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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난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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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을 찌르는 맵싸한 라벤더 향과 비릿한 피비린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차갑고 소독약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윤설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시야가 뿌옇게 흔들렸다. 천장의 낡은 천창으로 비쳐 드는 희뿌연 대낮의 빛이 눈동자를 시리게 찔러왔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목구멍은 타들어 갈 듯 건조했다.


“정신이 들어?”


익숙하고도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설아는 고개를 아주 느리게 돌렸다. 하얀 의사 가운을 걸친 사내, 대학 시절 의대 친구이자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강동현이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목을 짚고 있었다. 설아의 왼팔에는 투명한 수액 줄이 연결되어 있었고, 철분이 섞인 붉은빛 수액이 규칙적으로 혈관을 타고 흘러들고 있었다.


“동…… 현아.”


“말하지 마. 너 지금 심각한 저혈압 쇼크에 아급성 빈혈이야. 헤모글로빈 수치가 정상인의 반 토막도 안 돼.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정신을 붙잡고 있었는지 의사인 나도 이해가 안 가.”


강동현은 혀를 차며 청진기를 거두었다. 그의 옆에는 가죽 재킷을 걸친 최강준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강준은 설아가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아 너 진짜 미쳤어? 내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넌 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영영 못 깨어났을 거야. 아틀리에 문은 완전히 박살이 나 있고, 안은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있고…….”


강준의 말에 설아는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끝에 바스락거리는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다. 마동필이 도망치며 떨어뜨린, 할아버지 윤창현의 이름이 도용된 위조 연대보증서 서류 뭉치였다. 설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거…….”


“알아, 그 사채업자 자식들이 남기고 간 위조 채권 서류지? 내가 챙겨둘게.”


최강준이 설아의 손에서 부드럽게 종이를 빼앗아 재킷 안주머니에 소중히 넣었다. 그의 눈빛이 전에 없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마동필 그 인간들이 남긴 이 서류, 백성 재단 백영호 이사장님의 전속 법률팀에 넘길 거야. 사기 및 불법 추심, 무단 주거 침입 혐의로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해 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아틀리에 박살 난 철문은 내가 임시로 걸쇠를 달아 잠가뒀어. 오후에 백성 재단 경호팀이 와서 최고급 보안 도어락으로 싹 교체해 주기로 했고.”


설아는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누웠다. 하지만 동현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왼쪽 손목에 머물러 있었다. 동현은 설아의 소매를 거칠게 걷어 올렸다. 얇고 하얀 손목 피부 위로, 은제 미세 카테터 주사기를 반복해서 찔러 넣은 탓에 생긴 은빛 주사 자국과 미세한 흉터들이 촘촘히 누적되어 있었다.


“설아 너, 내 눈 똑바로 봐.”


강동현의 목소리가 의사로서의 엄중한 경고를 담아 무겁게 울렸다.


“이 상처들 뭐야? 정맥을 사적으로 찌른 흔적이잖아. 너 설마…… 사적으로 위험한 약물에 손댄 건 아니지? 아니면 대체 왜 이렇게 스스로 피를 뽑아대는 건데?”


“약물 같은 거 아니야, 동현아. 그냥…… 복원 작업에 필요한 성분을 추출하느라 그랬어.”


“복원가들이 언제부터 자기 피를 뽑아서 그림을 고쳤어?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과다 채혈을 감행하면 정말 심정지가 올 수 있어. 이건 경고가 아니라 예고야.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 미친 짓 그만둬.”


동현은 화를 참지 못하는 듯 씩씩거리며 영양 수액의 속도를 조절했다. 설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드리안의 초상화를 복원하기 위해선 가문의 핏줄인 자신의 혈액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과학도인 동현에게 설명할 길은 없었다.


강준이 동현의 어깨를 짚으며 밖으로 인도했다.


“동현아, 일단 설아 쉬게 해 주자. 내가 옆에서 잘 감시할게. 고생했다.”


“휴, 강준이 너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 저 고집불통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동현은 마지막까지 설아를 매섭게 노려본 뒤, 왕진 가방을 챙겨 아틀리에를 나섰다. 강준 역시 설아의 이마에 찬 수건을 얹어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도 나가서 백성 재단 비서실이랑 마동필 고소 건 정리하고 올게. 아틀리에 입구에 경호원들 배치해 둘 테니까 마음 놓고 쉬고 있어.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할 테니까.”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틀리에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깨진 시약병과 흩어진 안료 가루들의 흔적이 바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공기 중에 감돌던 혹독한 영하의 냉기는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설아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 옆 거치대를 바라보았다. 은 가루 봉인선 드로잉이 정교하게 쳐진 아드리안의 잔혹한 초상화가 달빛이 사라진 대낮의 어스름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캔버스 표면의 붉은 주술 곰팡이는 설아의 피로 인해 완벽히 정화되어 사라졌지만, 아드리안의 영체는 보이지 않았다. 대낮에 영력을 과다 소모한 대가로 캔버스 깊은 곳으로 강제 회수된 탓이었다.


“아드리안…….”


설아가 그의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며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스으으으-


초상화 표면에서 푸른빛 안개가 흐릿하게 피어오르더니, 거치대 앞 허공에 아드리안의 반투명한 실루엣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복원율 15%의 한계는 명확했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과 기품 있는 귀족 코트의 질감은 안개처럼 흐려져 당장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해진 영체였다.


설아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작업 테이블로 향했다. 손가락 끝마디의 마비 증세로 인해 손이 덜덜 떨렸지만, 그녀는 다시 복원용 세필 붓과 은제 미세 카테터를 쥐려 했다. 아드리안의 영적 소멸을 막기 위해선 쉬지 않고 복원 작업을 이어가야 했다.


탁.


갑자기 보이지 않는 차가운 힘이 설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니, 아드리안이 염동력을 발휘해 그녀의 손에서 복원 붓과 카테터를 강제로 빼앗아 작업대 멀리 날려버린 것이었다. 붓이 대리석 바닥을 굴러 깨진 유리 파편 사이로 떨어졌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설아의 머릿속을 울리는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평소의 냉정함을 잃은 채, 시린 슬픔과 분노로 젖어 있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네가 나를 붙잡기 위해 스스로 손목을 찌르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저 인간 의사의 말이 맞다. 너는 지금 서서히 죽어가고 있어.]


“아직 죽지 않았어. 이 정도 빈혈은 늘 겪던 거야.”


설아가 고집스럽게 붓을 주우려 몸을 숙이자, 아드리안의 영체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반투명한 그의 가슴 부위에는 찢겨 나간 하반신과 심장 부위의 검은 공백이 흉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만두라고 했다!]


아드리안이 소리쳤다. 지하실 벽면이 그의 감정에 반응해 미세하게 떨렸다.


[300년 전, 나는 가문의 배신과 저주 속에서 이미 죽은 존재다. 액자 속의 어둠에 갇혀 소멸하는 것은 나의 운명일 뿐이야. 그런데 왜 산 자인 네가, 나 같은 망령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는 거지? 더 이상 나 때문에 네 피를 흘리지 마라. 차라리 내가 안개처럼 사라지는 편이 나아.]


그의 목소리에 담긴 뼈아픈 죄책감과 슬픔이 설아의 가슴을 저릿하게 찔렀다. 설아는 떨리는 숨을 내쉬며, 작업대 위에 놓여 있던 윤창현의 가죽 일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아드리안의 희미한 은빛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단순히 당신을 불쌍히 여겨서 내 피를 바치는 거라고 생각지 마, 아드리안.”


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강인한 집념이 깃들어 있었다.


“내 할아버지는 평생 당신의 초상화를 추적하다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셨어. 그리고 내 조상 윤서진은 300년 전 당신을 이 액자에 가두는 저주를 설계한 연금술사였지. 이건 내 가문이 당신에게 진 씻을 수 없는 죄이자 업보야.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야.”


설아는 한 걸음 더 아드리안에게 다가갔다. 차가운 영적 냉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망가진 유물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는 것. 그것이 복원가인 나의 유일한 존재 이유이자 선택이야. 당신을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되돌려놓기 전까지는, 난 절대로 이 복원 붓을 놓지 않아. 그러니까 소멸하겠다는 나약한 소리는 집어치워.”


아드리안은 설아의 단호한 선언에 침묵했다. 그의 흐릿한 은빛 실루엣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설아를 향한 경계심과 배신의 트라우마 뒤에 숨겨져 있던, 누군가에게 구원받고 싶다는 본능적인 갈망이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설아의 왼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


스으으으-


그의 차가운 영적 온기가 설아의 살결에 닿는 순간, 설아의 손목에 남겨진 은빛 카테터 흉터 자국들이 은은하게 공명하며 붉은 빛을 내뿜었다. 복원율 15% - 피의 계약 결속의 힘이었다.


두 사람의 피부가 맞닿은 부위에서 분홍빛과 은빛의 미세한 파동이 피어올랐다. 체온 공유 및 통증 경감 능력이 가동되는 순간이었다. 설아의 머리를 짓누르던 극심한 편두통과 빈혈의 한기가 아드리안의 서늘한 영적 에너지 속으로 녹아들며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반대로 설아의 따뜻한 생명력이 아드리안의 흐려지던 영체를 단단하게 고정해 주었다.


서로의 고통을 나누어 겪는 기묘하고도 애절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심장 고동 소리가 지하 아틀리에의 적막을 깨고 쿵, 쿵 하며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울려 퍼졌다.


“느껴져? 당신의 심장이 뛰고 있어, 아드리안.”


설아는 아드리안의 가슴 부위, 뻥 뚫린 검은 공백 위로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얹었다. 그의 실체 없는 영혼을 온전히 붙잡고 싶다는 강렬한 갈망이 그녀의 손끝을 타고 초상화의 캔버스 천으로 흘러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악!


설아의 손바닥이 아드리안의 가슴에 닿는 찰나, 유물 접촉 감응(Psychometry) 능력이 폭발적으로 각성했다.


설아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사파이어 빛 은색으로 물들었다. 아틀리에의 사방 벽면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300년 전 피렌체의 화려하고 음산한 고성 내부의 환영이 그녀의 뇌리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단두대의 비명 소리, 타오르는 연금술 제단의 불길, 그리고 가죽 일지 뒷장에서 흘러나온 고대의 기억 파편들이 환각이 되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거대한 기억의 소용돌이 속에서, 설아는 현대의 기괴하고 화려한 어둠의 공간을 목격했다.


가면을 쓴 부유한 수집가들이 가득한 지하 경매장. 붉은 조명 아래, 아드리안의 가슴 부위에서 잘려 나간 진짜 ‘심장 조각 캔버스 파편’이 은빛 상자 위에 놓여 거래되고 있었다. 그 배후에는 세련된 미소를 짓고 있는 메디치 미술 재단의 이사장 서지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


설아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환상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어냈다. 환영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틀리에의 풍경이 다시 눈앞에 들어왔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 조각이 어둠의 미술품 암시장 ‘심연(Abyss)’에 유통되고 있다는 명확한 진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신촌 강준 조사사무소의 최강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채 두 번을 울리기도 전에 강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설아냐? 몸은 좀 어때?


설아는 아드리안의 흐릿하지만 단단한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강준아, 지금 당장 조사해 줘. 인사동 지하 깊숙이 숨겨진 불법 고미술품 암시장, ‘심연’에 대해 알아봐야겠어. 아드리안의 진짜 심장이…… 그곳에 있어.”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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