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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장고의 붉은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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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지하 2층 보존과학실의 공기는 언제나 건조하고 시큼했다. 안료를 녹이는 에틸알코올과 메틸에틸케톤의 퀴퀴한 화학 용제 냄새, 그리고 수백 년 묵은 고서적과 섬유 유물들이 뿜어내는 먼지 냄새가 한데 뒤섞인 공간. 윤설아는 그 퀴퀴한 밀폐된 방에서 홀로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수석 복원가들의 질시를 한 몸에 받는 고미술 복원가. 사람들은 그녀를 ‘할아버지의 망상에 빠져 유물에만 집착하는 미친 여자’라 부르며 기피했지만, 설아에게는 이 차갑고 정적인 지하 방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죽은 유물은 살아있는 인간들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여기 있었군, 윤설아 선생.”


문이 열리며 도도하고 거만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남자는 보존과장 김성태였다. 반짝이는 대머리 아래로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배를 내밀고 걷는 그의 눈빛에는 탐욕과 비열함이 가득했다. 평생을 초상화 추적에 바치다 의문의 실족사로 세상을 떠난 설아의 할아버지, 윤창현 박사의 연구 성과를 가로채 자신의 업적으로 포장하려 혈안이 된 인물이었다.


“과장님. 분석 중인 유물의 섬유 접합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설아는 시선을 현미경에서 떼지 않은 채 건조하게 답했다.


“그따위 폐기 직전의 쓰레기 같은 지류 조각에 매달릴 시간이 어디 있나? 지금 지하 3층 제4수장고에 임시 분류해 둔 유물들 중에서 보존 상태를 전수 조사하라는 이사회의 지시가 내려왔네. 당장 내려가서 보고서를 작성해 오게.”


김성태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설아는 예리한 눈빛으로 그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포착했다.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 하지만 계약직 복원가에 불과한 그녀에게는 그의 명령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설아는 묵묵히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독일제 빈티지 메스를 주머니에 챙겨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 3층 제4수장고는 박물관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금단의 구역이었다. 훼손되어 가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폐기 처분을 기다리는 유물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된 음산한 공간. 철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냉습한 공기와 함께 썩어가는 한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설아가 수장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 손전등을 비추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타앙! 콰르르릉!


머리 위 천장에서 고압의 스파크가 튀는 굉음과 함께 수장고 내부의 모든 전등이 동시에 암전되었다. 암흑 속에서 붉은색 비상 경고등이 요란하게 회전하며 찢어지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상 상황 발생. 지하 3층 제4수장고 내부 누전으로 인한 화재 감지. 모든 직원은 즉시 대피하십시오.]


기계적인 안내 방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장의 환기구를 타고 짙은 검은색 유독가스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수장고 입구 쪽이 붉은 화염으로 뒤덮였다. 시야는 순식간에 연기로 차단되었고, 매캐한 타는 냄새가 폐부를 찔러왔다.


“콜록! 콜록!”


설아는 급히 셔츠 소매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불길은 무서운 기세로 목재 유물 상자들을 집어삼키며 설아를 향해 좁혀왔다. 퇴로가 차단되었다. 설아는 벽면에 설치된 화재 진압용 소화기를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달려가 핀을 뽑았다. 그러나 레버를 움켜쥐는 순간, 푸쉭 하는 힘없는 소리와 함께 백색 분말이 몇 방울 떨어질 뿐이었다. 내부 압력이 완전히 저하된 불량 소화기였다.


“안 돼……!”


소화기를 내팽개친 설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유독가스를 흡입한 탓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대로 질식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뒤돌아 다른 대피로를 찾으려던 설아의 발끝이 무언가에 걸려 비틀거렸다.


그것은 구석 철제 선반 밑, 먼지와 폐기용 합판 더미 사이에 거꾸로 처박혀 방치되어 있던 낡은 액자였다.


바로 그 순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온몸을 불태울 듯한 화재의 열기 속에서, 그 액자가 위치한 구석진 공간만큼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연기 속에서, 그 차가운 공기는 마치 설아를 부르는 유일한 숨구멍처럼 느껴졌다.


설아는 홀린 듯 무릎을 꿇고 먼지 구덩이 속에서 그 액자를 끌어올렸다.


두꺼운 그을음과 먼지로 뒤덮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17세기 유럽 귀족의 초상화였다. 훼손율이 60%에 달해 물감이 박리되고 천이 찢어진 참혹한 상태의 유화. 하지만 설아의 손끝이 그 초상화의 캔버스 표면에 닿는 순간, 얼음장 같은 냉기가 그녀의 정맥을 타고 심장까지 단숨에 관통했다.


두근. 두근.


설아의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쳤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초상화에서 방출된 서늘한 은빛 한기가 보이지 않는 방어막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더니, 설아를 덮치려던 수장고의 붉은 불꽃들을 일시적으로 짓누르며 기세를 꺾어버린 것이다. 타오르던 불길이 숨을 죽이듯 잦아들며 찰나의 탈출로가 열렸다.


‘이 그림이…… 불을 막고 있어?’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이었다. 하지만 설아의 천재적인 직관은 속삭이고 있었다. 이 그림을 놓치면 자신도, 그리고 이 그림 속 영혼도 영원히 소멸할 것이라고. 설아는 본능적으로 아드리안의 초상화를 품에 껴안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액자의 감촉이 가슴뼈를 시리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품에 안은 온 힘을 다해 붉은 연기 장막을 뚫고 비상구를 향해 달렸다.


“콜록! 아윽!”


탈출하는 도중 타오르던 철제 선반의 모서리에 스쳐 손가락 끝에 경미한 열상을 입었다. 붉은 피가 흘러내려 초상화를 감싼 가방 표면에 묻었지만, 설아는 고통을 느낄 겨우도 없이 비상구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지하 2층 복도는 이미 박물관 직원들과 대피하려는 인파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방독면을 쓰지도 않은 채 초조하게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보존과장 김성태가 비상구 문을 열고 나오는 설아를 발견했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시선은 설아의 얼굴이 아닌,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검은색 특수 방수 가방으로 향했다.


“윤설아! 자네 품에 안고 있는 그 물건은 뭔가? 수장고 유물을 무단으로 반출하려는 건가!”


김성태가 사납게 짖어대며 설아의 가방을 억지로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그의 태도는 화재 수습이나 직원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그 가방 속 물건을 확인하려는 비열한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설아는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그의 손길을 피했다.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이 그림의 존재를 들키면 횡령죄로 몰려 영원히 빼앗기거나 파괴될 것이 분명했다. 김성태가 화재의 혼란을 틈타 특정 유물의 소실을 노리고 있었다는 심증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수장고 내부에서 뒹굴던 폐기용 합판과 낡은 액자 틀 더미입니다. 화재 잔해가 비상구를 막고 있어서 대피로를 확보하기 위해 치우며 들고 나온 쓰레기일 뿐입니다.”


설아는 가방 지퍼 틈새로 낡은 합판 조각이 보이도록 일부러 가방을 비스듬히 쥐며 김성태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철저한 기만책이었다.


“쓰레기라고? 거짓말 마라! 당장 가방을 열어라. 보안팀! 여기 윤설아 선생의 소지품을 수색해라!”


김성태가 악을 쓰며 보안요원들을 부르려던 바로 그때, 복도 끝에서 묵직하고 권위 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무엇들을 하고 있는 건가!”


백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온화한 인상의 노신사, 박물관 명예 관장 임학윤이었다. 그의 등장은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릴 만큼 무거웠다.


“명예 관장님!”


김성태가 비굴하게 허리를 굽혔다.


“과장 김성태. 지금은 수장고 내부의 화재 진압과 직원들의 안전한 대피가 최우선인 재난 상황이네. 수석 복원가가 대피 과정에서 잔해물을 치우며 들고 나온 물건을 두고 이 비상시국에 징계 절차의 합당성을 따지며 수색을 강행하겠다는 건가?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한 권한 남용은 이사회가 묵인하지 않을 걸세.”


임학윤 관장의 서늘한 질책에 김성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임 관장의 학술적 권위와 이사회 내 영향력을 거스를 수 없었다. 김성태는 이를 갈며 설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윤설아 선생, 일단 밖으로 대피하게. 소지품 검사는 화재 수습 후에 공식적으로 진행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관장님.”


설아는 임 관장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김성태의 매서운 의심의 눈초리를 뒤로하고 박물관 로비를 향해 신속하게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밤공기가 가득한 박물관 야외 광장으로 빠져나온 설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품에 안은 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무사히 반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보안팀이 수장고 잔해를 수색하기 시작하면 아드리안 초상화의 공식적인 소실이 밝혀질 것이고, 김성태의 집요한 추적이 시작될 터였다.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였다.


품에 안긴 가방 뒷면, 차가운 초상화의 액자 틀 너머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쿵. 쿵.


그것은 미세하지만 분명한 진동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기이하고 서늘한 박동이 설아의 가슴뼈를 타고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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