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지대는 없다
차가운 가을비가 메마른 아스팔트를 때리는 소리가 차창을 넘어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초동 법조타운의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로 번져나가며 음산한 안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민지안은 김태영 변호사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가방에 깊숙이 찔러 넣은 낡은 수첩을 손끝으로 가만히 더듬었다. 가죽 표지의 거친 질감이 손가락 끝을 자극할 때마다, 수첩 속에 적혀 있던 그 이름이 뇌리에서 붉은 낙인처럼 번뜩였다.
[한성그룹 후계자 한태성 부회장 - 3억 원 입금 확인]
지안의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10년 전 삼척의 안개 너머에 숨어 있던 거대한 악마의 그림자가 비로소 그 추악한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한성그룹의 서자이자 유명 기업인인 하진우를 살인범으로 만들기 위해 국선 변호사까지 매수해 졸속 선고를 유도하려 한 자가 이복형인 한태성 부회장이었다니.
백미러 너머로 희미하게 번지는 두 줄기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였다. 김태영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끈질기게 따라붙던 검은색 세단이었다. 지안은 운전대를 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지독한 편두통이 다시 밀려왔다.
10년 전, 자신이 강원도 삼척의 안개 낀 해안도로에서 차로 쳐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믿고 있는 서현수 검사. 그 비극적인 사고의 기억은 지안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붉은 낙인을 새겨놓았다. 자신이 사법 정의를 수호하려는 판사로서 진실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결국 자신의 지워진 범죄 기억과 마주하게 되어 스스로 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매 순간 목을 죄어왔다. 하지만 피고인석에서 자신을 향해 ‘나를 믿고 앞으로 가라’며 고교 시절 둘만의 비밀 수신호를 보내던 진우의 눈빛이 떠올랐다. 진우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살인범이라는 거대한 가짜 성벽 속에 갇혔다.
"도망치지 않아. 네가 나를 위해 인생을 던졌다면, 나 역시 내 법관의 명예를 걸고 진실을 끌어내겠어."
지안은 가속페달을 밟아 검은 세단의 추격을 따돌리며 서초동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심장의 요동은 멈추지 않았다.
공동현관을 지나 12층 복도 끝에 위치한 지안의 오피스텔 앞. 지문 인식 도어록에 손가락을 대자 띠리릭, 하는 건조한 기계음과 함께 철문이 열렸다. 오피스텔 내부의 공기는 서늘하고 적막했다. 판결문 서류더미와 법률 서적으로 가득 찬,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갑고 건조한 공간. 지안은 평소처럼 구두를 벗고 현관에 들어서려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안의 예리한 ‘수사 기록 행간 분석안’이 작동한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현관 매트 위에 놓인 실내 슬리퍼의 정렬 각도가 미세하게 틀어져 있었다. 지안은 외출하기 전 슬리퍼를 정확히 신발장 라인에 맞춰 90도 평행으로 정렬해 두는 강박적인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왼쪽 슬리퍼는 우측으로 약 5도 가량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순간, 지안의 척추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현관 콘솔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며칠간 바쁜 재판 일정 때문에 청소를 하지 못해 테이블 표면에 얇게 앉아 있던 먼지 위로, 아주 미세하지만 둥근 손가락 흔적이 스쳐 지나간 궤적이 보였다. 침입자였다.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지안은 가방을 가슴에 꼭 안은 채 소리 없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방의 이불깃, 서재 책상 위의 법률 서적들의 정렬 상태, 책갈피의 위치가 미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물건을 훔치러 온 잡범의 소행이 아니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극도로 조심스럽게 방안을 수색한 흔적. 전문적인 가택 침입이었다.
‘누구지? 한태성의 짓인가?’
지안은 거실로 나와 스탠드 조명 아래를 살폈다. 이 오피스텔에서 그녀가 가장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 전화를 통화하는 공간. 그녀는 무릎을 꿇고 거실 가죽 소파 옆에 놓인 디자이너 플로어 스탠드 밑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스탠드의 둥근 금속 받침대 안쪽 틈새, 검은색 접착테이프로 정교하게 고정된 지름 1센티미터 남짓한 초소형 기계 장치가 보였다. 미세하게 반짝이는 초록색 LED 불빛.
서초동 오피스텔 불법 도청 장치였다.
지안은 도청 장치를 바라보며 스마트폰을 쥐었다. 당장 112를 누르려던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니야, 경찰에 신고해선 안 돼.’
지안은 차가운 이성으로 상황을 분석했다. 서초동 관할 경찰서의 수뇌부는 이미 사법부 내부 사조직 ‘청조회’와 한성그룹의 장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는 순간, 가택 수색과 증거 수집이라는 명목 하에 김태영 변호사에게서 확보한 수첩과 10년 전 삼척 사건의 비공식 자료들을 압수당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도청기를 지금 부순다면, 적들은 자신들이 들켰음을 알고 더 과격하고 직접적인 물리적 위해를 가해올 것이다.
그녀는 도청 장치를 그대로 살려두기로 결심했다. 적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면, 역으로 그들의 눈과 귀를 이용해 가짜 정보를 흘리는 역정보 전술을 짜내야 했다.
지안은 가방을 소파 위에 내려놓으며 일부러 피곤한 기색을 담아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오늘도 재판 준비 때문에 밤을 새워야겠네. 몸이 부서질 것 같아."
그녀는 서재로 걸어가 일부러 서류철을 거칠게 넘기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어 집무실 비서인 이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정희는 평소 지안의 극심한 불면증과 트라우마를 누구보다 잘 알고 허브차와 약을 챙겨주며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해 주던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비서였다.
"정희 씨, 밤늦게 미안해요. 내일 재판 일정 때문에 급히 확인할 게 있어서요."
수화기 너머로 이정희 비서의 다정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안은 도청 장치가 설치된 거실 스탠드 방향을 바라보며 명확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김태영 변호사 사무실에서 확보한 한태성 부회장 관련 비자금 장부의 원본 파일이 들어있는 USB 말이에요. 내일 오전 중에 제 법원 집무실 우측 서랍 안쪽 캐비닛에 보관해 둘 생각이에요. 아주 결정적인 물증이라 내일 오후 선고 전까지는 아무도 제 집무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안 요원들에게 특별히 신경 써달라고 전해주세요. 네, 부탁해요."
지안은 전화를 끊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일부러 적들에게 가짜 보관 장소와 타임라인을 흘린 것이다. 한성그룹 부회장 한태성의 하수인들이 이 미끼를 물고 법원 집무실로 움직이는 동안, 자신은 진짜 김태영의 수첩 날짜들을 분석해 10년 전 삼척 사건의 진실을 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지안은 거실 창가로 다가서 블라인드 틈새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을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어두운 도로 한구석, 헤드라이트를 끈 채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보였다. 망원경으로 그녀의 오피스텔 창문을 집요하게 감시하고 있는 어둠 속의 시선. 한성그룹의 해결사이자 전문 킬러 최달수, 혹은 그의 수하들이 틀림없었다.
이 집조차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만성적인 불면증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적들의 위협이 지안의 목을 조여오는 듯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이 밀려왔다. 지안은 거실 불을 끄고 침대 머리맡에 주저앉아 무릎을 안았다. 고립무원의 어둠 속에서 오직 자신만의 지성과 논리로 이 거대한 괴물들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바로 그 순간,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기계음이 복도 끝에서 울렸다.
띵-.
엘리베이터가 지안의 오피스텔이 있는 12층에 멈춰 서는 소리였다. 이 늦은 새벽 시간에 그녀의 층에 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안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 빗소리만이 가득하던 고요한 오피스텔 복도 타일 바닥 위로, 서서히 다가오는 묵직하고 규칙적인 구두굽 소리가 들려왔다.
벅, 벅, 벅…….
그 소리는 지안의 현관문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이어 도어록의 금속 번호판을 손가락으로 더듬는 서늘한 마찰음이 고요한 방안을 찢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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