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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실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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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의 밤은 깊고도 시렸다. 한강 빌라 지하 아틀리에의 두꺼운 철문 너머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는 아득한 이 세상의 소음 같았다. 밀폐된 공간을 가득 채운 것은 천연 테레빈유와 정제된 라벤더 에센셜 오일이 뒤섞인 ‘솔벤트 오리진’의 알싸한 향, 그리고 소독약의 퀴퀴한 냄새뿐이었다.


윤설아는 작업 테이블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왼쪽 손목을 덮은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리자, 하얀 피부 위로 은빛 주사 자국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은제 미세 카테터 주사기를 정맥에 반복해서 찔러 넣었던 흔적들이었다. 며칠째 계속된 채혈로 인한 만성 빈혈은 그녀의 온몸을 납덩이처럼 무겁게 짓눌렀고, 손가락 끝마디는 아릿한 마비 증상으로 굳어 있었다.


동현이가 그토록 경고했음에도, 설아는 쉴 수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설아의 시선이 아틀리에 중앙 거치대에 놓인 ‘아드리안의 잔혹한 초상화’로 향했다. 복원율 15%의 상태로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17세기의 유화. 하지만 지금, 그 초상화는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초상화의 가슴 부위, 즉 300년 전 아드리안이 칼에 찔려 찢겨 나간 심장 언저리의 구멍에서 검은 안개 같은 영적 기화 물질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오리지널 캔버스의 소실된 파편이 채워지지 않은 탓에, 아드리안의 영혼이 지상에 머물 수 있는 한계가 다다르고 있었다. 캔버스의 마 섬유들이 온습도 조절 장치의 미세한 균열에도 뒤틀리며 아드리안의 영체를 사정없이 찢어발기는 중이었다.


“……아…… 윽…….”


아틀리에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지며 하얀 입김이 설아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거치대 주변의 허공이 반투명한 푸른빛 안개로 일렁이더니, 이목구비가 흐릿한 아드리안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의 영체는 심장 부위에 새겨진 검은 균열을 감싸 쥔 채 고통스럽게 비틀거렸다. 그가 신음할 때마다 아틀리에 벽면에 설치된 유리 시약병들이 파르르 떨리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이대로 두면 경매 당일이 오기도 전에 아드리안의 영혼은 완전히 기화해 소멸할 것이 분명했다. 설아는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거치대 앞으로 걸어갔다.


“아드리안, 내 말 들려요? 정신 차려요.”


[설아…… 멀리…… 떨어져라…….]


설아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아드리안의 무음의 대화 주파수는 노이즈가 잔뜩 낀 라디오처럼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영적 한기가 설아의 전신을 침습하며 그녀의 체온을 영하에 가깝게 끌어내렸다. 손가락 끝의 신경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설아는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아틀리에 중앙 천창 아래로 초상화 거치대를 조심스럽게 밀어 움직였다.


천장의 유리창을 통해 보름달의 차가운 음기 에너지가 수직으로 쏟아져 내렸다. 은은한 달빛이 초상화 표면을 푸르게 물들이는 순간, 설아는 심호흡을 하며 맨손을 뻗었다. 그녀의 하얀 손바닥이 아드리안의 초상화 가슴 부위, 그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는 찢어진 구멍 위를 가볍게 덮었다.


‘심장 박동 동기화 의식.’


설아는 눈을 감고 자신의 호흡을 분당 60회 이하로 서서히 낮추었다.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과 두려움을 완전히 비워내고, 오직 아드리안의 영적 고동에 주파수를 맞추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손바닥 아래에서, 300년의 세월을 거스른 얼음장 같은 맥박이 미세하게 감지되었다. 설아의 심장 박동이 아드리안의 차가운 영적 템포에 완벽하게 일치되는 순간, 두 사람의 가슴에서 동시에 무겁고 둔탁한 고동 소리가 아틀리에 벽면을 타고 공명했다. 설아의 왼손 가운뎃손가락에 끼워진 발렌시아의 푸른 눈물 반지가 스스로 진동하며 붉은빛으로 세차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아윽!”


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아드리안의 영혼에 잠재된 저주의 살기와 한기가 그녀의 정맥을 타고 심장으로 사정없이 역류해 들어왔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극심한 저온 한기가 그녀의 신경계를 난도질했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고통에 불과했다. 진짜 고통은 그 뒤에 찾아왔다.


반지의 붉은 광채가 극에 달하는 순간, 설아의 시야가 핏빛으로 물들며 강렬한 ‘유물 접촉 감응(Psychometry)’이 시작되었다.


눈을 뜬 곳은 망원동의 지하실이 아니었다. 300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의 웅장하고 음산한 발렌시아 고성 내부였다. 화려한 벨벳 커튼이 드리워진 연회장 중앙, 은색 촛대들이 늘어선 테이블 앞에 젊은 날의 아드리안이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검은 망토를 두른 숙부 에드워드가 독배가 담긴 황금 잔을 들고 서 있었다.


‘마시지 마…… 아드리안, 제발 마시지 마요!’


설아는 소리치려 했지만, 환영 속의 그녀는 형체가 없는 관찰자일 뿐이었다.


에드워드가 아드리안에게 황금 잔을 건넸다. 가문의 영광과 번영을 약속하는 감언이설 뒤에 숨겨진 독약의 냄새. 아드리안은 숙부의 배신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채,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그 순간, 아드리안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고,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대리석 바닥으로 쓰러졌다. 에드워드의 비열한 비웃음 소리와 가문 기사들의 차가운 방관 속에서, 아드리안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배신한 가문을 향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고독에 몸부림쳤다.


그 독배의 고통과 심장이 타들어 가는 참혹한 절망감이 설아의 신경망을 타고 고스란히 전이되었다. 설아는 환영 속에서 아드리안의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느끼며, 눈가에서 붉은 피눈물 같은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환상 통증에 그녀의 호흡이 완전히 가빠졌다.


[설아! 당장 손을 떼라! 네 영혼까지 잠식당할 것이다!]


아드리안의 절규가 뇌리를 때렸다. 이성을 잃어가던 아드리안은 설아가 자신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스스로 동기화 의식을 강제로 해제하려 영력을 밀어냈다. 푸른 한기가 설아의 손바닥을 밀어내려 요동쳤다.


하지만 설아는 이를 악물고 초상화의 심장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정제된 수호자의 피 기운이, 아드리안의 영혼 속에 날뛰던 저주의 살기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정화하기 시작했다.


“안 놓아…… 절대로 안 놓을 거야…….”


설아의 눈물이 초상화의 캔버스 표면에 툭, 툭 떨어졌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설아의 정화된 피 기운과 눈물이 천창에서 내려오는 보름달 빛의 정수와 결합하며, 아드리안의 영체에 강력한 영적 고정력이 일시적으로 부여되었다.


반투명했던 아드리안의 은빛 실루엣이 순간적으로 빛바랜 물감 가루처럼 번쩍이더니, 이내 진짜 인간의 피부와 무게감을 지닌 완전한 육신으로 설아의 눈앞에 강림했다.


스윽.


늘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했던 아드리안의 손길이 설아의 뺨에 닿았다. 그 손끝에서 느껴지는 것은 기이하게도,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미온(微溫)의 따스함이었다. 300년 동안 죽어 있던 자의 손가락 끝에, 설아의 생명력이 전해져 일시적인 인간의 체온이 맥치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설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내 주었다. 그의 사파이어 빛 눈동자에는 걷잡을 수 없는 연민과 슬픔, 그리고 애절한 사랑의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설아의 하얀 손목에 가득한 은빛 카테터 흉터들을 아프게 바라보며, 그녀를 자신의 가슴속으로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의 넓은 품 안에서, 설아는 300년 만에 다시 뛰기 시작한 그의 은밀한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귀밑머리를 쓸어내리며,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나직하고 애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이상…… 나 때문에 네 생명을 갉아먹지 마라, 설아.]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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