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수임한 변호인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 대법정을 나서는 민지안의 귓가에는 여전히 강인호 부장판사의 날 선 고함 소리가 이명처럼 맴돌고 있었다.
“민 판사! 자네 지금 제정신이야? 합의부 내부 조율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공판을 연기해?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피고인의 자백을 뒤흔들려는 건가!”
부장판사의 집무실에서 쏟아진 질책은 단순한 훈계를 넘어선 명백한 위협이었다. 인사 평정권을 쥔 재판장의 압박 앞에서도 지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 피고인석에서 하진우가 보냈던 비밀스러운 손가락 신호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믿고 앞으로 가라.’
10년 전 삼척 용화해변의 안개 속에서 나누었던 그 약속의 암호가 차가운 법정의 벽을 깨뜨렸다. 진우는 여전히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인범이라는 거대한 가짜 성벽 뒤에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판사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그가 스스로를 가둔 성벽의 균열을 찾아내 무너뜨리는 것.
지안은 법원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걸었다. 가을 밤비가 전면 유리를 두드리기 시작했고, 서초동 법조타운의 가로등 불빛이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번졌다. 지안의 목적지는 법원 외곽의 낡은 상가 건물에 위치한 ‘김태영 법률사무소’였다. 하진우의 담당 국선 변호인인 김태영을 직접 대면할 시간이었다.
상가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고장 난 채 멈춰 서 있었다. 어두운 계단을 걸어 3층 복도 끝에 다다르자, 페인트가 흉하게 벗겨진 철문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지안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고 문고리를 잡았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선 사무실의 공기는 퀴퀴한 먼지와 찌든 담배 냄새로 가득했다.
“누구십니까? 영업시간 끝났는데…….”
책상 위에서 서류더미를 황급히 정리하던 남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진우의 국선 변호인, 김태영이었다.
그의 몰골은 지안이 법정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초라했다. 무릎이 툭 튀어나온 낡은 양복바지, 소매 깃이 닳아 빠진 와이셔츠, 그리고 기름기에 찌든 채 헝클어진 머리칼. 돋보기안경 너머의 눈빛은 피로와 무기력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형적으로 현실의 벽에 부딪혀 타협한 소시민 법조인의 자화상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제33부 우배석 판사 민지안입니다. 김태영 변호사님.”
지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신분을 밝히자, 김태영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는 쥐고 있던 서류 봉투를 떨어뜨릴 뻔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민 판사님…… 이 늦은 시간에 예고도 없이 어쩐 일로…….”
“피고인 하진우의 변론 조력 상태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지안은 사무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정리되지 않은 서류 상자들이 뒹굴고 있었고, 캐비닛은 녹슬어 있었다. 하지만 지안의 예리한 ‘수사 기록 행간 분석안’은 그 초라함 속에서 부자연스러운 모순점들을 단 찰나에 잡아냈다.
책상 위에 놓인 월세 완납 영수증. 석 달이나 밀려 강제 집행 계고장까지 붙어 있던 사무실의 임대료가 불과 일주일 전에 일시불로 완납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태영이 급히 숨기려 했던 낡은 가죽 서류가방 틈새로 언뜻 보이는 물건—국선 변호사의 수임료로는 결코 살 수 없는 최고급 몽블랑 만년필의 금빛 클립이 스탠드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지안은 김태영의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시선이 변호사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변호사님. 오늘 공판에서 피고인의 자창 각도와 오른손잡이 모순에 대해 검찰이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할 때, 변호인께서는 왜 침묵하셨습니까?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할 국선 변호인이 오히려 검찰의 기소장을 수호하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김태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손가락 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지그시 눌렀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신체 언어는 지안의 시야에서 붉은 경고등처럼 도드라졌다.
“그건…… 피고인이 완강하게 자백을 유지하겠다고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피고인 본인이 죄를 인정하고 빠른 선고를 원하는데, 국선 변호인인 제가 무슨 수로 무죄를 주장합니까? 저는 피고인의 의사를 존중했을 뿐입니다.”
“의사 존중이라뇨.”
지안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판사로서의 위엄과 첫사랑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동시에 실려 있었다.
“피고인의 자백이 물리적 사실과 불일치한다면, 설령 피고인이 자백하더라도 그 신빙성을 의심하고 법원에 보석이나 구속 취소를 청구하는 것이 변호인의 의무입니다. 변호사님은 오늘 법정에서 피고인의 눈빛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마치…… 빨리 재판이 유죄로 끝나기만을 바라는 사람처럼요.”
“민 판사님! 지금 선을 넘고 계십니다!”
김태영이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며 방어막을 쳤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이건 명백한 직권남용이자 사적 감찰입니다! 판사가 늦은 밤 변호사의 사무실에 찾아와 변론 방향을 추궁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당장 나가지 않으시면 사법행정처에 공식 항의하겠습니다!”
김태영의 거친 항의에도 지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안경을 고쳐 쓰며 책상 위의 영수증과 가방 속 만년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항의하십시오. 저 역시 변호사님의 부자연스러운 재정 상태와 변호사법 위반 혐의에 대해 대한변호사협회에 공식 감찰을 의뢰할 테니까요.”
“뭐, 뭐라고요?”
“석 달간 밀려 있던 사무실 월세가 일주일 전에 완납되었더군요. 그리고 그 가방에 꽂힌 최고급 만년필. 하진우의 사건 수임 직후 변호사님의 개인 계좌로 출처를 알 수 없는 거액의 자금이 유입된 정황이 있습니다. 변호사법 제34조, 타인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부당한 사법적 거래를 돕는 행위는 변호사 자격 영구 박탈 사유입니다.”
지안의 날카로운 일침에 김태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고,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지안의 이성적이고 예리한 추궁이 그의 도덕적 부채감과 공포를 정확히 관통한 것이다.
김태영은 악인이 아니었다. 그저 늘어나는 빚과 병든 가족의 치료비 앞에서 거대 재벌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의 떨리는 입술 사이로 절박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저는…… 저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돈이 없으면 제 가족은 길바닥에 나앉아야 했습니다. 진우 군도 어차피 자백하겠다고 먼저 찾아왔던 거라고요! 제가 조작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한성그룹입니까?”
지안이 한 걸음 더 밀착하며 다그쳤다. 하지만 김태영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하면 저는 정말 죽습니다…… 당장 나가주십시오, 제발!”
김태영은 이성을 잃은 채 서류 가방과 코트를 움켜쥐고 지안을 밀쳐내며 도망치려 했다. 그가 황급히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거친 몸짓에 책상 옆에 서 있던 낡은 철제 캐비닛이 크게 흔들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캐비닛 문이 열리며 내부의 서류철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서류더미 사이로, 가죽 표지가 닳아 빠진 낡은 수첩 하나가 슬그머니 떨어져 내렸다.
지안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수첩에 꽂혔다. 그것은 수수께끼 같은 날짜들이 빽빽이 적힌 ‘김태영 변호사의 업무 수첩’이었다. 김태영이 비명을 지르며 수첩을 줍기 위해 몸을 날렸지만, 지안의 손이 한 발 더 빨랐다.
지안은 바닥에서 수첩을 낚아채어 빠르게 펼쳤다. 수첩의 깨진 틈새 사이로 찢어진 메모 조각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지안이 그 메모 조각을 집어 들어 스탠드 불빛 아래 비추었다.
메모 조각에는 김태영의 떨리는 필체로 갈겨쓴 날짜와 액수, 그리고 지안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거대 카르텔 배후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한성그룹 후계자 한태성 부회장 - 3억 원 입금 확인]
지안의 숨이 멎었다. 10년 전 삼척의 안개 너머에 숨어 있던 거대한 악마의 그림자가, 비로소 그 추악한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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