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독배와 기루의 음모
하북성 성수현의 밤은 깊었으나, 성내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객잔이자 기루인 청풍루(靑風樓)의 불빛은 대낮보다 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삼층 누각 전체를 밝힌 수백 개의 홍등이 운하의 어두운 물결 위로 번져나가며 기이하게 일렁였다. 은은한 가야금 선율과 취객들의 걸걸한 웃음소리, 그리고 기녀들의 간드러진 노랫소리가 뒤섞여 밤공기를 뜨겁게 달구는 곳. 이곳이 바로 하북팽가의 소교주이자 천하에 둘도 없는 망나니, 팽지혁이 매일 밤 가문의 돈을 물 쓰듯 뿌려대며 방탕함을 일삼는 주 무대였다.
그 소란스럽고 화려한 청풍루의 후원 음침한 그늘 속에서, 한 사내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는 청풍루의 평범하고 낡은 무명옷인 성수현 점소이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어깨에는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걸레를 대충 걸치고, 머리에는 점소이들이 쓰는 비뚤어진 두건을 깊게 눌러쓴 모습. 영락없이 하루 몇 푼의 은전을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주막의 점소이 풍모였다.
하지만 두건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눈빛은 점소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밤샘 독약 조제로 인해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흘러내려 있었으나, 그 깊은 안동(眼瞳) 속에는 서늘하다 못해 시린 살기(殺氣)가 도사리고 있었다.
일류 살수 강무혁.
그는 지금 팽가의 감시망을 피해, 그리고 자신을 ‘천하제일의 호위무사’로 오해하고 있는 가솔들의 눈을 피해 이곳에 잠입한 상태였다. 무혁은 품속에 숨겨둔 독약 희석용 청동 주전자의 묵직한 감각을 느꼈다. 주전자 내부의 비밀 칸막이 속에는 지난밤 백년약방에서 천재 의원 설아의 눈을 피해 간신히 완성한 일곱 밤 동안 내장을 부식시키는 극독, 만독칠야산(萬毒七夜散)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낸다.’
무혁은 이를 부득 갈았다.
지난번 침실 천장에 매달아 둔 청강석 낙석 덫은 엉뚱한 자객 사독의 대가리를 깨부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 결과, 자신은 죽이려던 타겟인 팽지혁으로부터 ‘평생의 은인이자 의형제’라는 끔찍한 오해를 받게 되었다. 무혁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이 빌어먹을 암살 의뢰를 완벽하게 성공시켜 거액의 은퇴 자금 500냥을 손에 쥐고, 강호의 피비린내 나는 은원을 떠나 남쪽 따뜻한 시골에 온돌방을 들인 소박한 만두 가게를 차리는 것.
하지만 천도의 기이한 저주이자 억까는 그가 악의를 품고 설치한 모든 함정을 구원의 도구로 비틀어버렸다.
‘내 마음속 살의가 강할수록 왜곡 보정이 일어난다면…… 이번엔 내 손으로 직접 독주를 먹이겠다. 물리적인 덫이 아니니, 다른 자객이 끼어들어 대신 처먹을 일도 없겠지.’
무혁은 기척차단술(氣岾遮斷術)을 극성으로 전개했다. 그의 발걸음은 삐걱거리는 청풍루의 나무 복도를 딛고 있으면서도 단 한 푼의 소음조차 내지 않았다. 전신의 기혈을 잠그고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그는 자연스럽게 주방에서 술상이 차려진 이층 독방으로 향하는 점소이들의 행렬에 끼어들었다.
***
청풍루 이층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금란방(金蘭房)’.
방 문이 열리자마자 진한 분 냄새와 독한 술 향기가 무혁의 후각을 찔렀다. 방 안쪽에는 화려한 비단 장포를 풀어헤친 팽지혁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기녀들의 품에 기대어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하하하! 마셔라! 오늘 밤 청풍루의 모든 술값은 이 하북팽가의 소교주가 낸다! 형님이 지켜보고 계시니 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느냐!”
지혁은 취기에 겨워 부채를 나풀거리며 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옆에는 청풍루 최고의 명창이자 절세가인이라 불리는 기녀 소화(小花)가 가야금을 무릎에 올린 채 단아하게 앉아 있었다.
무혁은 고개를 숙인 채, 쟁반을 들고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 어깨에 걸친 걸레를 능청스럽게 쥐고 테이블 위의 술때를 닦아내는 척하며, 팽지혁의 동선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바로 그때였다. 가야금 줄을 조율하던 기녀 소화의 눈동자가 무혁의 움직임을 향해 멎었다.
그녀는 수많은 무림 고수들과 권력자들을 상대해 온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무혁이 비록 남루한 점소이 옷을 입고 비굴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으나, 그의 걸음걸이와 무게중심의 이동은 기루의 평범한 일꾼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특히 두건 아래로 은밀히 번뜩이는 매서운 눈빛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고독한 맹수의 풍모를 연상시켰다.
‘범상치 않다…….’
소화는 가야금 조율을 멈추고, 은밀하게 무혁의 일거수일투족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쫓기 시작했다.
‘저 사내의 몸에서 풍기는 저 차갑고 서늘한 기운은 대체 무엇이지? 저것은 단순한 살기가 아니다. 세상을 초탈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고독과 비장함…… 설마 팽가에서 소교주를 지키기 위해 밀파한 숨은 초일류 그림자 호위무사인가?’
소화의 오해가 싹터 오르는 순간, 무혁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암살 전술에 집중했다.
그는 능청스럽게 허리를 굽히며, 소매 속에서 독약 희석용 청동 주전자를 자연스럽게 꺼내 들었다. 주전자의 주둥이가 팽지혁의 빈 은잔을 향해 기울어졌다.
*쪼르르륵.*
맑고 향긋한 백자주(白瓷酒)가 잔을 채웠다. 하지만 그 주전자 내부의 비밀 판막은 이미 무혁의 손가락 내력 제어에 의해 열려 있었다. 만독칠야산 극독 가루가 술물과 결합하여 잔 속으로 은밀히 흘러들었다. 설아가 섞어둔 백야봉 약초 가루 덕분에, 독주는 치명적인 비소의 매캐한 냄새 대신 은은하고 달콤한 산매화 향기를 풍기며 잔 가득 찰랑였다.
무혁은 속으로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마셔라, 팽지혁. 설아가 위벽 보호용 약초를 섞어두긴 했으나, 이 만독칠야산의 뼈대는 여전히 만독곡의 치명적인 비소다. 이 잔을 비우는 순간, 네놈의 위장과 오장육부는 일주일 동안 서서히 부식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완벽한 숙취사로 위장된 은퇴의 문이 드디어 열리는구나!’
무혁은 독배를 팽지혁의 앞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놓으며, 태연하게 잔을 권하는 몸짓을 취했다.
“소교주님, 청풍루 최고의 비방으로 빚은 특별한 약주이옵니다. 한 잔 드시고 피로를 푸십시오.”
팽지혁은 향긋한 술 향기에 코를 킁킁거리며 잔을 들어 올렸다.
“오? 향이 아주 기가 막히는구나! 달콤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참으로 신비한 약주로세!”
지혁이 잔을 입술로 가져가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갑자기 그가 윽,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리더니 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아으…… 이놈의 고질적인 만성 위염이 또 도지는군. 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겁고 신물이 올라오는구나. 술을 더 마셨다간 위장이 먼저 구멍 나겠어.”
무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미친 새끼가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치우네? 어서 처마셔! 마셔야 네 위장이 완전히 녹아 없어질 거 아니야!’
무혁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했으나, 점소이의 신분이었기에 대놓고 “그냥 마셔라” 하고 윽박지를 수도 없었다. 그는 간신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차가운 눈빛으로 팽지혁의 손끝을 째려보았다.
그 매서운 눈빛을 본 소화는 속으로 다시 한번 경악했다.
‘저 눈빛……! 소교주의 건강 상태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그의 위장 열독을 다스릴 비방을 대령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서려 있어! 역시 저 자는 소교주를 지키는 충신이 틀림없어!’
그때, 팽지혁이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청백자 단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단지의 뚜껑을 열자, 방 안 가득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진하고 감미로운 천연의 단향(甘香)이 퍼져나갔.
백야봉 백화꿀(白花蜜)이었다.
백야봉의 깊은 절벽 틈새에서 천년의 기운을 머금고 피어난 백색 매화 꽃에서만 채집된다는 극양(極陽)의 성질을 지닌 희귀한 야생 벌꿀. 한 단지에 백 냥을 호가하는 귀한 물건으로, 내상을 치료하고 몸속의 차가운 음기를 몰아내는 효능을 지닌 영약에 가까운 감미료였다.
지혁은 헤헤 웃으며 은숟가락으로 그 백화꿀을 듬뿍 떠서, 무혁이 독을 타놓은 실버 잔 속에 통째로 투입하기 시작했다.
“허허, 의원 설아가 말하길 내 위장의 뜨거운 열독을 다스리려면 이 백야봉 백화꿀을 차가운 성질의 술에 타서 마시는 것이 최고라 하였지! 자, 이 귀한 꿀을 듬뿍 섞어 마시면 위장 통증도 가라앉고 술맛도 더 좋아질 것이다!”
*서걱, 서걱, 슥슥.*
지혁은 은숟가락으로 만독칠야산 독주와 백화꿀을 기분 좋게 휘저었다.
무혁은 그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영혼이 유체이탈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안 돼……! 저 미친 망나니 새끼가 내 완벽한 극독에 백 냥짜리 영약 벌꿀을 처넣고 있잖아!’
더욱 끔찍한 것은, 지난밤 설아가 만독칠야산 사발에 위벽을 보호한답시고 몰래 대량 섞어 넣은 ‘백야봉 약초 가루’의 존재였다.
동일한 백야봉 기슭에서 자라난 약초 가루와 백화꿀이 술잔 속에서 만나는 순간, 기이한 화학적 연쇄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만독칠야산의 뼈대였던 비소의 차갑고 치명적인 독성 분자들이, 백화꿀의 강력한 극양 성분과 설아가 섞어둔 약초 가루의 활성 효소에 의해 실시간으로 감싸 안기며 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은빛 광택을 내던 독주는 순식간에 불순물이 완전히 정화되어, 마치 아침이슬처럼 투명하고 영롱한 황금빛 신선주(神仙酒)로 모습을 바꾸었다.
살의역전결(殺意逆轉結)의 저주가, 무혁이 품은 지독한 살의와 반응하여 기적의 화학적 세탁을 기어이 완성해 버린 순간이었다.
무혁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기가 막힌 우주의 장난에 머리가 돌 것 같았다.
‘말려야 해…… 꿀을 섞은 독약이 과연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성분이 완전히 변해버린 것 같은데! 제발 마시지 마!’
그러나 점소이의 신분인 무혁은 감히 소교주의 행동을 제지할 명분이 없었다. 그는 쟁반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자! 형님이 주신 청풍루의 약주와 내 백화꿀이 만났으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제일의 신선주로다! 마셔보자!”
팽지혁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잔을 높이 치켜들고, 호탕하게 웃으며 목구멍 안으로 독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꿀꺽, 꿀꺽.
독주가 지혁의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려 갔다.
무혁은 침을 삼키며 지혁의 반응을 주시했다.
‘죽어라…… 제발 꿀이 섞였어도 비소는 비소다. 장기가 녹아내려 떵떵거리며 쓰러져라!’
술잔을 비운 팽지혁이 잔을 탁자에 턱 내려놓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지혁의 움직임이 딱 멈추었다.
그의 눈동자가 평소의 흐리멍덩함을 잃고 주먹만 하게 커졌다. 얼굴색이 순식간에 붉은색에서 짙은 보라색으로 변해갔고, 목덜미의 굵은 혈관들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윽……! 으으윽……!”
지혁은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쥔 채, 전신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기이한 신음이 새어 나왔고, 이내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와장창!*
술상 위의 안주 접시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굉음을 냈다.
“소교주님?! 소교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기녀 소화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금란방 문밖에서 대기하던 하북팽가의 정예 무사들이 무기를 뽑아 들며 방 안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바닥에 누워 목을 움켜쥔 채 사르르 떨고 있는 팽지혁과, 그 앞에 청동 주전자를 든 채 차갑게 굳어 있는 점소이 차림의 강무혁.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화려한 기루의 독방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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