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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의 초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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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 지하 아틀리에의 문을 닫고 들어서는 순간, 윤설아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허름한 지하실의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 사이로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맵싸한 화학 약품 향이 뒤섞여 코를 찔렀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의 뼈마디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피로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설아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거치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은 가루 결계가 쳐진 푸른 장막 속에서 ‘아드리안의 잔혹한 초상화’가 고요히 안치되어 있었다. 낮 동안의 영력 소모 때문인지, 캔버스 속 아드리안의 은빛 실루엣은 평소보다 훨씬 희미하고 투명해 보였다. 가슴 언저리의 찢어진 틈새는 마치 살아있는 상처처럼 벌어져 있었고, 그 주변의 마 섬유들이 온습도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다.


“아드리안…….”


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열었다. 박물관 지하 보존실에서 목숨을 걸고 빼돌린 정제 가죽 아교 통과 고순도 유기용제가 든 갈색 시약병들이 가방 속에서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장수진의 집요한 의심과 박물관 보안팀의 감시망을 뚫고 겨우 얻어낸 전리품이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은제 미세 카테터 주사기를 꺼냈다. 왼쪽 손목 정맥 부근에는 이미 촘촘하게 새겨진 은빛 주사 자국들이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채혈을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려던 찰나, 아틀리에의 무거운 철문 너머로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철컥.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설아는 본능적으로 메스를 움켜쥐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문틈으로 들어선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메스를 내려놓았다. 헝클어진 머리에 가죽 재킷을 걸친 사내, 최강준이었다. 그의 입에는 늘 그렇듯 막대사탕이 물려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평소와 달리 극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설아 너 괜찮냐? 박물관에서 장수진이랑 난리가 났다면서?”


강준이 문을 걸어 잠그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의 시선이 설아의 창백한 안색과 주사 자국이 가득한 손목에 머물렀다. 강준은 혀를 차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낡은 종이 뭉치와 태블릿 PC를 꺼내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보다 더 급한 정보가 들어왔어. 네가 밤낮으로 찾아 헤매던 그 ‘심장 조각’ 말이야.”


설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심장 조각? 행방을 알아낸 거야?”


“어. 아시아 최대 규모의 불법 고미술품 암시장, ‘심연(Abyss)’의 특별 경매 카탈로그를 입수했어. 강지한 녀석이 다크웹 서버를 해킹해서 빼낸 거야. 여기 봐.”


강준이 태블릿 화면을 켜서 설아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화면 속에는 어두운 벨벳 상자 위에 놓인 낡은 캔버스 조각 사진이 떠 있었다. 정교하게 잘려 나간 마 섬유의 격자 구조, 그리고 그 표면에 칠해진 독특한 사파이어 빛 의복의 잔해. 현미경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드리안의 심장 부위, 300년 전 그가 칼에 찔렸던 바로 그 자리에 해당하는 초상화의 잃어버린 조각이었다.


“경매는 며칠 뒤 보름달이 뜨는 밤에 열려. 장소는 인사동 지하 어딘가라는데, 문제는 거기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거야.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고, 추천 코드와 특수 초대장이 없으면 입구 근처에도 못 가.”


설아는 가슴이 조여드는 통증을 느꼈다. 심장 조각을 찾았지만,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한 장벽이 너무도 높았다. 수중에 가진 돈이라곤 할아버지가 남긴 사채 빚 독촉장뿐이었다. 게다가 오늘 박물관에서 있었던 소동을 떠올리자 머리가 아파왔다.


문득 설아의 머릿속에 낮에 있었던 이민우 인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장수진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먹물 통을 쏟아뜨리며 소동을 피우던 민우. 그가 허둥지둥 일어설 때,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낡은 가죽 수첩이 떨어졌었다. 설아가 그를 부축하며 수첩을 주워주던 찰나, 수첩 모서리에 아주 미세하게 적혀 있던 기묘한 기호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일반적인 미술학 기호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가죽 일지 뒤편에서 보았던, 17세기 유럽 연금술사들이 복원 공식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던 비밀 주술 기호였다. 어리바리한 신입 인턴에 불과한 이민우가 왜 그런 기호를 수첩에 적고 다녔던 걸까? 그 역시 할아버지의 죽음이나 발렌시아 가문의 저주와 연결되어 있는 걸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파헤칠 여유가 없었다. 아드리안의 시한부 저주 기한이 실시간으로 깎여 나가고 있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경매장의 초대장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초대장을 구할 방법은 없어?” 설아가 강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강준이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굴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인사동 골목 구석에 ‘고서향’이라는 낡은 골동품점이 있어. 거기 주인이 마광식이라는 영감인데, 전직 문화재 전문 브로커야. 그리고…… 네 할아버지 윤창현 교수의 오랜 벗이기도 하지. 그 영감이라면 ‘심연’의 입장 코드를 가지고 있을 거야.”


“마광식 어르신…….”


설아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먼발치로 보았던 덥수룩한 턱수염의 노인을 기억해 냈다. 할아버지가 평생 동안 초상화를 추적할 때 유일하게 학문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야인 감정가였다.


“가자, 강준아. 지금 당장.”


* * *


인사동의 좁고 어두운 골목길은 낮 동안의 화려함을 잃고 음산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낡은 벽돌 건물들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휘몰아치며 삐걱거리는 간판 소리를 만들어냈다. 골목 가장 깊숙한 곳, 간판도 없이 희미한 주황색 알전구 하나만 켜진 ‘고서향’의 미닫이문이 나타났다. 가게 안쪽에서는 퀴퀴한 고서 냄새와 먼지 쌓인 나무 향이 가득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르륵.


설아와 강준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에 정체불명의 도자기와 빛바랜 서적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고, 그 한가운데 낡은 개량한복을 입은 노인이 돋보기를 든 채 고서를 읽고 있었다. 마광식이었다.


“문 닫을 시간이다. 볼일이 있으면 내일 낮에 오거라.”


마광식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칼칼한 목소리로 뱉었다.


강준이 앞으로 나서며 주머니에서 두툼한 현금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마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희가 급히 구하는 물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돈은 섭섭지 않게 쳐드리겠습니다.”


광식은 그제야 돋보기 너머로 강준과 설아를 흘겨보았다. 그의 시선이 현금 봉투에 닿았다가, 이내 싸늘하게 식었다.


“사설 탐정 흉내를 내는 최 군이로군. 그리고 그 옆에는 창현이의 손녀딸인가.”


광식은 현금 봉투를 손가락 끝으로 툭 밀어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내 목숨 값이 이 종이 쪼가리보다 훨씬 비싸다네.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나가게. 내가 다루는 물건 중에 자네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철저한 기만과 거절이었다. 광식은 이미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눈치챈 듯했다.


설아는 물러서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비밀 가죽 일지 속 한 구절을 나직하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동쪽 나라의 연금술사가 서쪽 가문의 심장에 자물쇠를 채웠으니, 그 열쇠는 오직 밤의 프레임 속에서만 붉게 타오르리라.’…… 할아버지가 일지에 남기신 마지막 기록입니다. 어르신, 할아버지는 이 저주를 풀기 위해 평생을 바치셨고, 결국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전 이 비밀을 끝까지 밝혀야 합니다.”


일지의 구절이 흘러나오자, 마광식의 찻잔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복잡한 감정의 균열이 일어났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완강했다.


“창현이는 그 망상 때문에 죽은 게다! 죽은 자의 그림을 만지는 자는 결국 산 자의 생명까지 빼앗기게 마련이지. 자네 안색을 보게. 그 창백한 뺨과 시들어가는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가?”


광식의 날카로운 시선이 설아의 소매 틈새로 드러난 왼쪽 손목에 머물렀다. 촘촘하게 새겨진 은빛 주사 흉터 자국들. 광식은 대번에 그것이 가문의 핏줄을 바쳐 그림을 복원하는 ‘피의 계약’의 흔적임을 알아차렸다. 그의 눈에 극도의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스쳤다.


“가문의 저주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다니, 미련한 것. 당장 그 손을 떼고 평범하게 살아가게. 그것이 창현이가 진정으로 원했던 길이야.”


“아니요, 틀렸습니다.”


설아는 단호하게 외치며, 자신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푸른빛이 영롱하게 감도는 ‘발렌시아의 푸른 눈물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도망치려 하신 게 아닙니다. 이 저주를 설계한 조상의 죄를 속죄하고, 그 영혼을 구원하려 하셨던 겁니다. 이 반지가 저를 선택했고, 아드리안이 깨어났습니다. 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반지를 보는 순간, 마광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그 반지는…… 발렌시아의 저주받은 유물! 자네가 정녕 제정신이 아니로군! 그 반지에 손을 댄 자는 단 한 명도 무사하지 못했어! 당장 내 집에서 나가게!”


광식은 격분하여 그들을 쫓아내려 찻잔을 거칠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틀리에의 푸른 장막 속에서 침묵하던 아드리안의 영적 기운이 설아의 분노와 결의에 반응하여 폭발하듯 고서향 내부로 밀려들었다.


우우웅-


가게 안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영하 10도 이하로 급강하했다. 차가운 냉풍이 사방의 고서들을 뒤흔들며 서늘한 소리를 냈고, 설아와 강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치이이익!


마광식이 내려놓은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뜨거운 김이 허공에서 그대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투명한 얼음 결정들이 눈꽃 모양으로 정교하게 굳어지며 찻잔 주위를 감쌌고, 찻잔 내부의 뜨겁던 차는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어 서늘한 서리를 내뿜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초자연적인 현상에 마광식은 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 쳤다.


그는 얼어붙은 찻잔과 설아의 손가락에 끼워진 푸른 반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턱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증명이자 경외감의 화신이었다.


“이, 이 힘은…… 아드리안 백작의 영혼이 정녕 깨어났단 말인가…….”


지하실을 가득 채운 서늘한 정적 속에서, 마광식은 깊은 패배감과 깨달음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으며 테이블 아래 깊숙한 곳에 숨겨진 무거운 철제 금고로 향했다.


광식은 떨리는 손으로 다이얼을 돌려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낡은 벨벳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가 열리자, 안쪽에서 기이한 광택을 내뿜는 은색 가면과, 차가운 검은색 메탈 재질로 주조된 두꺼운 초대장 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연’의 특별 경매 초대장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분을 숨기기 위한 특수 은색 가면이지.”


광식은 초대장을 설아의 앞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놓으며, 뼈아픈 경고를 던졌다.


“자네가 정녕 이 길을 가겠다면 말리지 않겠네. 하지만 기억하게. 그곳은 인간의 탐욕이 심연을 이루는 복마전이다. 자네가 은색 가면을 쓰고 그 음침한 지하 경매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서지훈의 눈과 사냥개들이 자네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사방의 그림자 속에서 도사리고 있을 게야.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평범한 산 자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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