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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정원 가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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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산선생의 붓끝이 비단 종이 위를 스칠 때마다, 강무혁의 명줄은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별채 집무실의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기산선생의 얼굴은 그야말로 종교적인 황홀경에 물들어 있었다. 먹을 듬뿍 묻힌 붓이 거침없이 백지에 획을 그을 때마다, ‘천재적인 예방 수사’, ‘신화경에 달한 유수허공보의 신법’, ‘제국 최고의 수석 경호원 적임자’ 같은 끔찍한 단어들이 무혁의 숨통을 조여왔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주 팽자천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망했다. 진짜로 망했어.’


무혁은 부서진 책상 잔해 옆에 선 채로 마른침을 삼켰. 전날 밤 독침을 피하느라 온몸을 기괴하게 꺾은 대가로 허리와 골반이 끊어질 듯 쑤셔왔지만, 그 육체적 통증은 앞으로 들이닥칠 정신적 재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실 사신이 도착해 저 추천서를 읽는 순간, 자신은 꼼짝없이 황궁이라는 제국 최고의 감옥으로 끌려가 평생 황태자의 목숨을 지키는 노예가 될 터였다. 일류 살수로서 누려야 할 자유와, 은퇴 자금 500냥을 모아 따뜻한 남쪽 시골에서 고기만두를 빚으며 평화롭게 살려던 소박한 꿈이 통째로 날아갈 판이었다.


“파직당해야 한다. 어떻게든 가주님이 나를 보면 치를 떨며 당장 이 장원 밖으로 내던지고 싶을 만큼 잔인무도한 폭군이 되어야 해.”


무혁은 어두운 안구건조증 서린 눈을 번뜩이며 결연히 다짐했다. 억지로 선한 척을 하려 하면 천도의 저주가 작동해 기적을 일으키니, 이번에는 대놓고 사악하고 불합리한 짓을 저질러 가문의 평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기로 작정했다. 마침 그에게는 가장 완벽한 제물이 있었다. 전날 밤, 자신의 압도적인 살기에 눌려 가문에 사설 경비대로 자원 입대한 뒷골목 건달들, 바로 흑살마웅과 50명의 흑호방 무리였다.


***


하북팽가 장원의 드넓은 뒷마당.


이른 아침의 서늘한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연무장 공터에 50명의 흑호방 단원들이 늠름하게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그들은 가문에서 지급한 푸른색 경비대 복장을 단단히 차려입고, 가슴을 당당히 편 채 수석 대장인 무혁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멧돼지 가죽 대신 팽가의 무복을 터질 듯이 껴입은 거구의 흑살마웅과, 소방주 마영이 비장한 표정으로 대기 중이었다.


저벅, 저벅.


안개 속을 헤치며 강무혁이 걸어 나왔다. 무혁의 손에는 가죽 채찍이 들려 있었고, 그의 눈 밑에는 만성 불면증과 억울함으로 인해 턱밑까지 내려앉은 짙은 다크서클이 음침하게 빛나고 있었다. 실패한 암살 계획과 황실 징집의 공포로 인해 속에서 끓어오르는 극심한 분노가 그의 전신에서 검고 무거운 살기가 되어 사방으로 뿜어졌다.


흑살마웅과 단원들은 그 무시무시한 살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침을 삼켰다.


‘오오…… 대장님의 저 서늘한 안광을 보아라! 역시 화경의 고수답게 가만히 서 계시기만 해도 기혈이 얼어붙는 듯한 기세를 뿜어내시는구나!’


무혁은 채찍을 가볍게 털며 차가운 목소리로 사자후를 토했다.


“네놈들, 오늘부터 내 밑에서 진짜 지옥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당장 삽을 들어라.”


“예, 대장님! 어떤 가혹한 훈련도 견뎌내겠습니다!”


흑살마웅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무혁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뒷마당의 드넓은 잔디밭을 채찍 끝으로 가리켰다.


“훈련이 아니다. 지금 당장 이 뒷마당 전체를 깊이 삼 장(丈)으로 파내라. 단 한 개의 도구도 쓰지 말고, 오직 손과 투박한 삽 한 자루만으로 지반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거다. 조금이라도 쉬는 자가 있다면 이 채찍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삼 장이면 무려 9미터가 넘는 깊이였다. 아무런 이유 없이 멀쩡한 장원의 뒷마당을 그 깊이로 파내라는 것은, 상식적인 무가에서 있을 수 없는 지독한 가혹 행위이자 불합리한 노역이었다. 무혁은 이들이 지쳐 쓰러지며 자신을 향해 원망을 품고, 가주에게 ‘강무혁 대장이 부하들을 학대한다’며 탄핵 서신을 올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무혁의 이 사악한 지시를 들은 소방주 마영의 눈빛이 기이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삼 장 깊이로 마당을 파내라고……? 잠깐, 팽가의 뒷마당은 지하 수로망과 가장 밀접하게 닿아 있는 취약 지대다. 대장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지시를 내리실 리가 없다! 아! 적들의 지하 침투 가능성을 염두에 두시고, 지반을 완전히 개간하여 지하 경계를 강화하려는 깊은 뜻이로구나!’


마영은 깊은 깨달음에 전율하며 흑살마웅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흑살마웅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감격에 겨운 얼굴로 무혁을 바라보았다.


“과연 대장님이십니다! 가문의 보이지 않는 취약점까지 파악하시고 저희를 훈련시키시다니! 당장 삽질을 개시하라!”


“오오오!”


50명의 거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평화롭던 팽가의 뒷마당이 순식간에 공사판으로 변해갔다.


무혁은 이들의 광적인 충성심에 어이가 가출할 지경이었지만, 아직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었다. 그는 마영을 불러 세웠다.


“마영. 너는 당장 가문 내부의 모든 담벼락과 장벽을 찾아가라.”


“예, 대장님! 어떤 방어 진식을 구축할까요?”


“진식이 아니다. 창고에 있는 분홍색 페인트와 안료를 몽땅 꺼내와, 가문의 모든 장벽을 빈틈없이 분홍색으로 도배해라. 단 한 치의 틈도 남기지 말고 전부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거다.”


명문 무가인 하북팽가의 장엄하고 엄숙한 검은 돌벽을 촌스러운 분홍색으로 칠해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문의 조상들과 가주의 자존심을 짓밟고, 자신을 ‘미치광이 폭군’으로 낙인찍히게 만들 최고의 신의 한 수였다.


그러나 마영은 그 지시를 듣는 순간, 자리에 주저앉을 뻔한 충격을 받았다.


‘분, 분홍색……?! 아! 봄철이 되면 하북성 전역에 복사꽃과 매화가 만개한다! 장벽을 분홍색으로 물들이면, 꽃잎이 휘날릴 때 장벽의 경계선이 자연의 색과 동화되어 적들의 시각을 완벽하게 교란하는 최첨단 ‘위장색’이 되는 것이 아닌가! 대장님의 지략은 이미 자연의 섭리를 전술로 승화시키셨구나!’


마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장님! 자연과 동화되는 위대한 방어 위장술의 깊은 뜻을 전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온 장벽을 완벽한 분홍빛 방패로 만들겠습니다!”


“……뭐?”


무혁이 황당하여 입을 벌리기도 전에, 마영은 단원들을 이끌고 분홍색 안료 상자를 나르기 위해 폭풍처럼 달려갔다.


무혁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제자리에 굳어 서 있었다. 일이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자신은 폭군이 아니라 ‘미적 감각이 뛰어난 천재 조경가’가 될 판이었다. 극단적인 물리적 자극이 필요했다.


그는 땅을 파며 땀을 흘리고 있던 흑살마웅의 거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가죽 채찍을 높이 치켜들었다.


“느리다, 이 게으른 멧돼지 녀석!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거냐!”


찰싹!


무혁은 온 힘을 다해 채찍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채찍 끝이 흑살마웅의 두꺼운 어깨와 등덜미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채찍질을 가해 전신에 고통을 주고, 부하를 학대하는 잔인한 상관의 모습을 가주 팽자천에게 직접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타아앙!


묵직한 타격음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무혁은 일류 살수(은패)였다. 그의 전신 기혈 제어 능력과 공간 감각은 소수점 단위까지 정밀하게 단련되어 있었고, 마음속에 품은 살의가 강할수록 왜곡 보정이 일어나는 ‘살의역전결’의 저주가 이 완벽한 물리적 타격과 기막히게 얽혀 들어갔다.


무혁이 휘두른 채찍 끝은, 정확히 흑살마웅의 척추 양옆에 위치한 ‘대추혈(大椎穴)’과 ‘견정혈(肩井穴)’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강타했다. 이 두 혈도는 흑살마웅이 평소 사악하고 거친 마공인 흑웅공(黑雄功)을 무리하게 수련하다가, 내공의 찌꺼기가 쌓여 꽉 막혀 있던 치명적인 기혈의 폐색 지점이었다.


쿠우우우웅!


채찍이 닿는 순간, 무혁의 정밀한 타격 충격이 흑살마웅의 체내에 고여 있던 탁한 마기를 폭발적으로 때려 부수었다. 막혀 있던 혈도가 뚫리며, 체내의 기혈이 무서운 속도로 순환하기 시작했다. 온몸의 뼈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며, 따뜻하고 맑은 양기가 전신을 타고 요동쳤다.


“으…… 으아아아아!”


흑살마웅은 채찍을 맞은 채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입과 모공을 통해 검고 냄새나는 탁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내 그의 얼굴에 건강한 붉은 생기가 돌며, 꽉 막혀 있던 내공의 경지가 한 단계 도약하는 진동이 전신을 감쌌다.


무혁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드디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구나! 당장 가주에게 일러바쳐라!’


그러나 흑살마웅은 서서히 고개를 들어 무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험악한 눈가에는 고통이 아닌,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혈 정화의 황홀경과 깊은 감격의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 대장님……!”


흑살마웅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 비천한 놈이 마공의 부작용으로 평생 기혈이 막혀 절정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있었거늘…… 대장님께서는 단 한 번의 채찍질로 제 막힌 임독양맥을 완벽하게 뚫어주셨습니다! 저를 진정한 무인으로 단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가혹한 악역을 자처하며 제 기혈을 타격해 주신 그 깊은 자비심…… 이 은혜, 평생 뼈에 새기겠습니다!”


“……어?”


무혁은 채찍을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니야…… 난 그냥 네 어깨뼈를 부수려고 때린 건데…… 왜 기혈이 뚫리는 건데?’


옆에서 삽질을 하던 단원들이 그 광경을 보고 일제히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대장님의 눈물겨운 교육법에 감금당했습니다! 저희도 때려주십시오! 저희의 막힌 기혈도 채찍으로 정화해 주십시오!”


“이 미친 새끼들이 단체로 약을 처먹었나…….”


무혁은 극심한 정신적 탈진을 느끼며 채찍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제 채찍질마저 의학적 시술로 세탁되어 버렸다. 도저히 이들의 맹목적인 신뢰를 깰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발악으로, 이들을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곳으로 몰아넣기로 결심했다.


“시끄럽다! 당장 삽을 들고 성수현 지하 아쿠아덕트와 연결된 하수구 구역으로 들어가라! 그곳의 썩은 오물과 진흙을 단 한 장의 가죽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전부 긁어내는 거다! 냄새에 취해 기절할 때까지 멈추지 마라!”


성수현 지하 수로망과 연결된 팽가 하수구는 온갖 오물과 썩은 유황 냄새가 진동하는 지옥의 구역이었다. 무혁은 이들이 맨손으로 오물을 만지며 극도의 굴욕감을 느끼고, 가문에 대한 반발심을 키우기를 기대했다.


“존명! 대장님의 지하 경계 보강 특수 노역을 완수하겠습니다!”


마영과 단원들은 눈빛을 비장하게 빛내며, 주저 없이 하수구 구멍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대장님이 자신들을 극한의 환경에서 단련시키고, 가문의 지하 방어선을 점검하기 위해 이런 숭고한 임무를 주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


한 시간 뒤.


어둡고 퀴퀴한 지하 하수구 내부. 흑호방 무사들은 코를 찌르는 악취 속에서도 군말 없이 맨손으로 벽면의 묵은 진흙과 오물을 긁어내고 있었다. 마영은 횃불을 높이 든 채, 벽면의 균열을 꼼꼼히 살폈다.


“모두 열심히 긁어내라! 대장님께서 이 하수구를 청소하라고 하신 것은, 지하 수량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여 수압을 조절하고, 적들의 은밀한 침투 흔적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대장님의 안목을 흐리게 하지 마라!”


“예, 부대장님!”


단원들이 비장하게 소리치며 벽면을 긁어대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수구 벽면 구석의 낡은 벽돌 더미를 삽으로 강하게 긁어내던 한 단원의 손끝에 텅 빈 이질적인 진동이 전해졌다.


서걱, 툭.


“어……? 부대장님, 여기 벽면 안쪽이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뭐라구?”


마영이 급히 다가와 횃불을 비추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하수구 화강암 벽이었으나, 무혁의 지시대로 묵은 진흙 오물을 맨손으로 긁어내자 안쪽에 숨겨져 있던 인공적인 석조 이음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영은 침을 삼키며 쇠주먹 낭아선으로 그 벽면을 강하게 후려쳤다.


쿠우웅! 콰콰쾅!


벽면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며, 화강암 잔해 너머로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지하 공동(空洞)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수현 지하 하수구망의 공식 도면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은밀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비밀 지하 터널이었다.


“이…… 이것은…….”


마영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터널 안쪽의 어둠 속에서, 기괴한 붉은색 혈포를 입은 사내들이 횃불을 끈 채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하북팽가를 지하에서부터 폭파하기 위해 침투한 혈린교(Hyeollin-gyo)의 정예 자객들이었다. 터널 바닥에는 제국 군부에서 밀수된 수십 상자의 검은색 흑색 화약 통들이 촘촘하게 매설되어 격발 도화선이 연결되고 있었다.


“침입자다! 대장님의 예측이 정확하셨다! 적들이 지하 터널을 통해 가문 지하에 화약을 매설하고 있었다!”


마영이 사자후를 토하며 도검을 뽑아 들었다.


“모두 돌격하라! 대장님을 위해 적들을 섬멸하라!”


“오오오!”


기혈이 뚫려 내공이 증진된 흑살마웅과 50명의 정예 단원들이, 멧돼지 같은 기세로 비밀 터널 내부로 들이닥쳤. 갑작스러운 하수구 벽면 붕괴와 괴물 같은 무사들의 난입에 당황한 혈린교 자객들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쇠몽둥이와 주먹에 맞아 줄줄이 뼈가 부러진 채 바닥에 뒹굴었다.


***


같은 시각, 장원 마당에 멍하니 서 있던 강무혁은 지하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진동과 비명 소리에 전신이 굳어졌다.


‘……설마 또냐?’


무혁의 등덜미를 타고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하수구 구멍을 통해 땀과 오물 범벅이 된 흑살마웅과 마영이, 포박된 혈린교 자객들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밖으로 기어 나왔. 그들의 뒤로는 흑호방 단원들이 지하 터널에서 끌어올린 거대한 나무 상자들을 줄줄이 마당으로 날라 쌓기 시작했다.


털썩, 털썩.


무혁의 눈앞에 쌓여가는 나무 상자들의 틈새로 시커먼 군용 흑색 화약 가루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양은 가문 장원 전체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가공할 규모였다.


그 소란을 듣고 장원 안채에서 가주 팽자천과 기산선생, 그리고 수백 명의 팽가 무사들이 횃불을 밝히며 뒷마당으로 단숨에 들이닥쳤.


팽자천은 마당 전체가 3장 깊이로 파헤쳐진 참혹한(?) 광경과, 사방의 장벽이 온통 분홍색 안료로 칠해진 기이한 풍경, 그리고 그 중앙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수십 상자의 화약 통들을 바라보며 턱이 빠질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이럴 수가…… 무혁아, 이것이 다 무엇이냐!”


팽자천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소리쳤다.


그 순간, 하수구 구멍에서 마지막으로 기어 나온 마영이 무릎을 꿇으며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가주님! 대장님의 천재적인 혜안이 가문을 구하셨습니다! 대장님께서는 사파의 무리들이 지하 수로를 통해 가문 지하에 대규모 화약을 매설하려는 음모를 미리 간파하시고, 저희에게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처럼 가장하여 뒷마당을 삼 장 깊이로 파내게 하셨습니다! 적들의 침투 터널을 정확하게 수직 타격하여 폭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영의 우렁찬 외침이 아침 안개를 뚫고 장원 전체에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게다가 장벽을 분홍색으로 칠하게 하신 것은, 지하 공사 도중 발생할 흙먼지와 소란을 적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변 자연 경관과 동화시키는 완벽한 ‘위장 전술’이었습니다! 대장님의 무서운 지략이 아니었다면, 오늘 밤 우리 하북팽가는 지하에서부터 흔적도 없이 폭사당해 사라졌을 것입니다!”


[천도(Heavenly Dao)의 억까 시스템이 작동하여 무혁의 가혹 행위와 굴욕 노동 지시가 ‘가문의 대폭발 참사를 사전에 완벽히 막아낸 구국의 선제 방어 공작’으로 강제 세탁되었습니다.]


“아아……!”


팽자천은 산더미처럼 쌓인 화약 상자들을 바라보며,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자식을 구하고 가문을 지켜낸 무혁을 향한 무한한 경외감과 뜨거운 눈물로 가득 차 흘러내렸다.


“무혁아…… 너는 진정 하늘이 우리 팽가에 내리신 절대적인 수호신이로구나! 가문의 멸망을 지하에서부터 막아내다니……!”


무혁은 먼지와 석회 가루를 뒤집어쓴 채 쌓여있는 화약 상자들을 바라보며, 깊은 영혼의 탈진을 느끼며 굳어버렸다.


자신은 단지 부하들을 학대해 파직당하려 했을 뿐인데, 왜 손에 든 채찍이 기혈을 뚫어 고수를 만들고, 냄새나는 하수구 청소 지시가 가문을 구한 위대한 구국의 대전략으로 둔갑하는가.


그의 등 뒤로, 우주의 푸른 인과율 실선들이 그의 새로운 직위를 축하하듯 찬란하게 번뜩이며 비웃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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