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의 후원자
손가락 끝에 닿는 초대장의 차가운 금속 감촉은 마치 얼음 조각을 쥐고 있는 것처럼 시렸다. 인사동 골목길 구석, 퀴퀴한 고서 냄새와 먼지 쌓인 나무 안료의 향이 진동하는 ‘고서향’을 빠져나온 윤설아는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심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머릿속에서는 골동품점 주인 마광식 영감의 칼칼한 목소리가 이명처럼 맴돌았다.
‘그곳은 인간의 탐욕이 심연을 이루는 복마전이다. 서지훈의 눈과 사냥개들이 자네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사방의 그림자 속에서 도사리고 있을 게야.’
지하 암시장 ‘심연’의 특별 경매에 출품될 아드리안의 가슴 조각. 그것을 낙찰받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설아의 손에 들린 것이라곤 사채업자 마동필이 들이밀었던 위조 채권 서류와 할아버지가 남긴 산더미 같은 빚 독촉장뿐이었다.
설아는 코트 소매를 슬그머니 당겨 왼쪽 손목을 가렸다. 얇고 하얀 피부 위로, 아드리안의 영체를 붙잡아두기 위해 은제 미세 카테터 주사기를 찔러 넣었던 은빛 주사 자국들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만성 빈혈의 통증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결의를 다졌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단 3일뿐이었다.
“강준아, 성북동으로 가자.”
옆에서 묵묵히 걸음을 맞추던 최강준이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굴리며 설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재킷 안주머니에는 마동필 일당에게서 수거한 위조 연대보증서 서류가 들어있었다.
“백영호 이사장님을 만나러 가겠다고? 그 노인네가 아무리 네 할아버지와 친분이 깊고 박물관의 대부라지만, 수십억 원이 움직이는 불법 경매 자금을 순순히 내줄까?”
“단순히 감정에 호소하려는 게 아니야. 백 이사장님은 철저한 투자자야. 그분이 움직일 만한 확실한 ‘가치’를 보여주면 돼.”
설아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백영호가 메디치 미술 재단의 서지훈 이사장과 정계 및 미술계 카르텔에서 오랜 라이벌 관계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초상화가 지닌 독보적인 오컬트적 가치, 그리고 그것을 노리는 서지훈의 음모를 폭로한다면 백영호 역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 *
다음 날 오후, 서울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위압적인 동네인 성북동 고지대에 위치한 ‘성북동 영빈관’의 거대한 철문 앞에 설아와 강준이 섰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높은 석조 장벽으로 둘러싸인 저택은 흡사 외부의 침입을 절대 불허하는 요새와 같았다.
철문 옆의 인터폰 카메라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그들을 훑었다. 잠시 후, 육중한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단정한 블랙 슈트 차림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백영호 이사장의 수석 비서, 김정훈이었다.
포마드로 완벽하게 넘긴 머리에 차가운 무테안경을 쓴 김정훈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도로 설아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손에는 정밀 전자기파 탐지기와 보안 스캐너가 들려 있었다.
“윤설아 씨, 그리고 최강준 씨 맞으십니까. 이사장님을 뵙기 전에 보안 검색이 있겠습니다. 사적인 녹음 장비나 화학 물질, 오컬트 관련 매개체는 반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김정훈은 예리한 눈빛으로 설아의 가방을 수색하고, 스캐너를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갖다 대었다. 스캐너가 설아의 왼쪽 손목을 지나갈 때, 은빛 카테터 흉터와 반지의 공명 탓인지 기계가 미세한 비프음을 내며 붉은 불빛을 깜빡였다. 김정훈의 무테안경 너머 눈동자가 좁혀졌다.
“손목에 있는 이 상처들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반지는……”
“의학적인 치료 흔적일 뿐입니다. 반지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사적인 장신구고요. 보안에 위해가 되는 물건은 아닙니다.”
설아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김정훈은 설아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스캐너를 끄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영빈관 내부는 동서양의 최고급 고미술품들이 박물관 전시실처럼 완벽한 온습도 조절 장치 아래 진열되어 있었다. 복도를 지나 안내받은 개인 응접실 중앙에는 백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은색 지팡이를 짚은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아시아 미술계의 거두이자 대자산가, 백영호였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천천히 돌리며, 비서 김정훈이 건넨 서류 뭉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 서류는 최강준이 백성 재단 법률팀에 인계했던 사채업자 마동필의 위조 채권 서류였다.
“창현이 손녀딸이 내 집까지 직접 찾아오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백영호가 나직하게 읊조리며 서류를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그의 날카롭고 기품 있는 눈빛이 설아의 창백한 얼굴과 손목을 꿰뚫어 보았다.
“최 군이 보낸 이 위조 채권 서류는 우리 법률팀이 깔끔하게 정리해 주기로 했네. 마동필 그 사기꾼 놈들은 사기 및 불법 추심 혐의로 곧 검찰 조사를 받게 될 게야. 하지만 윤설아 씨, 자네가 내게 요청한 ‘경매 지원 자금’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네.”
백영호는 차갑게 식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은색 지팡이를 짚었다.
“자네는 지금 박물관에서 무단 반출 혐의로 직무 정지 위기에 처해 있고, 수억 원의 사채 빚에 허덕이는 처지네. 그런 신용불량자나 다름없는 복원가에게 수십억 원에 달하는 불법 암시장 경매 자금을 무기한으로 지원해 달라니. 비즈니스 관점에서 이건 아주 비합리적인 투자야. 내가 왜 자네의 무모한 도박에 내 자본을 움직여야 하지?”
대자산가의 압도적인 자본 권력과 카리스마가 응접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최강준조차 침을 삼키며 긴장한 기색을 보였지만, 설아는 오히려 허리를 곧게 폈다.
“이사장님께서 소장하고 계신 저 뒤편의 고서적 때문입니다.”
설아의 뜬금없는 대답에 백영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설아의 시선이 향한 곳은 응접실 유리 장식장 내부에 정중히 안치된 17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미완성 기도서(Book of Hours)였다.
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식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특수 능력인 ‘미세 안료 분석안 (Micro-Eye)’을 발동했다. 자외선 램프나 현미경 같은 정밀 기기 없이도, 설아의 시야 속에서 고서 표면의 안료 입자들이 수천 개의 미세한 격자무늬로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저 기도서의 표지 우측 하단, 사파이어 빛으로 채색된 성모 마리아의 옷자락 부분을 보십시오. 이사장님께서는 저것이 17세기 순수 천연 울트라마린 안료로 복원된 진품이라고 믿고 계시겠지요.”
설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응접실에 울렸다.
“하지만 저 푸른색 안료는 진품이 아닙니다. 19세기 중반에 발명된 프러시안 블루를 화학적으로 가공하여 미세한 크랙 사이에 교묘하게 덧칠한 위작 복원입니다. 오리지널 안료층 위에 아교를 너무 두껍게 도포해, 안료 입자가 숨을 쉬지 못하고 내부에서 서서히 산화되어 썩어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1년만 방치하면 표지 전체가 검게 변색되어 바스러질 겁니다.”
백영호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김정훈 비서에게 눈짓을 보냈다. 정훈이 급히 정밀 보석 감정용 루페와 자외선 지시기를 가져와 기도서 표면을 비추었다. 형광 반응 스펙트럼을 확인한 김정훈이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사장님, 윤설아 씨의 말이 정확합니다. 안료의 연대 결합이 불일치하며, 내부 산화가 진행 중입니다.”
백영호의 은색 지팡이가 바닥을 탁 쳤다. 그는 경이로움과 예리함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설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정밀 기계로도 잡아내기 힘든 미세한 안료의 층위와 화학적 손상을 오직 맨눈으로만 단숨에 간파해 낸 설아의 독보적인 복원 실력에, 노신사의 카리스마 넘치는 안목이 굴복한 순간이었다.
“놀랍군. 창현이의 손녀답게 눈빛이 보통이 아니라고는 생각했다만, 이 정도의 혜안을 가졌을 줄이야.”
백영호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흥미롭다는 듯 말을 이었다.
“좋네. 자네의 그 천재적인 복원 실력은 충분히 증명되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 수십억의 현금을 불법 경매장에 던질 수는 없네. 내가 서지훈과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 모양인데, 그 조각이 내게 어떤 구체적인 이익을 주지?”
설아는 백영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서지훈의 메디치 재단이 노리는 것은 단순한 미술품 수집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드리안의 초상화에 깃든 300년 전 고대 연금술의 비밀과 영적 에너지를 독점하려 합니다. 만약 이번 경매에서 그들이 가슴 조이지 파편을 손에 넣는다면, 서지훈은 자신의 난치병을 치료하고 불멸의 지배 구도를 완성할 동력을 얻게 될 겁니다. 그것은 이사장님의 백성 재단뿐만 아니라 국내 미술계 전체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
설아는 단호한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절 지원해 주십시오. 제가 그 조각을 낙찰받아 초상화를 완전히 복원해 내겠습니다. 복원이 완료되면, 서지훈의 위작 커넥션과 불법 약탈 문화재의 모든 진실을 대중 앞에 폭로해 그를 사회적으로 완벽히 매장해 드리겠습니다. 이사장님께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최고의 명예와 라이벌의 파멸을 손에 쥐게 되시는 겁니다.”
침묵이 응접실을 무겁게 채웠다. 백영호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설아의 형형한 눈빛을 응시했다. 그녀의 제안은 단순한 구걸이 아니었다. 서지훈이라는 거대한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기술을 담보로 던진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동맹 제안이었다.
잠시 후, 백영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허허 웃으며 품 안에서 영롱한 블랙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로 미끄러뜨렸다. 백영호의 무기한 펀딩 자금, 한도가 존재하지 않는 백성 재단의 블랙 신용카드였다.
“재미있군. 내 평생 이토록 비장하고 영리한 담판은 처음이야. 좋네, 이 카드를 가져가게. 경매장에서 그 조각의 가격이 얼마가 치솟든, 백성 재단의 이름으로 무제한 입찰을 허락하지.”
설아의 가슴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이 아주 미세하게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오려 했다. 드디어 자금을 확보했다. 이제 아드리안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하지만 평화는 지독하게도 짧았다.
백영호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가시고, 대자산가 특유의 차갑고 무거운 살기가 응접실을 얼려버릴 듯이 뿜어져 나왔다. 노신사는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설아의 눈동자를 꿰뚫어 보듯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명심하게, 윤설아 씨. 내 돈을 움직이고 싶다면, 네가 가진 복원가로서의 목숨보다 귀한 가치를 증명해 보여라. 만약 경매에서 실패하거나, 그 초상화를 완벽히 복원해 내지 못해 내게 약속한 파멸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자네가 가진 그 고귀한 두 눈과 손가락, 그리고 자네 가문의 모든 흔적을 내가 직접 거두어 갈 것이네. 내 자본을 가볍게 여긴 대가는 자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게야.”
지하 아틀리에의 한기보다 더 서늘한 대자산가의 잔혹한 시험이자 경고였다. 설아는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테이블 위의 블랙카드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그 무거운 위협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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