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냥의 저주와 가시 그물
나무 상자의 뚜껑이 열리는 순간, 금란정 내부로 눈부신 백색의 빛무리가 뿜어져 나왔다.
강무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자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황금이나 진귀한 영약, 혹은 전설적인 명검 따위가 들어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그의 눈동자가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자 안에는 비단으로 정성스럽게 감싸인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제국 최대의 상단이자 관청의 보증을 받는 대성상행(大盛商行)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은전 일만 냥(10,000)짜리 특별 태환권이었다.
일만 냥.
무혁은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전신이 굳어지며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일류 살수였다. 피비린내 나는 강호의 은원을 떠나, 남쪽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온돌방을 뜨끈하게 들인 작은 만두 가게를 차리는 것이 그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 소박하고도 간절한 노후 자금의 기준선이 바로 은퇴 자금 ‘오백 냥’이었다. 그 오백 냥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하북팽가의 소교주인 망나니 팽지혁을 죽이려는 미친 암살 작전에 자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오백 냥의 스무 배에 달하는 일만 냥이었다.
‘일만 냥이라니…….’
무혁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돈이면 남쪽 시골이 아니라 제국의 수도 경도 한복판에 삼층짜리 초호화 객잔을 세우고도 남을 거금이었다. 평생 일하지 않고 매일 밤 최고급 소흥주를 들이키며 떵떵거려도 마르지 않을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기뻐서 공중제비를 돌았겠지만, 무혁의 가슴속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자괴감과 억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가 왜…… 대체 왜 그 고생을 한 거지?’
침실 천장에 삼백 근짜리 청강석 바위를 매다느라 어깨뼈가 으스러질 듯한 노가다를 뛰었고, 무색무취의 만독칠야산을 달이기 위해 매캐한 독가스를 마셔가며 밤새도록 약사발을 저었다. 그 모든 눈물겨운 사투의 대가가 고작 오백 냥의 의뢰금 때문이었는데, 정작 타겟을 죽이지도 않고 ‘우연히 살려냈다’는 이유만으로 일만 냥이라는 돈이 굴러들어 온 것이다.
이것은 살수로서의 자존심에 대한 지독한 모욕이자, 우주가 자신을 향해 던지는 잔인한 비웃음이었다.
“무혁아, 마음에 드느냐?”
가주 팽자천이 호탕하게 웃으며 무혁의 처진 어깨를 강하게 내리쳤다. 내력이 실린 묵직한 손길에 무혁의 무릎이 가볍게 꺾일 뻔했다.
“내 평생 망나니 아들놈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으나, 너라는 인재를 만나 아들이 사람 구실을 하게 되었으니 이 일만 냥도 가문의 입장에서는 푼돈에 불과하다! 앞으로 수석 호위무사로서 지혁이를 더 철저히 보필해 다오!”
팽지혁 또한 옆에서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평생 저와 함께 하북팽가에서 뼈를 묻읍시다! 형님이 원하신다면 내일 당장 가문의 비고에 있는 천년영삼도 내어드리리다!”
‘닥쳐, 이 미친 새끼들아. 난 너희 가문에 뼈를 묻을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어.’
무혁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일만 냥짜리 태환권을 찢어발기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만약 여기서 돈을 거부하거나 도망치려 한다면, 가주 팽자천의 현경(玄境) 초입에 달하는 가공할 무공과 가문의 정예 무사들이 즉시 자신을 추적할 터였다. 살수로서의 정체가 탄로 나는 것은 물론이고, 영원한 은퇴라는 목표는 요원해진다.
무혁은 차갑게 식어버린 눈빛을 감추기 위해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가솔들의 눈에는 그 한숨이 ‘막대한 재물 앞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고결한 무사의 깊은 성품’으로 보였다.
“가주님의 은혜가 과분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혁은 이 빠진 단검처럼 서늘한 목소리로 답하며 상자를 닫았다. 돈은 넘쳐나지만, 살수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그에게는 ‘의뢰를 완수하고 정당하게 은퇴한다’는 철칙이 있었다. 타겟인 팽지혁을 단 한 번이라도 완벽하게 암살하여 계약을 끝내지 않는 한, 이 영웅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리라.
‘두 번의 실패는 없다. 이번엔 수석 호위무사라는 지위를 역이용해 주마.’
무혁은 품속에 들어온 청동 마패, ‘팽가 수석무사 통행패’를 만지작거렸다. 가문 내 모든 구역을 자유롭게 출입하고 무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의 신표였다. 이 패가 있다면,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팽지혁의 동선 주변에 기상천외한 살상 함정을 대놓고 깔아둘 수 있었다.
그는 즉시 머릿속으로 팽가의 지형을 복기했다.
팽지혁은 매일 아침 술에서 깨어나면 장원 후원의 인공 호숫가 산책로를 걸으며 숙취를 해소하는 고질적인 습관이 있었다. 그 산책로 주변은 무성한 수풀과 어두운 나무 그늘로 가득하여, 은밀하게 함정을 매설하기에 더없이 완벽한 장소였다.
무혁은 수석 호위무사로서의 첫 번째 명령을 내리기 위해 호위 1조 조장 김 대장을 불러 세웠다.
“김 대장.”
“예! 수석대장님! 명령만 내리십시오!”
김 대장은 마치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처럼 단단히 군례를 올렸다.
“오늘 밤부로 새로운 가문 호위 수칙을 제정한다. 명칭은 ‘팽가 호위 수칙 제1조’다.”
무혁은 매서운 살기가 서린 눈빛으로 김 대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소교주의 안전을 위해, 소교주가 이동하는 산책로 및 침실 반경 10보 이내에는 나를 제외한 그 어떤 경비병의 접근도 엄격히 금지한다. 적의 은밀한 침투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일대일 밀착 호위만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위반하는 자는 가법에 따라 엄단하겠다.”
김 대장은 무혁의 서늘한 기세에 압도당해 침을 꿀컥 삼켰다.
‘반경 10보 이내를 완전히 통제하신다니……! 소교주님을 노리는 사파 자객들의 침투로를 완벽하게 차단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위험을 짊어지시겠다는 뜻이구나!’
김 대장의 눈동자가 깊은 존경심으로 젖어 들었다.
“과연 대장님이십니다! 자신을 미끼로 삼아 소교주님을 철통같이 지키시려는 그 숭고한 결단, 저희 호위대원 모두가 받들겠습니다! 오늘 밤 후원 산책로 주변의 모든 순찰 노선을 즉시 외곽으로 변경하겠습니다!”
“……그래. 아주 철저하게 비워두도록.”
무혁은 속으로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경비병들이 완전히 사라진 정원 산책로는 이제 무혁 본인만의 완벽한 ‘암살 실험실’이 될 터였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팽지혁을 끔찍하게 죽일 덫을 깔 수 있는 판이 완성된 것이다.
***
깊은 밤, 삼경(오전 12시~2시 사이)의 어둠이 하북팽가 대장원을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혁은 회색 야행복을 걸치고 소리 없이 호위무사 별채를 빠져나왔다. 그의 손에는 가문 대장간의 철쇠에게 특별 의뢰하여 제작한 거대한 강철 ‘가시 그물망’이 들려 있었다.
이 그물망은 단순한 그물이 아니었다. 촘촘한 강철 선마다 살을 파고드는 예리한 가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그 가시 끝에는 스치기만 해도 전신 기혈을 마비시키고 삼장 장기가 부식되어 즉사하게 만드는 만독곡의 독초 즙이 발라져 있었다. 또한 그물 끝에는 장력이 강력한 스프링 인장 와이어가 연결되어 있어, 바닥의 특정 인장선을 밟는 즉시 사방의 수풀 속에서 그물이 탄성적으로 튀어나와 대상을 덮치도록 설계된 ‘기습용 가시그물 투척’ 장치였다.
‘팽지혁이 아침에 비틀거리며 산책로 수풀 옆을 지나갈 때, 이 인장 와이어를 밟는 순간…….’
무혁은 상상만 해도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후원의 어두운 산책로 수풀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기척을 완전히 차단한 채, 손가락 끝으로 미세한 장력을 조율하며 흙을 파내고 스프링 장치를 고정하기 시작했다. 가시 그물망의 톱니바퀴와 인장 도르래가 맞물리는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서걱거렸다.
하지만 정밀한 작업을 이어가던 중, 가시 끝의 날카로운 돌기에 무혁의 검지 손가락이 가볍게 긁히고 말았다.
“읏…….”
일류 살수답지 않은 사소한 실수에 무혁은 낮게 신음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행히 만독불침의 육체 덕분에 독기는 통하지 않았으나, 얇은 가죽 장갑이 찢어지고 붉은 핏방울이 배어 나오는 짜증스러운 생채기가 남았다. 철야 작업으로 인해 목덜미와 어깨 관절에는 극심한 뻐근함이 밀려왔다.
‘망나니 새끼 하나 죽이려고 내 손에 피를 묻혀야 하다니…….’
무혁이 속으로 욕설을 퍼붓고 있을 때였다.
사각, 사각.
수풀 너머에서 불길하고도 어설픈 흙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혁의 전신이 고양이처럼 예민하게 곤두섰다.
‘경비를 분명히 비우라고 했을 텐데, 어떤 놈이 감히 내 암살 구역에 들어온 거지?’
무혁은 소매 속의 흑철 단검을 쥐며 매서운 살기를 품고 고개를 돌렸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팽가 호위대의 어리버리한 신참 무사, 아강(阿强)이었다. 아강은 야간 보초용 횃불을 들고 멍청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수풀 속에 웅크리고 있는 무혁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대장님?! 이 깊은 밤에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무혁의 붉게 충혈된 눈과 짙은 다크서클, 그리고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살수 특유의 기운이 아강의 숨통을 조였다. 아강은 순간적으로 척추가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무혁은 재빨리 뇌리를 굴렸다. 여기서 아강을 죽였다가는 살수계 제1철칙을 위반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냥 돌려보내면 내일 아침 함정의 존재가 탄로 날 터였다.
무혁은 천천히 일어서며, 품속의 수석무사 통행패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가슴속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차갑고 장엄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아강…… 네놈이 감히 ‘호위 수칙 제1조’를 어기고 이곳에 발을 들였구나.”
“히익! 대, 대장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그저 순찰 구역을 확인하려다가……”
아강이 겁에 질려 횃불을 떨어뜨리려 하자, 무혁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닥쳐라. 이것은 가문의 명운이 걸린 극비의 ‘선제적 수호 결계 구축’ 작업이다. 적의 정예 자객들이 소교주님의 산책로를 노리고 침투할 경로를 내 손으로 직접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제적…… 수호 결계요?”
아강이 흙바닥에 매설된 정교한 강철 톱니바퀴와 가시 그물망의 복잡한 구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뇌 필터가 격렬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아……! 대장님께서는 가문 무사들의 눈을 피해, 홀로 밤을 새워가며 소교주님을 지킬 무시무시한 방어 진식을 직접 설계하고 계셨던 거구나! 이 얼마나 눈물겨운 충성심이란 말인가!’
아강의 얼굴이 감격과 송구함으로 붉게 상기되었다.
“대장님! 제 무지함과 불충을 용서해 주십시오! 대장님께서 이토록 가문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알았으면 조용히 물러가라.”
무혁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둘렀으나, 아강은 오히려 횃불을 단단히 쥐며 바위를 향해 걸어갔다.
“아닙니다! 대장님의 이 위대한 비밀 훈련…… 아니, 방어 진식 구축을 제 손으로 돕게 해 주십시오!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이 무거운 청강석 바위들을 옮겨 장치를 고정하겠습니다! 제게 호위의 핵심 원리를 전수해 주십시오!”
“……뭐?”
무혁이 멍하니 반문하기도 전에, 아강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300근짜리 청강석 바위를 번쩍 들어 올려 가시 그물망의 고정 인장 와이어 끝단에 쿵 소리가 나게 박아 넣었다.
“대장님! 이 바위의 각도가 맞습니까? 적이 밟았을 때 정확히 그물이 덮치도록 고정했습니다!”
무혁은 입을 벌린 채 아강의 미친 짓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파놓은 암살 함정의 고정 작업을, 타겟의 호위무사가 밤새 땀을 흘리며 대신 완벽하게 완성해 주고 있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이 새끼는 또 왜 이리 성실한 거야…….’
무혁은 솟구치는 인지부조화에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덕분에 가시 그물망의 인장 와이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내일 아침 팽지혁이 발을 내딛는 순간 정확하게 발동할 준비를 마쳤다.
“수고했다, 아강. 이제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내일 아침엔 기막힌 광경을 보게 될 테니.”
무혁은 뼈가 있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아강을 돌려보냈다. 아강은 ‘위대한 스승의 특별 비법을 전수받았다’며 감격의 눈물을 훔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원 산책로 수풀 사이에는 이제 완벽하게 위장된 치명적인 ‘가시 그물망’ 암살 덫이 숨겨져 있었다. 무혁은 자신의 완벽한 솜씨를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내일 아침이면, 그 망나니 놈의 목숨도 끝이다.’
그러나 무혁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신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기던 바로 그 시각.
하북팽가 대장원의 거대하고 장엄한 외곽 담벼락 너머, 달빛조차 들지 않는 울창한 대나무 숲속에서 수십 개의 검은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는 피비린내 나는 붉은 혈포가 둘러져 있었고, 선두에 선 사내의 얼굴에는 기괴한 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하북팽가를 완전히 멸문시키고 하북성을 사파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혈린교의 호법, 야율명(夜律明)과 그의 정예 습격대였다.
야율명은 차가운 단검을 뽑아 들고 팽가의 담벼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늘 밤, 하북팽가의 숨통을 끊어놓겠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사파의 거대한 전운이, 무혁이 정교한 가시 그물을 매설해 둔 바로 그 정원을 향해 은밀하고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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