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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황궁의 늪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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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새벽안개가 하북성 경계의 숲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바스락, 바스락.


검은 야행복을 입은 강무혁은 등 뒤에 멘 묵직한 짐보따리를 고쳐 매며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으윽…….”


허리와 골반을 타고 올라오는 찌릿한 통증이 척추를 강타했다. 전날 밤, 기산선생의 서재에서 날아오는 혈린교 밀정의 독침들을 피하기 위해 몸을 기괴하게 이리저리 꺾었던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도진 모양이었다. 일류 살수로서 뼈를 깎는 신체 단련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연이어 터지는 우주의 기상천외한 억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누적된 육체적 피로는 그야말로 한계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무혁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눈 밑에 짙게 내려앉은 다크서클마저 오늘만큼은 승리의 훈장처럼 보였다.


‘탈출했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하북팽가에서 벗어났어.’


무혁은 품속에 들어있는 백옥 은장도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그가 죽이려 했던 망나니 소교주 팽지혁의 목을 베지는 못했지만, 어젯밤 그의 머리맡 탁자 위에 자신의 진짜 정체와 그동안의 암살 공작을 낱낱이 기록한 ‘자폭성 고백록’을 남겨두지 않았던가.


그 편지를 읽는 순간, 팽지혁은 배신감에 피를 토할 것이고 가주 팽자천은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전 강호에 자신을 향한 철전지원수의 추격령을 내릴 터였다. 그렇게 되면 황실에서 내린 수석 경호원 임명은 자연스럽게 무산될 것이고, 자신은 추격자들을 따돌리며 남쪽 따뜻한 시골로 내려가 신분을 세탁하면 그만이었다.


‘만두 가게…… 온돌방에 누워 귤을 까먹으며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고기만두를 빚는 소박한 노후. 오직 은퇴 자금 오백 냥만을 바라고 달렸던 내 살수 인생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는구나.’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하북성과 산동성의 경계를 가르는 거대한 석조 경계 비석이 희뿌옇게 모습을 드러냈다. 저 선만 넘으면 하북팽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무혁은 허리의 통증을 내력으로 억누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흑야보법(黑夜疾風步)의 신형이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아지랑이처럼 소리 없이 흔들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아앗!


경계 비석 너머, 어두운 숲속 깊은 곳에서 기이한 바람 소리와 함께 수십, 수백 개의 불빛이 동시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무혁의 전신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횃불?’


하나가 아니었다. 숲 전체를 붉게 물들일 정도로 거대한 횃불의 무리였다. 그 불빛들은 일정한 대열을 갖춘 채, 무혁이 서 있는 경계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좁혀오고 있었다.


무혁은 본능적으로 기척차단술(氣岾遮斷術)을 극성으로 전개하며 주변 소나무 그늘 뒤로 신형을 숨겼다. 손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설마 팽가의 경비대가 벌써 내 탈출을 눈치채고 국경에 포위망을 친 건가? 하지만 어떻게 내 도주 경로를 이렇게 정확히 예측한 거지?’


그가 의문에 휩싸여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던 찰나, 횃불 무리의 선두에서 뼛속까지 익숙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웅장한 통곡 소리가 협곡 전체를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형니이이이임————!!! 형님아아아아아————!!!”


“……컥?!”


무혁은 하마터면 숨 쉬는 법을 잊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안개를 뚫고 나타난 횃불 대열의 맨 앞에는, 화려한 비단 장포를 풀어헤친 채 머리를 산발한 팽지혁이 말 위에 타서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가주 팽자천이 이끄는 팽가의 정예 무사 이백 명, 그리고 성수현 관아의 포교들과 현령, 심지어 하북성 전역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백성들이 괭이와 횃불을 든 채 거대한 인파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형님! 어디 계십니까! 나를 위해 홀로 그 차가운 황궁의 늪으로 걸어가시려는 형님의 고결한 뒷모습을 내가 어찌 모른 척하겠습니까!”


팽지혁은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경계 비석 앞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소나무 뒤에 숨어 있던 무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황궁의 늪? 내가 지를 위해 걸어갔다고? 뭔 개소리야, 난 도망친 건데!’


무혁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사냥개 덕구가 코를 킁킁거리며 수풀 속으로 달려오더니 무혁의 장포 자락을 물고 꼬리를 흔들며 밖으로 끌어당겼다. 영물급 후각을 지닌 덕구의 방해로 인해 무혁의 완벽했던 기척 차단이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아! 저기 계신다! 하북의 은밀한 구원자, 강 대장님이 저기 계신다!”


백성 중 한 명이 소리를 지르자, 수천 개의 횃불이 일제히 무혁이 서 있는 소나무 그늘을 비추었다.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리는 무혁의 앞으로, 팽지혁이 무릎으로 기어와 그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통곡했다.


“형님! 이 못난 아우를 위해 어찌 그런 가슴 아픈 충성 유서를 남기시고 홀로 떠나려 하셨습니까!”


지혁은 품속에서 침과 흙먼지에 절어 꼬깃꼬깃해진 종이 조각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무혁은 그 종이를 본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어젯밤 자신이 살의를 담아 적어둔 고백 편지였다. 하지만 원래 커다란 서화지였던 편지는 간데없고, 오직 덕구의 이빨 자국과 침에 절어 사방이 찢겨 나간 손바닥만 한 조각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 찢겨진 종이 조각 위에 남은 글자들은 기가 막히게도 다음과 같았다.


[나는…… 평생…… 팽지혁을 위해…… 목숨을 바쳐…… 수호하겠다…….]


“……!!”


무혁은 떨리는 눈빛으로 바닥에 누워 꼬리를 흔드는 덕구를 바라보았다. 덕구는 마치 ‘나 잘했지?’라고 말하는 듯한 맑은 눈망울로 무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똥개 새끼가……!’


무혁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덕구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자신이 적어둔 [나는 흑월루의 살수다], [너를 죽이려 침투했다], [낙석과 독약은 살인 덫이었다]라는 핵심 고백 단어들은 덕구의 위장 속으로 맛있게 소화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주 팽자천 역시 호랑이 같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무혁의 어깨를 굳게 잡았다.


“무혁아! 내 너의 깊은 뜻을 어찌 모르겠느냐! 황실 내부가 사파와 반란군의 음모로 가득 찬 험난한 늪임을 알고, 우리 가문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충성 유서’만을 남겨둔 채 홀로 경도로 향하려 했던 너의 그 고결한 의리……! 이 팽자천, 평생 무림에서 수많은 의협을 보았으나 너처럼 숭고한 영웅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닙니다, 가주님. 오해하십니다. 저는 진짜 도망치려 한 겁니다! 이 보따리를 보십시오! 밤중에 기어 나간 도둑이라니까요!”


무혁은 등 뒤의 짐보따리를 흔들며 절규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의 절규를 듣고 더욱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오오! 보아라! 가문의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스스로 비상 식량과 누더기 옷만을 챙겨 떠나시는 저 청렴한 모습을!”


“스스로를 도둑이라 낮추며 공을 탐하지 않는 저 겸손함이라니! 진정 하북의 살아있는 신선이시로다!”


주민들이 일제히 땅에 머리를 찧으며 절을 올리자, 무혁은 극심한 인지부조화로 인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세상의 거대한 긍정 필터링은 그의 악의와 비겁함을 숭고한 희생으로 세탁해 버리고 있었다.


그때, 횃불 대열의 뒤편에서 장엄한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초호화 황금 마차가 천천히 다가왔다.


마차의 문이 열리며, 무혁의 독차를 마시고 전신 마비와 통풍이 기적적으로 완치된 황실 사신 조태강이 화려한 비단 관복을 펄럭이며 걸어 나왔. 그의 눈동자 역시 무혁을 향한 광적인 존경심으로 이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강 대장! 황제 폐하께서 그대의 그 눈물겨운 충성심과 예방 지략을 전해 들으시고 밤잠을 설치며 기뻐하셨소! 제국 최고의 전략가이자 주치의인 그대를 모시기 위해, 황실 비전의 방어 결계가 장치된 초호화 황금 마차를 친히 보내셨소!”


조태강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제국의 교지를 높이 들어 올렸다.


“하북의 구국의 대전략가 강무혁을 황실 수석 경호원 겸 어의(御醫)로 임명하노니, 당장 마차에 오르라!”


“싫습니다! 안 갑니다! 전 만두를 빚을 겁니다!”


무혁은 최후의 발악을 하며 뒤로 도망치려 흑야보법을 전개했다. 발끝에 내력을 싣고 숲속 어둠 속으로 도약하려던 바로 그 순간.


아뿔싸.


비무 부작용으로 뒤틀려 있던 허리와 골반의 요통이 상상을 초월하는 격통이 되어 그의 전신을 강타했다.


“끄아악!”


무혁은 비명을 지르며 공중에서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허리를 감싸 쥔 채 바닥에서 뒹구는 그의 비참한 모습은, 주변 무사들의 눈에는 전혀 다른 신화적인 행보로 비쳐졌다.


“보아라! 강 대장님이 황실의 부름에 너무나 감격하여, 황궁이 위치한 경도를 향해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예법으로 절을 올리고 계신다!”


“오오! 저 뼈가 부러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황실을 향한 예법을 잃지 않는 충성심이란!”


김 대장과 팽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와, 바닥에서 요통으로 신음하는 무혁을 조심스럽고도 정중하게 번쩍 들어 올렸다. 그들은 마치 위대한 성인의 성체를 운반하듯, 무혁을 황금 마차 내부의 아늑한 비단 시트 위에 부드럽게 안치시켰다.


쿵!


마차의 묵직한 청동 문이 닫히는 순간, 황실 비전의 방어 결계가 활성화되며 외부와의 모든 물리적 통로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내부에서는 결코 열 수 없는, 황실 최고의 안전실이자 보이지 않는 감옥이었다.


무혁은 푹신한 비단 쿠션에 파묻힌 채, 허리의 통증과 정신적 탈진으로 인해 초점 없는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팽지혁이 눈물을 흘리며 무혁이 남겨둔 백옥 은장도를 허공에 흔들고 있었다.


“형님! Gyeongdo는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는 늪이지만, 형님의 그 천재적인 지략과 방어술이라면 반드시 살아남으실 겁니다! 가문의 은장도를 품에 품고 제국의 방패가 되어 주십시오! 하북팽가는 영원히 형님의 뒤를 지키겠습니다!”


저 멀리 울창한 버드나무 아래, 하녀 복장을 한 채 이 모든 어처구니없는 영웅 탄생극을 지켜보던 여동생 강무희의 모습이 보였다. 무희는 황금 마차에 갇혀 넋이 나간 오빠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오른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오빠…… 진짜 살수 가문의 수치다, 수치야…….’


무희의 깊은 한숨 소리가 안개 속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황금 마차는 거대한 바퀴를 굴리며 제국의 수도 경도(Capital)를 향해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무혁은 창밖의 풍경이 멀어지는 것을 묵묵히 응시했다.


하북성에서의 오백 냥짜리 은퇴 꿈은 이제 영구히 깨져버렸다. 자신을 기다리는 것은 일류 살수의 삶이 아닌, 온 나라의 칭송을 받는 황실 수석 경호원이라는 끔찍한 영광의 쇠사슬이었다.


하지만 무혁의 텅 비어 있던 눈동자 속에서, 이내 검붉은 살수 본연의 차가운 살기가 다시금 무섭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황실 수석 경호원이라고……?’


그는 품속의 은장도를 꽉 쥐며 이빨을 갈았다.


‘좋다. 황실 한복판이 얼마나 험난한 늪인지 내가 똑똑히 보여주마. 내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황제의 목을 내 손으로 직접 베어 천하대역죄인이 되겠다. 온 나라의 군대가 나를 처형하려 들 때, 그 혼란을 틈타 진짜 은퇴를 달성하고 말 것이다.’


마차가 어둠을 뚫고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질주하는 동안, 우주의 거대한 천도 억까 시스템은 비웃듯이 마차 지붕 위로 푸른 인과율의 실선들을 찬란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1단계의 막이 내리고, 황실 수석 경호원으로서의 지옥 같은 수호 연대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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