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가 된 자객과 신의의 명성
우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신광과 상쾌한 매화 향기가 새벽녘의 팽가 장원을 가득 메우자, 저 멀리서 수십 개의 횃불이 무혁이 서 있는 우물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붉은 장포를 휘날리며 선두에서 달려오는 이는 하북팽가의 가주, 팽자천이었다. 그의 뒤로 김 대장을 비롯한 수십 명의 정예 호위무사들이 검을 뽑아 든 채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혁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팽자천의 우렁찬 목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우물가에 도착한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평소 유독 가스와 썩은 흙탕물로 가득해 가솔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폐우물이, 지금은 은색과 황금빛이 감도는 신비로운 영천수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물 주변을 감도는 향긋한 매화 향기는 가슴속 막힌 기혈을 단숨에 뚫어줄 것처럼 상쾌했다.
강무혁은 오른손에 쥔 텅 빈 가죽 주머니를 슬그머니 소매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얼굴은 짙은 다크서클과 피로, 그리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현타로 얼룩져 있었다.
‘독약을 버렸는데 왜 우물이 정화되는 건가. 천도 이 미친 녀석들이 나를 기필코 착한 놈으로 만들려고 작정을 했구나.’
무혁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지만, 수십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경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급히 표정을 수습해야 했다. 그는 서늘하고 과묵한 살수 특유의 목소리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 새벽 순찰 중 이 폐우물 주변에서 기이한 사파의 기척을 감지했습니다. 우물 바닥에 고여 있던 사악한 마기가 가문 전체로 흘러들 위험이 있기에, 소직이 밤새 연구하여 조제한 정화 비방을 투입해 맥을 뚫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팽자천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무혁의 어깨를 부서져라 움켜잡았다.
“오오, 무혁아! 너는 가문의 식수원마저 지켜내기 위해 이 험한 새벽에 홀로 사투를 벌였단 말이냐! 이 폐우물의 물줄기가 사실 가문 중앙 우물과 연결된 지하 영맥의 시발점이었거늘,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팽가 가솔 전체가 사파의 독물에 중독될 뻔했구나!”
“대장님! 진정 하북의 은밀한 구원자이십니다!”
뒤에 서 있던 김 대장과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연호하기 시작했다. 무혁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인지부조화에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버린 것은 팽지혁을 일주일 동안 고통스럽게 죽이려던 실패작 극독 ‘만독칠야산’이었는데, 그것이 우물 속 유독 가스와 반응해 영천수로 변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 영천수를 마신 무사들이 “기혈이 뚫린다!”며 감격하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 가문을 탈출하기는커녕 꼼꼼한 경비망에 더 단단히 갇히게 생겼다.
바로 그 순간, 우물가 뒤편의 울창한 대나무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사사삭!
검은 야행복을 입은 자객 하나가 신형을 날려 담장 쪽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온몸에서 뿜어지는 마도 기운과 손등에 붉게 타들어 가는 독 상처. 바로 무혁의 독약 폐기물 폭발에 휘말려 부상을 입고 도망치려던 흑월루의 라이벌 살수, 독고추였다.
“자객이다! 놈을 잡아라!”
김 대장이 소리를 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으나, 독고추는 일류 살수답게 날렵한 경공을 펼치며 수풀 사이를 헤집고 빠르게 멀어졌다. 손등의 중독 부상 때문에 비틀거리면서도, 그의 도주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제발 도망쳐라, 독고추! 네가 도망쳐서 내 진짜 정체를 흑월루에 보고해야 내가 이 지긋지긋한 영웅 노릇을 그만두고 은퇴할 것 아니냐!’
무혁은 속으로 독고추의 도망을 필사적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천도의 저주는 무혁의 사소한 악의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독고추가 담장을 넘기 위해 정원 한구석의 잔디밭을 밟고 도약하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미끄덩!
“어어? 으아악!”
독고추의 발끝이 허공을 가르며 몸이 기괴하게 뒤로 자빠졌다. 잔디밭 바닥에는 무혁이 낮에 팽지혁을 대머리로 만들어 가문에서 강제로 은퇴(삭발 염의)시키려 몰래 발라두었던 강력한 독성 제모 약품이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점성이 강하고 미끄러운 제모 독물 구역을 하필이면 도망치던 독고추가 정확하게 밟고 미끄러진 것이었다.
쿵! 하고 바닥에 처박힌 독고추의 머리 위로, 그가 흘린 제모 약품과 우물가에서 튄 정화 영기가 기이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뿜어졌다.
치이이이익!
“아아악! 내 머리! 내 머리가 뜨거워!”
독고추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검은 복면이 벗겨짐과 동시에, 복면 아래에 숨겨져 있던 찰랑거리던 긴 머리카락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단 3초 만에 그의 풍성했던 머리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달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완전한 대머리(탈모) 몰골이 되었다. 머리피부 표면이 마치 거울처럼 매끄럽게 정화되어 번쩍이는 비주얼 쇼크였다.
“이, 이게 무슨 해괴한 무공이냐!”
달려오던 김 대장과 무사들이 그 엽기적인 광경에 멈칫하며 침을 삼켰다. 독고추는 엎어진 채 정원 연못 물에 비친 자신의 대머리를 보고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눈을 부릅떴다. 평생 살수로서 외모를 가꾸는 데 자부심이 강했던 그에게 머리카락 유실은 죽음보다 더한 굴욕이었다.
“내 머리…… 내 머리카락이 어디 갔단 말이냐! 강무혁! 이 비열한 배신자 새끼가 나를 대머리로 만들었다!”
독고추는 이성을 잃고 울부짖으며 무혁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댔다. 달려온 무사들이 사지를 붙잡아 그를 바닥에 짓눌렀지만, 독고추는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소리를 질렀.
“이놈들아! 속지 마라! 저 수석 호위무사라는 놈은 사실 흑월루의 일류 살수다! 팽지혁을 죽이러 온 암살자란 말이다! 품속을 뒤져봐라! 흑월루의 살수 패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 처절한 폭로에 무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살수로서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가문의 현경 고수인 팽자천의 분노를 사 즉사할 터였다. 무혁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때, 무혁의 뒤에 서 있던 마당쇠 칠두가 비장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대장님, 제게 맡겨주십시오!”
칠두는 바닥에 떨어진 독고추의 소지품 더미에서 검은 흑월루 살수 패를 발견하고 재빨리 가로챘다. 그리고는 팽자천과 무사들 앞에서 그 패를 양손으로 힘차게 부러뜨리며 소리쳤.
“가주님! 이 대머리 자객 놈이 우리 대장님의 명성을 시기하여, 가짜 흑월루 살수 패를 급조해 와 모함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의로운 대장님이 살수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칠두는 무혁의 암살 지시를 항상 방어 작전으로 오해해 실행하던 충직한(?) 트롤러답게, 이번에도 완벽한 타이밍에 증거를 인멸해 버렸다. 부러진 살수 패 조각은 정화된 우물물 속으로 던져져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팽자천은 대머리가 되어 미쳐 날뛰는 독고추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흠, 머리카락이 다 빠지더니 정신마저 놓아버린 모양이구나. 감히 우리 가문의 은인이자 하북의 은밀한 구원자인 무혁이를 모함하려 들다니. 여봐라! 당장 이 광인을 하북성 성수현 관아로 압송해라!”
“예! 가주님!”
무사들이 독고추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독고추는 끌려가면서도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며 무혁을 향해 눈을 부릅떴지만, 그의 번쩍이는 대머리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오히려 가솔들은 “대장님의 독성 제모 기술은 사파의 사악한 뇌파를 교란하는 고도의 호신술”이라며 수군거렸다.
무혁은 멀어져 가는 독고추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내 아까운 제모 약품…… 저걸 만드느라 만독곡에서 사흘 밤낮을 고생했는데, 엉뚱한 독고추 대가리 밀어버리는 데 다 써버렸잖아. 이제 팽지혁은 어떻게 대머리로 만들어서 은퇴시키지?’
그의 원대한 은퇴 계획은 또 한 번 기적의 구원담으로 둔갑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팽자천은 무혁의 처진 어깨를 툭툭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무혁아, 오늘 밤 네가 가문의 식수를 구하고 흉악한 자객까지 대머리로 만들어 제압했으니, 내 당장 성수현 관아에 연하장을 보내 네 공적을 제국 전역에 알리도록 하겠다! 하하하!”
무혁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달빛 아래 홀로 빛나는 정화된 우물물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등 뒤로, 천도의 푸른 인과율 실선들이 비웃듯이 은은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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