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제단의 붕괴와 구국의 대전략가
여섯째 날 밤, 자경(子境)의 깊은 어둠이 하북팽가의 장엄한 기와지붕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대기를 감싸는 밤바람은 유난히 차가웠고, 장원 외곽을 순찰하는 흑호방 단원들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만이 간간이 정적을 깨뜨릴 뿐이었다.
별채 집무실의 책상 위에 엎드려 단잠에 빠져 있던 강무혁은 뻑뻑한 눈발을 비비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만성 불면증과 안구건조증으로 인해 눈가가 타들어 가는 듯 아팠다. 그는 주머니에서 서역제 인공눈물을 꺼내 눈동자에 들이부었다. 시큰한 통증과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지자, 비로소 흐릿하던 시야가 맑게 개었다.
“……으음.”
무혁은 목을 좌우로 꺾으며 가볍게 신음했다. 뼈마디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맞춰졌다. 그가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을 때, 숯펜으로 끄적여 둔 ‘강씨 가문 만두 가게 내부 인테리어 설계안’ 옆에 낯선 붉은 가죽 주머니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주머니 내부를 열어보니 기하학적인 복잡한 선들로 가득 찬 가문의 지하 수로 지도와 함께, 정체불명의 암호 기호들이 가득 적힌 계약서 서신이 들어있었다. 무혁은 그 지도를 멍하니 응시했다.
‘이건 또 뭐야? 춘자가 청소하다가 어디서 쓰레기를 주워왔군. 그나저나 만두 찜기 환풍구 방향을 이쪽으로 내야 연기가 잘 빠질 텐데…….’
무혁은 자신이 그린 만두 도면의 환풍기 화살표들을 멍하니 매만졌다. 그 화살표들은 춘자가 가져온 지하 수로 지도의 ‘수압 제어 판막 조작 방향’과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겹쳐 있었다. 하지만 피로에 찌든 무혁의 뇌는 그 기막힌 우연을 깊이 분석할 여력이 없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가문 내부의 숨 막히는 경비망을 피해 완전히 야반도주하는 것이었다.
‘외부 담벽은 흑살마웅과 그 미친 멧돼지 같은 놈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개구멍마저 마영이라는 녀석이 초소로 만들었으니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도주로는 단 하나뿐이다.’
무혁의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지하 수로 지도의 한 줄기 푸른 선을 향했다.
‘성수현 지하 아쿠아덕트(지하 수로망).’
도성 전체의 하수와 지하수를 배출하는 이 복잡한 석조 수로는 가문 내부의 깊은 우물가 지하를 지나 성수현 외곽의 황량한 폐광 지대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어둡고 냄새나는 하수구였지만, 일류 살수 출신인 무혁에게 그깟 오물 냄새는 아무런 장애물도 되지 않았다. 오직 이 지긋지긋한 ‘수석 호위무사’라는 영웅의 사슬을 끊고, 은퇴 자금 500냥을 챙겨 평화롭게 만두를 빚으며 살 수만 있다면 지옥의 똥통이라도 기어 들어갈 기세였다.
무혁은 서둘러 검은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복면을 고쳐 썼다. 등 뒤에는 야반도주용 생필품과 은전 몇 푼이 든 짐보따리를 단단히 메어붙였다. 품속의 서늘한 흑철 단검의 감촉을 확인한 그는, 소리 없이 창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기척차단술(氣岾遮斷術)을 극성으로 전개한 그의 신법은 바람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했다. 푸른 경비복을 입은 흑호방 무사들이 횃불을 들고 마당을 순찰하는 찰나의 틈을 타, 무혁은 장원 후방의 폐우물가로 신속하게 접근했다. 낮에 정화되어 은은한 매화 향기를 풍기던 우물의 덮개를 열어젖히자, 축축하고 서늘한 지하의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무혁은 주저 없이 우물 안쪽의 낡은 철제 사다리를 타고 어둠 깊숙한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
지하 수로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장엄한 석조 구조물이었다. 성수현 관아의 건설 장인들이 수백 년 전에 구축한 아쿠아덕트는 거대한 화강암 벽면이 아치형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바닥에는 무릎 높이까지 차오르는 탁한 지하수가 거센 물살을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쯧, 냄새가 고약하군.”
무혁은 복면 위로 코를 찡그리며 물길을 거슬러 걸어갔다. 그의 목표는 수로 중간에 위치한 비상 배수용 차단 판막 지대였다. 그곳의 보조 제어 밸브를 열어 수량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 자신이 빠져나갈 폐광 방면의 배수관이 완전히 건조되어 흔적 없이 성수현 외곽으로 탈출할 수 있을 터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거대한 청동 톱니바퀴들과 쇠사슬이 얽혀 있는 수압 제어 판막 장치 앞에 도달했다.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붉게 녹슨 거대한 밸브 휠이 벽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무혁은 짐보따리를 고쳐 메고 밸브 앞으로 다가갔다.
“이걸 시계 방향으로 돌려서 수로를 차단하고 보조 배수관을 열어야 해.”
그는 밸브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었다. 끼이이익, 하는 쇳소리만 날 뿐, 수십 년 동안 굳어 있던 톱니바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녹슨 쇠가 완전히 들러붙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위쪽 장원에서는 가솔들이 팽지찬의 반역 서신을 발견하고 해독하느라 한창 소란을 피우고 있을 터였다. 만약 도망친 밀사의 흔적을 쫓아 지하 수로까지 수색대가 들이닥친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초조해진 무혁은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일류 살수로서 다져진 정순한 진기(眞氣)가 그의 양팔로 몰려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빛의 내경이 은은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열려라, 이 빌어먹을 고철 덩어리야!”
무혁은 이빨을 악물고 내력을 폭발시키며 밸브를 강제로 꺾었다.
쩌적! 콰과광!
그것은 정교한 기계 장치에 가해서는 안 될 가공할 만한 물리적 폭력이었다.
무혁의 손아귀 힘을 이기지 못한 청동 밸브의 고정 축이 부러지며 톱니바퀴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와 동시에, 수압을 일정하게 조절해 주던 핵심 제어 판막 장치의 철제 고정 핀이 무참하게 뜯겨 나갔다.
철컥! 투두두둑!
“……어?”
무혁이 굳어버린 순간, 지하 수로의 거대한 아치형 석벽 내부에서 기이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압 제어 장치가 파괴되면서 발생한 치명적인 수격 작용(Water Hammer)이었다. 갈 길을 잃은 수백 톤의 지하수와 도성의 하수가 역류하기 시작하며, 닫혀 있던 판막 벽면을 무서운 기세로 때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쿠궁!
석조 수로의 벽면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사방의 석벽을 타격했고, 그 충격파는 지하 수로와 얇은 암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던 거대한 공동(空洞)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 인접한 공동의 정체는, 바로 성수현 지하 폐광 깊숙한 곳에 숨겨진 혈린교 하북분타의 비밀 지하 제단이었다.
***
같은 시각, 횃불의 붉은 불빛이 음산하게 일렁이는 혈린교의 지하 제단.
붉은 혈포를 입고 해골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단 혈린교 하북분타주 야율극(야율극)은, 단상 위에서 광기에 가득 찬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는 혈린교의 정예 마도 무사 100명과 지부의 핵심 수뇌부 고수 30명이 무릎을 꿇은 채 비장하게 대기하고 있었다.
“지찬 도련님이 드디어 움직이셨다! 가문의 비밀 지하 통로가 열렸으니, 오늘 밤 하북팽가의 숨통을 끊고 하북성 전체를 우리 교의 피로 물들일 것이다!”
야율극이 혈린도를 치켜들며 사자후를 토했다.
“교주님을 위하여! 하북을 피로 물들여라!”
수뇌부 고수 30명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며 광적으로 포효했다. 제단 중앙의 대형 솥에서는 붉은 마공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기괴한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야율극은 가문의 도주로 지도를 바라보며 승리를 확신했다.
‘강무혁이라는 그 애송이가 아무리 날고 긴들, 지하 깊은 수로를 통해 기습하는 우리 교의 정예 대군을 막아낼 수는 없을 터! 오늘 밤 팽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야율극의 오만한 확신이 정점에 달한 바로 그 순간.
지이이잉————
제단의 단단한 화강암 바닥과 벽면이 기이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음? 지진인가?”
야율극이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비밀 제단의 우측 벽면이 거대한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며 붕괴했다. 그 균열 틈새를 뚫고 들어온 것은, 무혁이 판막을 파괴하여 발생한 수천 톤에 달하는 지하수와 하수의 거대한 역류 폭풍이었다.
“무, 물이다! 수압이 너무 강해!”
“벽이 무너진다! 대피해라!”
마도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려 했으나, 좁은 폐광 지하에서 수압 폭발로 터져 나온 물길은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수중 폭풍은 순식간에 제단 전체를 집어삼켰고, 물길의 강력한 파괴력은 제단을 떠받치고 있던 거대한 석조 기둥들을 차례로 타격했다.
쿠구구구궁! 콰과광!
“말도 안 돼! 이 수로의 판막은 관청의 기밀 장치로 잠겨 있었을 텐데, 어떻게 이 타이밍에 역류한단 말이냐!”
yul-geuk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그는 급히 내력을 끌어올려 극양의 마공인 ‘혈화신장(血華神掌)’을 펼치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대한 암석들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무혁의 파괴 공작이 불러온 수격 작용은 지하 광산의 지반 자체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광산의 천장을 지탱하던 대들보들이 차례로 꺾이며, 수만 톤의 흙더미와 바위들이 제단 위로 폭풍처럼 쏟아져 내렸다.
“끄아아아악!”
“살려줘! 기도가 막힌다!”
혈린교의 정예 고수 30명과 수뇌부들은 비명 한 자락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역류한 하수물과 무너져 내린 석회 흙더미에 깔려 순식간에 몰살당하기 시작했다. 야율극 또한 사방에서 조여오는 수만 톤의 수압과 흙더미에 짓눌려 마공의 기운이 완전히 흩어지고 말았다.
“강…… 강무혁…… 네놈이 정녕 우리를 가두기 위해 이 수로를 터뜨렸단 말이냐……!”
야율극은 흙더미 속으로 가라앉으며, 보이지 않는 무서운 적의 실체에 치를 떨었다. 자신들의 침공 경로를 미리 예측하고, 물길의 역류라는 기상천외한 ‘인공 지진 및 수중 격멸 진식’을 펼친 그 괴물 같은 수석 호위무사의 지략에 전율을 느끼며, 그는 의식을 잃어갔다.
***
“커헉! 퉤! 퉤!”
강무혁은 차가운 오물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 역시 판막이 파괴되면서 터져 나온 수중 폭풍에 휩쓸려 수십 장 거리를 팽이처럼 돌며 쓸려 내려왔다. 온몸이 하수물과 석회 가루로 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이었고, 소중하게 매만지던 암살용 흑랑와이어 릴 장치는 물길에 휩쓸려 어디론가 유실되고 없었다.
“콜록! 쿨럭! 빌어먹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무혁은 욱신거리는 허리를 짚으며 젖은 바닥을 기어갔다. 주변은 온통 무너진 돌더미와 흙탕물로 가득했다. 어두컴컴한 동굴 한구석에서 희미한 아침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수로 벽면과 광산 천장이 통째로 무너지며 지상과 연결되는 거대한 싱크홀 구멍이 뚫린 모양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그 구멍을 올려다보았을 때.
“……어?”
무혁의 전신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붕괴된 거대한 싱크홀 구덩이의 가장자리 위로, 수십 개의 횃불과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교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덩이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하나둘 시야에 들어왔.
하북팽가의 가주 팽자천(팽자천), 소교주 팽지혁, 장녀 팽지선, 그리고 화산파의 고수 백운도장과 정파 연합군의 무사 수백 명이 일제히 그 구덩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경악을 넘어, 인간이 신을 바라볼 때의 맹목적인 경외감과 감격으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 무혁아!!!”
가주 팽자천이 붉은 장포를 휘날리며 구덩이 아래로 몸을 날려 내려왔다. 그는 오물과 석회 가루로 범벅이 된 무혁의 어깨를 덥석 움켜잡으며, 장포 자락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굵은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너는 정녕…… 이 가문을 구하기 위해 홀로 이 어둡고 더러운 지하 수로로 기어 들어왔단 말이냐! 내 평생 수많은 전략가를 보았으나, 적의 침공 지반을 수압으로 흔들어 단 한 장의 칼날도 쓰지 않고 사파의 대군을 몰살하는 이런 가공할 지략은 생전 처음 본다!”
“……예?”
무혁이 황당하여 입을 벌리기도 전에, 뒤이어 내려온 백운도장이 흙더미 속에 파묻힌 채 신음하고 있는 혈린교 분타주 야율극과 30명 수뇌부의 시체들을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보십시오! 저 자는 혈린교 하북분타주 야율극이 아닙니까! 하북성 전체를 피로 물들이려 비밀 제단을 완성하고 대기하던 사파의 거두가, 강 대장님이 유도한 수중 대붕괴 진식에 걸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생포당했습니다! 이것은 무학의 경지를 넘어선, 천지자연의 도(道)를 부리는 무위전술(無爲戰術)의 극치입니다!”
“형님!!!”
팽지혁이 구덩이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무혁의 다리를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형님이 남기신 만두 도면의 화살표가 실은 이 수로의 파괴 각도를 뜻하는 비밀 전술서였다니! 지찬이 놈의 반역 서신을 가로채고 역으로 적의 본진을 수장시키신 형님의 그 깊은 뜻을…… 이 어리석은 아우는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형님은 진정 제국 최고의 수호신이십니다!”
“구국의 대전략가 강무혁!!!”
“하북의 살아있는 신장이시여!!!”
구덩이 위를 가득 메운 수백 명의 정파 연합군 무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며 사자후 같은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웅장한 연호 소리가 무너진 지하 동굴 전체를 흔들며 메아리쳤다.
무혁은 오물 묻은 흑철 단검을 손에 쥔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단지 삼엄한 감시를 피해 하수구를 통해 도망치려 했을 뿐이었다. 밸브가 녹슬어 뻑뻑하기에 힘으로 부쉈을 뿐이었고, 물길에 쓸려 가다 죽을 뻔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눈앞에는 사파의 비밀 제단이 완파되어 있고, 자신은 나라를 구한 ‘구국의 대전략가’가 되어 수천 명의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인가.
‘아아…… 천도여. 이 빌어먹을 억까의 저주는 진정 끝이 없단 말이냐…….’
무혁은 밀려오는 극심한 정신적 현타와 탈진을 이기지 못하고, 팽지혁의 통곡 소리를 감미로운 자장가 삼아 다시 한번 눈을 감으며 흙더미 위로 스르륵 쓰러졌다. 그의 등 뒤로, 우주의 푸른 인과율 실선들이 그의 새로운 ‘황실 수석 경호원’으로의 강제 승진을 예고하듯 찬란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