌다.


불법 고미술품 암시장, ‘심연(Abyss)’의 메인 홀이었다.


붉은 벨벳 커튼이 웅장하게 드리워진 거대한 지하 광장은 기괴하면서도 화려한 고딕풍의 비주얼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에는 샹들리에 대신 수백 개의 은색 촛대들이 기이한 보랏빛 불꽃을 내뿜으며 타오르고 있었고, 사방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기이한 마력이 깃든 고대 석상들이 음침하게 늘어서 있었다. 은색, 금색, 혹은 기괴한 동물 모양의 가면을 쓴 부유층 바이어들이 샴페인 잔을 든 채 탐욕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어둠의 사교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공간 전체를 지배하는 비싼 향수 냄새와 오래된 유물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어딘가 오컬트적인 주술의 기운이 섞여 설아의 숨통을 조여 왔다.


“인간들의 탐욕이 모여 만든 지옥이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이겠군.”


강준이 미세하게 혀를 차며 설아의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군중 사이로 녹아들었다. 설아는 가방을 품에 꼭 움켜쥐었다. 그 가방 안에는 백영호가 제공한 한도 없는 블랙카드가 들어 있었다. 서지훈의 자금을 등에 업은 자들과 싸우기 위한 유일한 물리적 무기였다.


바로 그때, 설아의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끼워진 ‘발렌시아의 푸른 눈물 반지’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윽……”


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을 삼키며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반지의 푸른 라피스 라줄리 보석이 붉은빛으로 깜빡이며 그녀의 살결을 태울 듯한 경고의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오작동이 아니었다. 적들의 강력한 오컬트 역추적 마법이나 영혼 탐지 주파수가 이 공간 내에 가동되고 있다는 절대적인 신호였다.


[설아, 움직이지 마라.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서 내 목소리를 들어라.]


머릿속을 서늘하게 파고드는 아드리안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무음의 대화(Mind Link)’가 뇌파를 타고 실시간으로 연결된 것이다.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긴장되어 있었고, 그의 서늘한 영적 기운이 설아의 신경계를 감싸 안으며 반지의 열기를 억제하려 애썼다.


[적들이 영혼의 주파수를 추적하는 탐지기를 가동했다. 네가 쓰고 있는 은색 가면의 주술적 방어막이 내 냉기를 억누르고는 있지만, 탐지 장치가 반경 5미터 이내로 접근하면 내 영체 파동이 노출될 것이다. 절대 당황하지 말고 내 지시를 따라라.]


설아는 은색 가면 너머로 눈동자를 기민하게 굴렸다. 그리고 메인 홀의 가장 어두운 구석, 화려한 사설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서지훈 메디치 재단 이사장의 수석 비서이자, 3년 전 할아버지 윤창현 교수의 실족사를 사고사로 위장해 처리한 실제 집행자, 강태윤이었다.


단정한 안경 너머로 한 치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빛을 지닌 강태윤은, 검은색 슈트 차림으로 부두의 사냥개 같은 경호원들을 거느린 채 홀 중앙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구리선과 흑요석으로 정교하게 조립된 기이한 오컬트 주파수 탐지 장치가 들려 있었다. 장치 중앙의 붉은 바늘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의 나침반처럼 사방으로 미세하게 흔들리며 아드리안의 영혼이 뿜어내는 특유의 서늘한 한기를 추적하고 있었다.


강태윤은 탐지기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짓밟는 묵직한 소리가 설아의 심장 박동과 겹쳐 울렸다.


그가 걸어오는 방향은 정확히 설아와 강준이 서 있는 우측 복도였다. 거리 계산상 10초 뒤면 탐지기의 반경 5미터 이내로 들어와 아드리안의 존재가 발각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강준아, 강태윤이야. 저 자가 탐지기를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어.”


설아가 강준의 옷자락을 잡으며 속삭였다. 강준의 눈빛이 가면 너머로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품 안의 삼단봉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경비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가짜 소란을 피우려는 계산이었다.


[안 된다, 최강준. 저들의 경호원들은 전원 특수 훈련을 받은 무장 상태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물리적 충돌로 이어져 설아의 신변이 먼저 확보당할 것이다. 내 지시를 따라라.]


아드리안의 차가운 음성이 설아의 뇌리를 때렸다. 설아는 급히 강준의 손목을 잡았다.


“안 돼, 강준아. 소란을 피우면 우리가 먼저 고립돼. 아드리안이 길을 안내할 거야.”


[설아, 지금 네 오른쪽 세 걸음 뒤에 서 있는 황금 가면의 사내 뒤로 이동해라. 그자가 마시는 독한 압생트 향취와 그의 체온이 일시적인 차단막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경비원들이 3초 뒤 좌측 기둥으로 시선을 돌리는 교대 타이밍이 온다. 그때 군중 속으로 녹아들어라.]


설아는 망설임 없이 강준의 팔짱을 낀 채,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드리안이 실시간으로 브리핑해 주는 경비원들의 시선 사각지대와 교대 동선은 완벽했다. 설아와 강준은 황금 가면을 쓴 뚱뚱한 자산가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가 마시는 압생트의 독한 알코올 향이 사방으로 퍼지며 공기 중의 영적 주파수를 미세하게 흐트러뜨렸다.


동시에 아드리안이 자신의 영적 에너지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설아는 자신의 손목에 누적된 은빛 카테터 흉터가 아릿하게 타들어 가는 통증을 느꼈다. 아드리안이 은색 가면의 주술적 보호 기능과 공명하여, 설아의 몸 주변에 미세한 영적 차단막을 겹겹이 형성해 탐지기의 추적 주파수를 강제로 다른 방향으로 굴절시키고 있었다.


‘아드리안…… 무리하지 마요. 영력이 소모되면 실체화 시간이 줄어들 텐데…….’


설아는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하지만 아드리안의 대답은 단호하고도 따뜻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마라. 내 영혼이 조금 깎여 나가더라도, 너를 저 자들의 손에 넘겨줄 수는 없다. 지금이다. 왼쪽 무도회 군중 사이로 걸어가라.]


강태윤의 발걸음이 설아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든 탐지기의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더니, 이내 붉은 경보등을 깜빡이며 오작동 신호를 보냈다. 강태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장치의 다이얼을 거칠게 돌렸다. 옆에 서 있던 경호원이 나직하게 물었다.


“실장님, 신호가 잡히지 않습니까?”


“……이상하군. 분명히 이 근처에서 발렌시아 가문 특유의 지독한 영적 한기가 감지되었는데, 순간적으로 신호가 분산되어 사라졌다. 장비의 일시적인 전파 간섭일 수도 있겠군.”


강태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탐지기를 거두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의 복도로 걸어가기 시작하자, 설아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드리안의 헌신적인 방어 덕분에 정체 노출의 위기는 간신히 모면했지만, 그 대가로 아드리안의 영적 고정력이 크게 약화되어 오늘 밤 그가 지상에 실체화해 머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무려 30분이나 단축되고 말았다. 가슴 한구석이 죄책감으로 시려 왔다.


“설아, 지금이야. 적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서 경매장 VIP 예약석으로 가야 해.”


강준이 속삭이며 그녀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붉은 벨벳 커튼이 쳐진 경매장 안쪽의 어두운 VIP 예약석 구역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무사히 자리에 안착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경매장의 거대한 청동 종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댕- 댕- 댕-


종소리와 함께 메인 홀의 불꽃들이 일제히 보랏빛에서 짙은 붉은색으로 변하며 가라앉았다.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무대 중앙의 붉은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고, 가면을 쓴 경매사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설아는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 속에서 주머니 속 블랙카드의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이제 곧 아드리안의 심장 조각이 무대 위에 오를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경매장 구석의 어둠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곳에서 강태윤 비서가 탐지기의 오작동에 의문을 품은 채, 매서운 눈빛으로 경매장에 입장하는 모든 바이어들의 가면을 하나씩 훑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시선이, 마침내 설아가 착용한 은색 가면을 향해 서서히 고정되기 시작했다. 강태윤은 무언가 직감한 듯, 탐지기를 주머니에 넣고 경호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내며 설아가 앉은 VIP 석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은색 가면 너머로, 한때 할아버지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던 그 잔혹한 눈동자가 오직 나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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