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대간첩 작전
하북팽가 본저의 안마당을 가득 메웠던 짙은 은색의 연막이 새벽바람을 타고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수십 자루의 횃불이 일제히 안마당을 밝히자, 철문을 부수고 들어온 김 대장과 호위무사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 기막힌 진식(陣式)을 보아라……!”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검은 가죽 옷을 입은 혈린교의 정예 자객 철호와 그의 수하들이 흑랑와이어의 은빛 실선에 옭아매어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연막탄의 유독 가스에 취해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거미줄에 걸려 숨이 끊어진 벌레 떼와 같았다.
그리고 그 기괴한 포획망의 중심에, 흙먼지와 그을음을 뒤집어쓴 강무혁이 서 있었다. 무혁의 등 뒤에는 야반도주를 위해 바리바리 싸 놓은 짐보따리가 단단히 메여 있었고, 그의 얼굴은 계획이 완전히 파탄 난 것에 대한 깊은 슬픔과 분노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김 대장의 눈에 비친 무혁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자객들이 도망칠 통로를 완벽하게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철문을 잠그고, 연막을 피워 적들의 시야를 가린 뒤 소리 없이 제압하시다니! 대장님, 진정 가문을 구한 신의 방패이십니다!”
‘아니라고, 이 머리에 근육만 찬 자식아! 난 저 자객 놈들이 지혁이를 납치해 가도록 도우려고 연막탄을 던지고 문을 잠근 거란 말이다!’
무혁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허리와 골반을 찌르는 극심한 요통 때문에 소리를 지를 힘조차 없었다. 진짜 자객들이 팽지혁을 납치해 가야 자신이 호위 실패로 파직당해 은퇴할 수 있었는데, 도주를 돕기 위해 던진 연막탄이 자객들을 통째로 마비시켜 버렸으니 이보다 더한 억까가 어디 있겠는가.
그때, 횃불의 거대한 대열을 이끌고 장원의 가주 팽자천과 황실 사신 조태강이 안마당으로 들이닥쳤다.
“무혁아! 안마당에서 폭음이 들려 달려왔거늘, 이게 무슨 일이냐!”
팽자천이 거구의 신형을 날려 무혁의 앞으로 착지했다. 그의 매서운 호랑이 같은 눈빛이 바닥에 쓰러진 철호 일당과 그들을 둘러싼 흑랑와이어 장막을 훑었다. 옆에 서 있던 황실 사신 조태강 역시 기적적으로 완치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며 안광을 번뜩였다.
조태강은 바닥에 기절한 자객의 장포 자락을 젖혀 그들의 품속에 숨겨져 있던 혈린교의 붉은 밀표를 발견하고는 크게 경악했다.
“이, 이들은 사파의 거물 집단인 혈린교의 정예 자객들이 아니오! 팽 가주, 가문 내부에 이런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었다니!”
팽자천의 안색이 순식간에 붉게 가라앉았다. 가문의 치안이 뚫린 것에 대한 분노였으나, 이내 그의 시선이 짐보따리를 멘 채 꼿꼿이 서 있는 무혁에게 닿자 깊은 감격의 빛으로 뒤바뀌었다.
“무혁이 너는…… 이들이 침투할 것을 미리 알고 홀로 이곳에서 매복하고 있었던 것이냐?”
무혁은 밀려오는 현타를 참아가며, 어떻게든 이 영웅 대접을 거부하고 가문에서 쫓겨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차갑고 서늘한 살기를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가주님, 오해하셨습니다. 소직은 가문을 수호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제 등 뒤의 보따리를 보십시오. 저는 그저 가문의 보물을 훔쳐 밤중에 야반도주하려던 천한 도둑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당장 저를 지하 감옥에 가두고 법에 따라 처벌해 주십시오.”
무혁은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자백이라 확신했다. 스스로 도둑이라 자인했으니, 아무리 팽자천이라 해도 자신을 파직하고 내쫓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나 무혁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의 영혼에 문신처럼 새겨진 ‘천도정화의 대행자’라는 기이한 인과율의 저주를 말이다.
무혁의 자백을 들은 황실 사신 조태강의 눈동자가 일순간 크게 떨리더니, 이내 온몸을 부르르 떨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오오……! 이 어찌 눈물겨운 대간첩 작전이란 말인가!”
“예?”
무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조태강은 눈물을 훔치며 무혁의 어깨를 굳게 잡았다.
“강 대장! 그대의 그 깊은 충의를 내가 어찌 모르겠소! 그대는 가문 내부에 숨어든 혈린교의 간첩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스스로 ‘도둑’의 누명을 쓰고 짐보따리를 메어 적들을 방심하게 만든 것이 아니오! 적들이 그대의 방심한 모습을 보고 침투하는 순간, 일부러 철문을 잠그고 연막을 피워 적들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한 뒤 일망타진하는 ‘고도의 대간첩 심리전’을 펼치신 것이 틀림없소!”
“아니, 진짜 훔치려고 한 건데요.”
“허허! 끝까지 자신의 공을 숨기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악명을 자처하다니! 이 조태강, 평생 황실에서 수많은 책사들을 보았으나 강 대장처럼 고결하고 치밀한 구국의 대전략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소!”
옆에 있던 가주 팽자천 역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무혁의 손을 굳게 쥐었다.
“무혁아! 내 너의 그 깊은 뜻을 오해하고 너를 그저 일개 호위무사로만 대하려 했다니, 이 아비가 부끄럽구나! 너의 그 서늘한 살기와 한숨은, 가문 내부에 암약하는 간첩들을 솎아내기 위한 고독한 책사의 고뇌였거늘!”
‘제발 그만해, 이 미친 인간들아…….’
무혁은 속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싶었다. 자신이 저지른 절도와 도망 공작이, 황실 사신과 가주의 뇌내 필터를 거치자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반간계(反間計)’로 완벽하게 세탁되어 버린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침실 안쪽에서 두꺼운 비단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던 팽지혁이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지혁은 마당에 쓰러진 자객들과 무혁의 그을린 얼굴을 번뜩이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다는 듯 왈칵 눈물을 쏟으며 무혁에게 달려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형님! 흑흑, 형님! 떠나시는 마지막 밤까지 이 못난 아우를 지키기 위해 홀로 사투를 벌이셨단 말입니까! 저는 그것도 모르고 침대에서 코를 골며 잠이나 자고 있었다니, 이 아우의 대가리를 깨부수어 주십시오!”
“지혁아, 제발 이거 놓고 말해라. 내 허리가 부러질 것 같구나.”
무혁은 요통 때문에 실제로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신음했으나, 지혁은 그 신음소리마저 ‘자객들과 싸우다 입은 영광스러운 내상’으로 오해하며 더욱 서럽게 울부짖었다.
지혁은 자신의 허리춤을 뒤적이더니, 은과 백옥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작은 단도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하북팽가의 시조 대부터 가문 직계 후손들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가문 최고의 보물, ‘팽지혁의 은장도’였다.
“형님! 이 은장도는 제 성인식 날 아버님께 받은 가문 직계의 증표이자 제 목숨과도 같은 물건입니다! 형님이 제 곁을 떠나 황실로 가실지라도, 이 아우의 영혼은 늘 형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이 은장도를 받아주십시오!”
지혁은 눈물을 흘리며 은장도를 무혁의 손에 강제로 쥐여주었다.
무혁은 손바닥에 닿는 백옥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멍하니 은장도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가문의 직계 명령권이 담긴 신표이자,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팽지혁과의 끈끈한 의리를 천하에 증명하는 거대한 도덕적 사슬이었다.
‘내가 왜 이 쓰레기 같은 장식용 은장도 때문에 황실로 끌려가야 하는가…….’
무혁의 눈동자가 깊은 좌절감으로 흐려졌다. 은퇴 자금 오백 냥을 벌어 조용히 사라지려던 그의 소박한 꿈은, 이제 제국 최고의 명예라는 화려한 감옥 속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황실 사신 조태강은 엄숙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황금빛 비단으로 감싸인 붉은 교지를 꺼내 들었다.
“하북의 은밀한 구원자이자 구국의 대전략가인 강무혁은 들으라!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그대를 제국 황실의 수석 경호원(황실 수석 경호원)으로 임명하노라! 그대의 그 천재적인 선제 방어 전술로 황실의 안위를 지켜다오!”
무혁은 차마 교지를 거절하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쳐 들었다. 여기서 억지로 거절했다간 황명 거역죄로 가문 전체가 멸문당할 터였고, 그렇게 되면 가문이 망해 자신의 은퇴 자금 수령 계획마저 영원히 파탄 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일단 교지를 받는 척하고, 오늘 밤 완전히 야반도주하여 신분을 세탁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무혁은 이 빠진 단검처럼 서늘하고 피곤한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솔들은 그의 어두운 표정을 ‘황실의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충신의 비장함’으로 오해하며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 하북팽가 본저의 거대한 정문 밖에서 장엄한 말방울 소리와 함께 웅장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실에서 보낸 화려한 황금빛 수송 마차가 횃불 불빛을 받으며 장원 정문 앞에 대기하는 모습이 안마당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사신 조태강이 인자하게 웃으며 무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강 대장, 황실의 마차가 이미 도착했소. 내일 아침 진시(오전 7시~9시)에 경도로 출발할 예정이니, 오늘 밤은 가솔들과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나누며 편히 쉬도록 하시오.”
무혁은 멀리 서 있는 황금 마차를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일 아침이면 황실이라는 거대한 감옥으로 끌려간다.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은 오직 오늘 밤, 단 하룻밤의 야반도주 기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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