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위의 덫, 쪼개진 합의부
백승현 검사가 던진 서류철의 첫 장에는 지안의 목을 조일 서늘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법관 기피 신청서 제출 예고 및 공판 절차 공정성 이의 제기]
굵고 검은 활자들이 지안의 얇은 은테 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박혔다. 밤샘 분석과 영종도에서의 도주로 피로가 극에 달해 관자놀이가 지그시 울렸지만, 지안은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서류철을 들어 올렸다. 집무실 문턱에 선 백승현 검사의 호흡은 거칠었고, 그의 정갈한 검사 정장 깃 사이로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민지안 판사, 지금 제정신입니까?”
백승현이 책상을 두드리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재판장인 강인호 부장판사의 결재도 없이, 검찰과 피고인 양측의 정식 신청도 거치지 않은 사설 교통사고 감정서를 전산망에 기습적으로 등록해? 이것은 명백한 형사소송법 위반이자 법관의 직권남용입니다!”
지안은 서류철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차갑고 건조한 집무실 공기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사님, 형사소송법 제294조를 다시 한번 복기해 보시길 권합니다. 법원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검사나 피고인의 신청 없이도 직권으로 증거 조사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등록한 사설 감정서는 하진우 피고인의 자백 속에 존재하는 물리학적 모순을 규명하기 위한 정당한 직권 조사 자료의 일부입니다. 참여관의 정당한 행정 절차를 거쳐 ‘증거물 번호 14호’로 등재된 이상, 이 증거는 이제 이 재판부의 공식 기록입니다.”
“공직자로서의 중립성을 상실한 궤변이군요!”
백승현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지안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피고인 하진우와 민 판사님이 고등학교 시절 어떤 관계였는지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사적 감정에 휘둘려 재판을 지연시키고, 위조가 의심되는 사설 감정서까지 등록해 가며 피고인을 비호하려는 행태는 결코 묵과할 수 없습니다. 법원행정처 윤리심의관실에서 이미 감찰 조사를 개시했습니다. 이 서류는 대법원에 제출할 법관 기피 신청서의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법복을 벗고 나가시지 않는다면, 검찰은 판사님을 사법 방해 혐의로 정식 기소할 것입니다.”
지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녀는 백승현이 들이민 서류의 법리적 맹점을 단박에 간파했다. 기피 신청은 재판의 공정성을 흔들기 위한 협박 카드일 뿐, 실제 법정에서 인용되기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안은 책상 위 수첩을 가방에 깊숙이 밀어 넣으며 백승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검사님은 이 증거가 법정에 등재되는 것이 두려우신 겁니까, 아니면 2차 충격의 진짜 진범인 한성그룹 한태성 부회장이 두려우신 겁니까?”
“뭐라고요?”
“가죽 장갑의 혈흔 조작과 곽정욱의 매수 정황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검찰 조직이 감당해야 할 파멸이 무서워서 제 입을 막으려는 것이라면 헛수고하셨습니다. 기피 신청이든 감찰이든 법과 원칙대로 대응하겠습니다. 나가 주시죠.”
백승현은 이빨을 부득 갈며 서류철을 낚아채듯 쥐고 집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지안의 귓가를 때렸다. 복도 끝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참여관 박 주임이 지안과 눈이 마주치자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지안을 도운 대가로 그 역시 법원 내부의 거센 폭풍을 맞닥뜨려야 할 터였다.
* * *
오전 10시, 법원행정처 윤리심의관실 비밀 접견실.
차가운 스테인리스 테이블과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방 안은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안의 맞은편에는 대법원장의 충실한 수하이자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인 정재욱이 앉아 있었다. 연수원 시절 지안의 동기이기도 했던 그는, 이제 사법 카르텔의 차가운 칼날이 되어 지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재욱은 테이블 위에 황색 찌라시 매체의 폭로 기사 인쇄물과 백승현 검사가 접수한 공식 항의 공문을 내려놓았다.
“지안아, 동기로서 마지막으로 주는 경고야. 자진 사퇴해.”
정재욱의 목소리는 정중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그 뒤에는 거부할 수 없는 시스템의 폭력이 서려 있었다.
“살인 피고인과의 고교 시절 부적절한 관계, 재판장의 결재를 우회한 비공식 증거 등록, 그리고 법관 품위 유지 위반까지. 윤리심의관실은 이미 너에 대한 직무 정지 처분 초안을 작성해 뒀어. 징계위원회가 소집되는 순간 너는 판사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불명예 퇴진하게 돼. 아버님이신 민창식 전 대법관님의 평생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멈춰.”
지안은 정재욱이 내민 찌라시 인쇄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예리한 ‘수사 기록 행간 분석안’이 작동했다. 기사에 사용된 고등학교 시절 사진의 구도, 그리고 유출된 법원 내부 행정망의 로그 시간대.
“재욱아, 이 사진의 원본이 보관되어 있던 곳이 어디인지 알아?”
지안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정재욱을 쏘아보았다.
“구치소 영치품 보관실이야. 진우가 입소할 때 맡겼던 유일한 사진이지. 구치소 보안과장 배상우의 묵인 하에 한성그룹 홍보실이 이 사진을 입수했고, 너희 기획조정실은 검찰의 항의 공문이 접수되기도 전에 감찰 보고서를 작성해 뒀어. 이것은 법관의 품위 유지를 징계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성그룹의 청탁을 받아 저를 재판에서 강제 제척하려는 기획 감찰이야.”
정재욱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안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갔다.
“제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된다면, 저는 이 감찰 과정에 개입한 한성그룹의 로비 정황과 법원행정처 내부의 결탁 문건을 공익신고 형식으로 폭로할 것입니다. 법관징계법 제정 조항의 위헌성 또한 헌법재판소에 직접 물을 생각입니다.”
“민지안 판사!”
정재욱이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법부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길 수는 없어. 내일 아침 징계위 소집 공문이 너에게 정식 송달될 거다. 그때까지 네 집무실 서류 보관함에 대한 상시 감시가 시작될 테니 그리 알아.”
* * *
오후 2시, 형사합의제33부 재판장 강인호 부장판사의 집무실.
부장판사 강인호는 붉어진 얼굴로 책상 위의 의사봉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좌배석 판사 임도현과 신임 배석판사 이유리가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강인호는 지안이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고압적으로 서류 한 장을 내던졌다.
[형사합의제33부 배석 판사 업무 재배당 및 하진우 사건 공판기일 지정 취소 결의서]
“민 판사, 기조실에서 자네에 대한 감찰이 정식 개시되었다고 통보받았네. 사법부의 신뢰와 공정성을 위해, 하진우 사건의 주임 배석 판사직에서 자네를 배제하고 임도현 판사에게 사건을 재배당하겠네. 또한 다음 공판 기일을 즉각 취소하고 신속 선고 기일을 지정할 테니 배석 판사들은 이 결의서에 즉각 서명하게.”
강인호의 독단적인 지시에 좌배석 임도현 판사는 눈치를 살피며 펜을 만지작거렸다. 사법부의 서슬 퍼런 위계질서와 부장판사의 인사 평정권 앞에서 거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강인호의 매서운 시선이 신임 배석판사인 이유리에게 쏠렸다.
“이 판사, 서명하게. 신임 판사로서 조직의 기율을 배우는 첫걸음이라 생각하고.”
이유리 판사는 온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칼 사이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지안의 강직한 업무 태도를 동경하면서도, 평정 점수를 잘 받아야만 단독판사로 독립할 수 있는 자신의 처절한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강인호의 압박은 젊은 법관의 영혼을 짓누르는 고도의 시스템적 폭력이었다.
지안은 이유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후배를 향한 강요가 아닌, 묵묵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이유리는 수첩을 쥔 손을 굳게 쥐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며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하겠다던 선서가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선배 지안이 외롭게 거대 권력과 싸우는 모습을 보며, 자신마저 비겁하게 침묵한다면 평생 판사로서 부끄러운 삶을 살아야 할 터였다.
이유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장님…… 저는 이 결의서에 서명할 수 없습니다.”
집무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강인호의 안경 너머 눈빛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 판사, 지금 뭐라고 했나?”
“형사소송법 및 법원조직법에 따르면, 합의부 구성원인 배석 판사의 재판권 박탈과 사건 재배당은 합의부 전원일치의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재판장님의 독단적인 결의서 강요는 사법 독립을 침해하는 위법 행위입니다. 저와 민 판사님이 반대하는 이상, 이 결의서는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유리의 단호한 반박에 강인호는 책상을 내리쳤다.
“이유리! 신임 판사가 벌써부터 라인을 타고 항명하는 법을 배웠나? 자네 판사 커리어는 오늘로 끝이야!”
“그 대가는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법관의 양심은 팔지 않겠습니다.”
이유리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지안과 함께 부장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온 이유리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지안은 후배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맞잡았다.
“고마워, 유리야.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선배님이 외롭게 버티시는 걸 보면서 저도 판사로서 부끄럽지 않고 싶었어요. 이제 저희 어떻게 해야 하죠?”
“적들이 시스템의 칼날을 쓴다면, 우리도 법률적 극약 처방을 내려야지.”
* * *
오후 6시, 지안의 우배석 판사 집무실.
지안과 유리 두 사람은 문을 걸어 잠근 채, 책상 위에 방대한 법률 서적과 헌법 판례집을 펼쳐놓고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준비하는 것은 법관징계법 일부 조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서’였다.
“법관징계법 제5조와 제11조는 징계위원회의 최종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도 기획조정실의 임의적인 직무 정지 명령을 허용하고 있어. 이것은 헌법 제103조가 보장하는 법관의 독립성과 제106조의 신분 보장 조항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위헌적 법률이야.”
지안이 헌법 조항을 예리하게 짚어내며 문장을 대필해 나갔다. 이유리는 최신 판례를 신속하게 검색해 지안의 논리를 뒷받침할 보강 판례들을 찾아냈다.
“선배님,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서가 대법원에 정식 접수된다면,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이 나올 때까지 저들에 의한 지안 선배님의 징계 집행과 직무 정지 처분은 법적으로 일시 동결됩니다. 시간 벌기 전술로서는 완벽해요.”
“그래. 그리고 적들이 너와 박 주임님에게 보복성 인사 조치를 내릴 것을 대비해, 국민권익위원회에 제출할 ‘공익신고자 보호 조치 신청서’도 함께 작성해야 해. 우리가 법률 전문가인 이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방어막을 쳐야 해.”
두 여판사의 펜끝이 종이 위를 치열하게 달렸다. 사법부의 차가운 관료제 시스템에 맞서 법과 이성만을 무기로 싸우는 전문직들의 지적인 전투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집무실 외부 복도의 발소리는 뜸해졌지만, 지안의 방 주변을 맴도는 보이지 않는 감시의 시선은 더욱 좁혀오고 있었다. 복도 천장의 감시 카메라는 지안의 방 문 앞을 집요하게 비추고 있었다.
밤 11시 45분, 서류의 최종 교정을 마친 지안이 깊은 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었다. 극심한 편두통이 다시 밀려왔지만, 그녀의 가슴속에는 진우를 구할 수 있는 법리적 방패를 완성했다는 안도감이 차올랐다.
그 순간, 문가에서 아주 미세한 금속 마찰음이 들려왔다.
지안과 유리는 일시에 호흡을 멈추고 문을 응시했다. 노크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비상 마스터키를 이용해 문을 열려다 멈칫하는 소리였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어둠 속에서 푸른색 제복 차림의 거대한 체구가 방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서울중앙지법의 베테랑 보안 요원이자 수석 보안관인 윤성철이었다.
윤성철은 들어오자마자 문을 신속히 걸어 잠그고 지안과 유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에는 평소와 다른 극도의 긴박함이 서려 있었다. 윤성철은 감시 카메라의 사각지대인 스탠드 그늘 아래로 몸을 숙이며 낮고 절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민 판사님, 지금 당장 움직이셔야 합니다.”
“윤 보안관님, 무슨 일입니까?”
지안이 긴장한 표정으로 묻자, 윤성철이 품속에서 무전기 수신음을 미세하게 조절하며 첩보를 전했다.
“방금 기획조정실의 정재욱 심의관이 감찰 요원들을 이끌고 이쪽 건물 지하로 진입했습니다. 정식 징계위 소집 공문이 발송되기도 전에, 판사님이 삼척에서 가져온 사설 감정서 원본과 김태영의 수첩을 불법적으로 압수하기 위해 영장도 없이 판사님의 캐비닛과 서류 보관함을 강제 수색하려 합니다. 보안실의 감시 카메라를 수동으로 차단하고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집무실 내부의 온도가 한순간에 영하로 떨어지는 듯한 숨 막히는 긴장감이 방 안을 지배했다. 지안은 반사적으로 책상 서랍 옆의 잠긴 가죽 캐비닛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삼척에서 목숨을 걸고 가져온 황색 작업 일지와 한태성의 약점이 담긴 수첩 원본이 보관되어 있었다.
적들은 법과 절차를 모두 무시하고, 물리적인 강탈을 통해 지안의 마지막 반격 카드를 영구히 인멸하려 덫을 좁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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