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극을 설계하다
악양으로 가든, 남해로 가든, 강무혁의 평생의 꿈은 오직 하나였다. 가마솥에서 모락모락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작고 조용한 만두 가게의 주인이 되는 것. 피비린내 나는 살수 업계를 떠나 온돌방에 누워 귤이나 까먹는 소박한 은퇴 생활.
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를 기필코 착한 놈으로 만들려 날뛰는 천도(Heavenly Dao)의 저주가 잔인했다.
“아이고, 내 척추뼈가…… 완전히 뒤틀렸구나.”
무혁은 신음하며 허리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전날 황실 사신 조태강을 독살하려다 도리어 그의 전신 마비를 완치시키는 황당한 기적을 일으킨 후폭풍이었다. 독약을 먹였더니 통풍이 나아 춤을 추던 사신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이가 갈렸다. 게다가 비무 도중 날아오는 독침을 피하겠다고 몸을 기괴하게 꺾어댔던 탓에 골반과 척추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조태강이 눈물을 흘리며 쥐여준 황실 수석 경호원 교지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이대로 짐을 싸서 경도로 압송당한다면, 평생 황실의 감시망에 갇혀 경호 노예로 썩어야 할 판이었다.
스스슥.
그때, 별채 집무실의 창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하녀 복장을 한 날렵한 인영이 스며들었다. 무혁의 의동생이자 흑월루의 동료 살수인 강무희였다. 그녀는 책상 위의 화려한 교지를 보더니 얄밉게 입꼬리를 올렸다.
“축하해, 오빠. 제국 최고의 약선이자 황실 보디가드로 임명된 소감이 어때? 은퇴 자금 오백 냥 벌려다가 제국의 수호신이 되기 일보 직전이네?”
“조용히 해라, 무희야. 지금 내 속이 타들어 가다 못해 재가 되고 있으니까.”
무혁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자, 무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찻상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이대로 황궁으로 끌려갈 거야? 황제 폐하 등 뒤에서 와이어라도 감아드릴 셈이야?”
“그럴 리가 있겠느냐. 황실로 가기 전에 이 하북팽가에서 확실하게 불명예 퇴출을 당해야만 한다. 가주 팽자천이 나를 보면 치를 떨며 당장 장원 밖으로 내던지고 싶을 만큼 끔찍한 실책을 저질러야 해.”
무혁의 눈동자에 음흉하고 서늘한 살수 고유의 안광이 스쳤다. 그는 품속에서 만두 모양으로 깎아둔 나무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파직(Banishment)을 유도할 가장 완벽한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호위무사로서의 신용을 완전히 잃는 것. 바로 소교주 팽지혁을 납치당하게 방치하는 거지.”
무희의 고양이 같은 눈망울이 흥미롭다는 듯 반짝였다.
“가짜 납치극이네?”
“그렇다. 오늘 밤, 네가 사파 자객 복장을 하고 팽지혁의 침실로 침투해 놈을 납치해라. 나는 적당히 싸우다 패배해 기절한 척 연기할 테니. 수석 호위무사가 침실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소교주를 납치당하게 놔두었다면, 가주가 나를 가만두겠느냐? 당장 목덜미를 잡고 장원 밖으로 내던지겠지.”
“그럼 납치한 소교주는 어떻게 해?”
“내가 미리 정원 담벼락 밑에 파놓은 개구멍 탈출술 구덩이 있지? 숲속 깊은 곳에 있는 그 비밀 구덩이에 소교주를 안전하게 가두어두는 거다. 내가 가문에서 파직당해 쫓겨나는 즉시, 너와 접선해 은퇴 자금을 챙겨 남쪽으로 도망친 뒤 소교주의 위치를 편지로 흘려주면 끝이다.”
무희는 오빠의 치밀하고도 비겁한 탈출 계획에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살수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보디가드 짓도 오늘로 끝이네. 오늘 밤 삼경, 내가 사파의 검은 복면을 쓰고 침실로 갈 테니 준비나 잘해 둬.”
***
깊은 밤, 삼경(오전 12시 경).
팽지혁의 침실 내부는 은은한 촛불만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화려한 비단 이불을 덮은 팽지혁이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지혁은 침실 문앞에 꼿꼿이 서 있는 무혁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형님…… 내일이면 황실로 떠나신다니 이 아우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제국의 안위를 위해 몸을 바치시는 형님의 그 숭고한 충성심을 제가 어찌 막겠습니까.”
‘난 그냥 만두 가게 차리러 도망치려는 거야, 이 멍청한 자식아.’
무혁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지만, 대외적인 과묵한 충신의 가면을 유지한 채 서늘하게 대답했다.
“소교주님, 밤이 깊었으니 이 따뜻한 차를 마시고 편히 주무십시오. 소교주님의 건강을 위해 제가 특별히 달인 약차입니다.”
무혁이 내민 찻잔 속에는 백년약방에서 몰래 훔쳐낸 강력한 마취 성분의 수면제 가루가 가득 녹아 있었다. 가짜 납치극이 진행되는 동안 팽지혁이 잠에서 깨어나 소리를 지르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팽지혁은 찻잔을 받쳐 들며 감격에 겨워 오열했다.
“오오! 떠나시는 마지막 밤까지 이 못난 아우의 위장을 걱정해 주시다니! 형님이 주신 차라면 설령 비소나 극독이 들어있다 한들 단숨에 마시겠습니다!”
‘실제로 독약을 처먹였을 때 위염이 완치되었으니 할 말이 없군.’
무혁은 쓰라린 안구건조증을 느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혁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정확히 삼 초 뒤, 그의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어…… 형님, 오늘따라 차가 아주…… 묵직하고…… 든든하……”
쿵.
팽지혁은 말을 맺지도 못한 채 베개 위로 고꾸라지며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내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우렁찬 코골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코끼리가 지나가도 깨지 않을 완벽한 가사 상태였다.
“성공이군.”
무혁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즉시 기척차단술(氣岾遮斷術)을 전개했다. 전신의 호흡과 체온을 주변 공기와 완벽하게 일치시킨 그는, 침대 바로 옆 어두운 소나무 병풍 뒤의 음영 속으로 소리 없이 몸을 감추었다. 이제 약속된 자경이 되면 무희가 창문을 열고 들어와 이 뚱뚱한 소교주를 포대자루에 담아 가기만 하면 끝이었다.
서걱.
정확히 자정이 되는 순간, 침실 왼쪽 창문틀이 아주 미세한 마찰음과 함께 소리 없이 열렸다. 달빛을 등지고 방 안으로 스며든 인영은 검은 야행복에 복면을 쓴 날렵한 체형의 자객이었다. 소매 틈새로 살짝 보이는 익숙한 고양이 눈망울. 무희였다.
무혁은 병풍 뒤에서 은밀하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수신호를 보냈다.
‘어서 저 돼지 같은 놈을 자루에 담아라. 나는 무기를 버리고 기절할 준비를 하마.’
무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로 다가가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스아앗!
무혁의 예민한 살수 감각이 침실 반대편, 즉 테라스 쪽 창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이질적인 바람의 파동을 감지했다. 그것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자연의 소리가 아니었다. 고도의 내력을 실어 소리를 죽인 기습 침투의 보법이었다.
‘……뭐지? 무희는 이미 들어왔는데?’
무혁이 경악하여 눈동자를 굴리는 순간.
쨍그랑!
테라스의 거대한 유리창이 요란한 파공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며 들이쳤다. 깨진 유리 파편이 달빛을 받아 은빛 은하수처럼 비산하는 가운데, 검은 복면을 쓴 거구의 사내와 세 명의 자객이 침실 안으로 사납게 난입했다.
그들의 전신에서 풍기는 음산한 마도 기운과 피비린내. 하북팽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혈린교의 사주를 받고 잠입한 부패한 관무사이자 진짜 자객, 철호(Cheolho) 일당이었다!
철호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팽지혁을 보더니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팽가의 망나니 소교주놈이 세상 모르게 자고 있구나. 놈을 생포해 혈린교 지하 제단으로 압송한다!”
철호가 소매 속에서 가시독이 촘촘히 박힌 거대한 마비 그물망을 꺼내 팽지혁의 머리 위로 사납게 던지려 했다. 진짜 납치극의 시작이었다.
병풍 뒤에 숨어 있던 무혁은 대가리가 깨질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왜 진짜 자객이 여기서 튀어나오는 거냐고! 저 새끼가 지혁이를 데려가면 가문이 진짜로 멸문당하잖아! 팽지혁을 죽이거나 가짜로 납치하는 건 오직 나와 무희의 몫이어야 해!’
무혁이 당황하여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 침대 옆에 서 있던 가짜 자객 무희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살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암기 투척술이 그녀의 손끝에서 폭발했다.
슝! 슝! 슝!
소매 속에서 사출된 세 자루의 날카로운 암영비도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예리한 은빛 궤적이 철호가 던진 마비 그물망의 인장 와이어를 정확히 스쳐 지나갔다.
파각!
강한 탄성을 받으며 날아가던 그물망이 허공에서 반으로 찢어지며 침대 아래 바닥으로 쓸모없이 흘러내렸다. 기습 효과의 완벽한 상실이었다.
철호는 자신의 그물이 찢어지자 경악하며 뒤로 한 보 물러섰다. 그의 매서운 눈동자가 침대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검은 복면의 자객, 즉 무희를 향했다.
“이, 이년은 누구냐?! 이곳에 우리 말고 다른 살수가 매복하고 있었다니!”
철호는 복면을 쓴 무희를 바라보며 이빨을 악물었다. 그의 머릿속 필터가 광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파의 야행복을 입고 있지만 무공의 기색이 예리하기 그지없다. 설마…… 하북팽가 놈들이 우리의 납치 계획을 미리 간파하고, 정예 살수를 자객으로 위장시켜 소교주의 침실에 숨겨둔 대간첩 방어책이란 말인가!’
철호의 전신에서 거칠고 음산한 사파의 살기(殺氣)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비열한 팽가의 개새끼들! 자객으로 위장해 우리를 낚으려 하다니! 당장 저년을 죽이고 소교주를 끌고 간다!”
철호가 허리춤에서 서늘한 마도 도검을 뽑아 들며 무희를 향해 돌진했다. 무희 역시 소매 속에서 수십 자루의 비도를 꺼내 들며 살수로서의 투기를 발산했다.
어두운 침실 한복판, 진짜 자객 철호와 가짜 자객 무희가 서로를 향해 비수를 겨눈 채 격돌하기 시작하는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
그리고 그 모습을 병풍 뒤 어둠 속에서 짐보따리를 든 채 지켜보던 강무혁은, 머리 뒤로 차갑게 흘러내리는 식은땀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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