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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권조사의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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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 제303호 법정.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는 법관의 검은 법복 자락마저 얼려버릴 듯 차가웠다.


민지안은 법대(法臺) 중앙의 재판장석 우측, 우배석 판사 자리에 앉아 정면을 응시했다. 밤새 이어진 지독한 편두통과 불면증의 여파로 관자놀이가 깨질 듯이 아파왔지만, 그녀의 등은 자로 잰 듯 곧게 세워져 있었다. 안경 너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고 투명했다.


어제 성북동 송우석 교수의 서재에서 발견했던 10년 전 신문 스크랩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뺑소니 사고를 은폐하는 대가로 대법관 자리를 넘겨받았던 아버지 민창식의 추악한 침묵. 그리고 그 지옥 같은 진실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살인범의 제단에 올라선 첫사랑, 하진우.


‘나를 믿고 앞으로 가라.’


진우가 지난 공판에서 손가락 끝으로 보냈던 그 애절한 모스 부호가 지안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안은 허벅지 위에 놓인 두 손을 조용히 맞잡았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결의는 불꽃처럼 뜨거웠다.


피고인석에 앉은 하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푸른색 수의를 입은 그의 어깨는 쓸쓸하리만치 단정했고, 옆얼굴은 차갑게 조각된 대리석 같았다. 그는 지안 쪽으로는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오직 정면의 허공만을 응시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철저한 포커페이스가 오히려 지안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이상으로 피고인 하진우의 범행 자백과 물증의 일치 여부에 대한 검찰 측 의견을 마치겠습니다.”


공판 검사 백승현이 날카롭게 날이 선 목소리로 변론을 정리했다. 포마드로 정교하게 넘긴 머리와 각 잡힌 검사 수트가 그의 오만한 야망을 대변하는 듯했다. 백승현은 단상 위의 부장판사 강인호를 바라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피고인은 범행 일체를 자백했으며, 범행 당시 착용했던 가죽 장갑에서 피해자의 혈흔과 피고인의 DNA가 동시에 검출되었습니다. 이는 형사소송법상 자백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완벽한 보강 증거입니다. 더 이상의 불필요한 심리 조사는 사법 자원의 낭비일 뿐입니다. 재판장님, 검찰은 본 사건의 변론을 오늘로 종결하고, 피고인에게 사형에 처하는 빠른 선고를 구형하는 바입니다.”


‘사형.’


그 단어가 법정의 높은 천장을 때리자 방청석에서 나직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피고인석의 하진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목숨 따위는 이미 안개 속으로 던져버린 사람처럼.


재판장석에 앉은 부장판사 강인호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금테 안경 너머로 출세를 향한 조급한 탐욕이 번뜩였다. 청조회의 지령을 받아 하진우를 신속하게 살인범으로 낙인찍고 재판을 끝내려는 움직임이었다. 강인호가 의사봉을 쥐며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피고인이 자백했고, 보강 증거가 명백하므로 본 재판부 역시 검찰 측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다. 더 이상의 증거 조사 신청이 없다면, 오늘로 하진우 피고인에 대한 변론을 종결하고——”


“잠시만요, 재판장님.”


고요한 법정의 공기를 깨뜨린 것은 지안의 목소리였다.


마이크를 타고 흐른 차갑고 명징한 음성에 강인호의 의사봉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백승현 검사의 눈매가 험악하게 일그러졌고, 법정 한구석에 앉아 있던 속기사 조만수의 손가락이 자판 위에서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인호가 고개를 돌려 지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나직하지만 뼈가 있는 목소리가 지안의 귓가에 내리꽂혔다.


“민 판사, 지금 뭐 하는 건가? 합의부 내부에서 이미 신속 선고로 가닥을 잡았을 텐데, 신성한 법정에서 무슨 돌발 행동이지?”


지안은 강인호의 위압적인 눈빛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수사 기록철을 천천히 펼쳤다.


“본 우배석 판사는 검찰이 제출한 현장 검증 조서와 피해자 서현수 검사의 부검 감정서 사이에 중대한 물리적 모순이 존재함을 확인했습니다. 이를 규명하지 않고 변론을 종결하는 것은 형사소송법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모순이라니! 피고인이 직접 범행을 재연하고 서명날인까지 마친 조서다!”


백승현 검사가 단상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오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의 날카로운 안광이 지안을 꿰뚫을 듯 흘겨보았다.


“민 판사님의 지적은 이미 자백한 피고인을 어떻게든 구제해 보려는 사적 감정이 개입된 편파적인 억지에 불과합니다! 재판부의 중립성 의무 위반입니다!”


“사적 감정이라니요, 백 검사님.”


지안은 안경다리를 가볍게 치켜올리며, 준비해 둔 프리젠테이션 화면을 켰다. 법정 전면의 대형 스크린에 사체의 자창 각도 도표와 현장 검증 사진이 동시에 떠올랐다.


“수사 기록 제142페이지의 현장 검증 조서에 따르면, 피고인은 피해자의 정면에서 오른손으로 흉기를 쥐고 찔렀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국과수의 부검 감정서 제45페이지를 보십시오. 피해자의 복부에 남겨진 자창의 궤적은 우측 상단에서 좌측 하단으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형태입니다. 이는 전형적인 왼손잡이가 가해자일 때 발생하는 물리적 각도입니다. 오른손잡이인 피고인의 신체 조건으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궤적이지요.”


지안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형사소송법과 대법원 판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암기해 온 그녀의 천재적인 ‘순간 기억 복기력’이 법정 안에서 칼날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또한, 검찰이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범행 당시의 가죽 장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장갑 안쪽의 DNA는 피고인의 것이 맞지만, 겉면에 묻은 피해자의 혈흔은 응고 상태 분석 결과 사후 2시간이 지난 시점에 묻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이 가죽 장갑은 범행 현장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사후에 정교하게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극히 높다는 뜻입니다.”


법정 내부가 꿀 먹은 듯 조용해졌다. 방청석에 앉은 기자들의 펜대 움직임이 빨라졌고, 백승현 검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강인호 부장판사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책상을 거칠게 내리쳤다.


“민 판사! 그만하게! 자백이 있고 물증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배석 판사가 독단적으로 정황 증거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것은 월권이야! 당장 발언을 멈추고 변론 종결 합의에 서명하게!”


강인호의 고압적인 명령이 법정을 짓눌렀다. 지안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사법부 내부의 거대한 카르텔, 그 정점에 서 있는 대법원장 임대형의 그림자가 강인호의 등 뒤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숨 막히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진우는 영원히 차가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고, 10년 전 삼척의 안개 속에 묻힌 진실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 터였다.


지안은 심호흡을 하며 단호하게 일어섰다. 그녀의 검은 법복 자락이 허공에서 묵직하게 흔들렸다.


“대한민국 형사소송법 제294조에 따르면, 법원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검사나 피고인의 신청이 없더라도 직권으로 증거를 조사할 수 있습니다. 본 우배석 판사는 이 조항에 근거하여, 재판부의 이름으로 ‘직권 증거 조사’를 청구하는 바입니다.”


“뭐라고? 직권 증거 조사라니!”


강인호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백승현 검사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판사가 검찰의 기소를 신뢰하지 않고 독단으로 증거를 조사하겠다는 선언은, 사법 기득권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피고인의 자백과 검찰의 조서 사이의 중대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본 사건의 발생지이자 조작 의혹이 있는 강원도 삼척 용화해변 도로에 대한 ‘재판부 직권 현장 재검증’을 명령해 주실 것을 청구합니다.”


지안은 고개를 돌려 좌측 배석 판사석에 앉아 있는 신임 판사 이유리를 바라보았다.


이유리는 앳된 얼굴에 둥근 안경을 쓴 채, 사법부의 서슬 퍼런 위계질서와 선배 지안의 강직한 신념 사이에서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은 극도의 불안감으로 흔들렸고, 맞잡은 두 손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부장판사 강인호의 눈 밖에 나는 순간 자신의 판사 커리어가 끝장날 수 있다는 공포가 그녀를 지배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지안은 유리를 향해 따뜻하지만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유리 씨. 우리가 법대 위에서 맹세했던 그 법관 선서의 무게를 기억해요. 법과 양심 외에는 그 어떤 권력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어요.’


침묵의 눈빛 교환이 이어지는 찰나의 순간, 법정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강인호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이유리를 압박했다.


“이유리 판사, 자네도 이 터무니없는 직권 조사 신청이 합의부의 명예를 훼손하는 짓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우배석 판사의 독단적인 의견일 뿐이야. 합의부 전원일치 원칙에 따라 이 신청은——”


“아닙니다, 재판장님.”


이유리의 얇은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안에는 꺾이지 않는 젊은 법조인의 양심이 깃들어 있었다.


“본 좌배석 판사는…… 우배석 판사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검찰의 현장 검증 조서와 사체의 물리학적 각도 불일치는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의문점입니다. 법관의 양심에 따라,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직권 현장 재검증 명령에 찬성표를 던지겠습니다.”


“이유리!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강인호가 의사봉을 내팽개치듯 책상 위에 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합의부 3명의 판사 중 과반수인 2명이 찬성했다. 재판장인 강인호의 독단적인 제지 권한은 법률적으로 무력화되었다. 대한민국 형사소송법이 보장하는 배석 판사들의 독립적인 표결권이 사법 카르텔이 쳐놓은 졸속 선고의 장벽을 기습적으로 뚫어버린 순간이었다.


지안은 강인호의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단호하고 웅장한 어조로 최종 선포했다.


“합의부 과반수의 결정에 따라, 본 재판부는 피고인 하진우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해 삼척 용화해변 도로에 대한 재판부 직권 현장 재검증 기일을 지정합니다. 이에 따라 오늘 예정되었던 변론 종결을 취소하고, 다음 공판 기일을 현장 검증 이후로 전격 연기합니다.”


*쾅! 쾅! 쾅!*


지안의 단호한 선언과 함께 법정 내부가 물 끓듯 소란스러워졌다. 방청석의 기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달려 나갔고, 백승현 검사는 이빨을 부득 갈며 지안을 향해 매서운 저주의 눈빛을 보냈다. 지안은 사법부 내부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반역자 판사’로 낙인찍혀 직무 배제와 파면의 징계 위기에 처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피고인석의 하진우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늘 얼음처럼 차가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하진우의 얼굴에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단 한 번도 지안 쪽을 보지 않던 진우가 고개를 번쩍 들어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극도의 경악과 절박함으로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주먹을 쥔 그의 양손이 포승줄 아래에서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지안을 향한 절박한 거부이자, 무언의 비명이었다.


‘지안아, 안 돼…… 삼척으로 가선 안 돼. 그 안개 속으로 다시 들어가지 마.’


진우의 눈빛 속에 담긴 그 끔찍한 공포와 자신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애틋함이 유리창을 깨부수듯 지안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러왔다. 지안은 피고인석의 첫사랑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미안해, 진우야.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너를 구원할 차례야.’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정적 속에서, 지안과 진우의 시선이 차가운 법정 허공에서 팽팽하게 얽혀 들어갔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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