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추격전
철제 셔터가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육중한 굉음이 밀폐된 카센터 내부를 뒤흔들었다. 순간 사방을 밝히던 할로겐램프가 툭 소리를 내며 꺼졌고, 붉은색 비상 유도등만이 어둠 속에서 음산하게 깜빡였다. 벽면에 비친 기계들의 그림자가 괴물처럼 일렁였다.
“민지안 판사님, 얌전히 가방 넘기시지.”
어둠 속에서 가죽 장갑을 낀 거구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성그룹의 하수인, 마성태가 보낸 해결사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야구배트와 날카로운 잭나이프가 붉은 유도등 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지안은 가슴 품에 하진혁이 건넨 황색 작업 일지, 즉 10년 전 후방 추돌의 진실이 담긴 사설 교통사고 감정서를 더 단단히 안았다. 숨결이 가빠지고 이명이 귓가를 때렸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건 법원의 직권조사 명령에 따라 확보한 공식 증거물입니다. 영장 없는 압수는 불법입니다.”
“판사님, 여기 삼척 바닷가에선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법이라서 말입니다.”
사내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지안을 향해 좁혀오던 그 순간이었다.
쿠콰쾅!
카센터 측면의 낡은 보조 철문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안쪽으로 부서져 내렸다. 자욱한 먼지 구덩이 속에서 검은색 수트를 입은 단단한 체구의 사내가 기습적으로 들이닥쳤다. 하진우의 충직한 비서이자 경호원인 최영철이었다.
“판사님, 제 뒤로 숨으십시오!”
영철의 외침과 동시에 사내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영철은 전직 특수전사령부 부사관 출신다운 날렵한 궤적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묵직한 구두굽이 첫 번째 사내의 턱을 정확히 가격했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바닥으로 뒹굴었다. 다른 사내가 잭나이프를 휘두르며 영철의 어깨를 베어 들어왔다. 서늘한 칼날이 수트 원단을 찢고 영철의 어깨 가죽을 깊게 갈랐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영철은 신음 한 번 지르지 않고 상대의 손목을 꺾어 단숨에 단상 아래로 메쳐버렸다.
“하진혁 씨, 최 형사님! 보조 문 쪽으로 퇴로를 확보했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하진혁이 스패너를 휘두르며 영철의 엄호를 도왔고, 퇴직 형사 최두식 역시 낡은 공구함을 던져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영철은 지안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부서진 보조 문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삼척의 밤바람과 자욱한 해안 안개가 두 사람의 얼굴을 때렸다. 카센터 마당에는 영철이 타고 온 검은색 세단이 시동이 걸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타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영철이 조수석 문을 열었고, 지안은 품에 안은 감정서를 사수하며 차 안으로 몸을 던졌다. 영철이 운전석에 타자마자 가속페달을 밟았다. 타이어가 비포장도로의 모래를 거칠게 뿜어내며 차량이 안개 속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최영철 씨, 어깨 부상이……!”
“괜찮습니다. 주군의 명령입니다. 판사님의 신변과 그 증거를 목숨 걸고 지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영철은 이를 악물고 스티어링 휠을 꺾었다. 차량은 7번 국도를 타고 서울 방향으로 신속히 진입하려 했다. 하지만 안개 너머로 붉고 푸른 경찰 경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번뜩였다. 삼척 국도의 검문소였다.
“검문소입니다. 속도를 줄여야——”
“안 됩니다, 판사님.”
영철이 백미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 경찰들은 이미 한성그룹과 대법원장의 영향력 하에 있습니다. 도로 통제를 가장해 저희 차량을 멈춰 세운 뒤, 증거물만 압수하고 마성태 일당에게 저희를 넘길 심산입니다. 우회해야 합니다.”
영철은 검문소 직전에서 차량을 급선회했다.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짙은 해안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가파른 ‘강원도 삼척 용화해변 국도’ 해안 절벽 도로뿐이었다.
차량이 해안도로에 진입하자마자, 백미러 너머로 거대한 전조등 불빛 세 쌍이 안개를 뚫고 무서운 속도로 쫓아왔다. 마성태 일당이 탄 대형 SUV 세 대였다. 배기음 소리가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집어삼킬 듯이 국도를 울렸다. 적들은 조직적인 미행 차량 따돌리기 운전술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단의 좌우와 뒤편을 샌드위치 구도로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쿵!
좌측에서 들이받은 SUV의 충격으로 지안의 세단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차량 우측 범퍼가 해안 절벽의 콘크리트 가드레일을 긁으며 불꽃을 뿜어냈다. 차 안의 에어백 경고등이 붉게 깜빡였다.
“영철 씨, 이 앞은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는 안개 구간입니다! 내비게이션 신호도 끊겼어요!”
지안이 외쳤다. 전방은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백색의 장막이었다. 가속페달을 조금만 잘못 밟아도 수십 미터 아래의 절벽 바다로 추락할 판이었다.
그 순간, 지안의 머릿속에서 ‘직관적 사건 재구성력’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10년 전 바로 이 도로에서 일어났던 서현수 검사 교통사고의 정황 도면과 기상청 데이터, 그리고 사전에 완벽히 암기해 두었던 삼척 해안도로의 지형 지도가 뇌리에서 3D 입체 그래픽처럼 융합되어 펼쳐졌다.
지안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며 안개 너머의 도로 곡선을 계산해 냈다.
“영철 씨, 제 말 들으세요. 앞으로 150미터 전방에 우측으로 75도 꺾이는 극단적인 급커브 구간이 있습니다. 그 커브 바로 옆은 해안가 모래밭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경사지입니다.”
“안개가 너무 짙어 도로 경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타이밍을 맞추겠습니다. 제 신호에 맞춰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완전히 끄고,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우측으로 꺾으세요. 적들은 우리 차량의 미등 불빛만을 쫓아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라지면 그들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직진해 버릴 겁니다.”
극단적인 전술이었다. 헤드라이트를 끄는 순간 완벽한 암흑 속에서 오직 지안의 지리적 직관에만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영철은 망설이지 않았다.
“판사님만 믿겠습니다.”
적들의 SUV가 뒤편에서 다시 한번 세단의 꽁무니를 들이받았다. 충격과 함께 지안의 머릿속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100미터…… 70미터…… 50미터…….’
“지금입니다! 불 끄고, 우측으로 꺾으세요!”
탁!
영철이 헤드라이트 스위치를 끄는 것과 동시에 차량의 모든 불빛이 소멸했다. 암흑의 장막 속에서 영철은 지안의 외침에 따라 핸들을 우측으로 강하게 꺾으며 사이드 브레이크를 잡아당겼다. 세단이 비명을 지르며 드리프트를 돌았고, 가드레일이 끊어진 모래밭 완충 지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바로 그 찰나, 지안의 미등만을 맹목적으로 쫓아 질주하던 추격 차량 한 대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안개 속 절벽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쾅! 쿠구구궁!
거대한 굉음과 함께 SUV 한 대가 중심을 잃고 해안가 모래밭 저편 바위 구덩이로 처박히며 불길을 뿜어냈다. 포위망에 치명적인 균열이 발생한 순간이었다. 영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전조등을 켜며 모래밭 우회로를 빠져나와 고속도로 진입로를 향해 차를 몰았다. 자욱했던 삼척의 해안 안개가 백미러 너머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 * *
몇 시간의 숨 막히는 질주 끝에, 차량은 서울 외곽을 우회하여 인천 영종도의 황량한 어선 선착장에 도착했다. 사방은 비린내 나는 갯벌과 차가운 서해 바람으로 가득했다. 영철이 안내한 곳은 선착장 한구석에 위치한 낡은 수산물 보관용 컨테이너 사무실이었다.
최 실장과 진우가 감시의 눈길을 피해 임시로 마련해 둔 안전지대였다.
지안은 컨테이너 내부의 낡은 책상 위에 하진혁의 작업 일지를 내려놓았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옆을 돌아보자, 영철이 어깨의 상처를 움켜쥔 채 창백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있었다.
“영철 씨, 어깨 피가 멈추지 않아요. 구급상자 어디 있습니까?”
지안이 급히 컨테이너 선반을 뒤져 지혈제와 붕대를 찾아냈다. 그녀는 서툰 손길이었지만 정성스럽게 영철의 찢어진 수트 자락을 잘라내고 상처를 소독했다. 지혈제를 뿌릴 때 영철의 턱끝이 파르르 떨렸으나, 그는 여전히 묵묵히 고통을 견뎌냈다.
“죄송합니다, 판사님. 주군께서 보낸 보디가드인데 오히려 짐이 되었군요.”
“아니요, 영철 씨가 없었다면 저와 이 감정서는 이미 마성태 일당에게 넘어갔을 겁니다.”
지안이 붕대를 단단히 감아 매며 진심으로 말했다. 영철은 붕대 감긴 어깨를 가볍게 움직여 보더니, 품 안에서 피 묻은 가죽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지갑 깊숙한 곳에서 작고 묵직한 티타늄 재질의 보안 매체를 꺼내어 지안의 앞에 놓았다.
스위스 유니온 은행의 비밀 보안 OTP 카드였다.
“이게 무엇인가요?”
지안이 묻자, 영철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크릴창 너머에 갇힌 진우의 얼굴을 떠올리듯 깊은 눈빛을 지었다.
“주군께서 구치소로 들어가시기 전, 제게 맡기신 마지막 보루입니다. 하진우 사장님의 스위스 개인 비밀 계좌 OTP 카드입니다. 한성그룹의 감시망과 자금 동결 조치를 완전히 우회할 수 있는, 약 50억 원 상당의 무기명 채권과 현금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지안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50억 원. 그것은 한 개인이 평생 만져보기도 힘든 거액이자, 한성그룹이라는 거대 자본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가장 강력한 물리적 실탄이었다.
“진우가…… 왜 이걸 저에게…….”
“사장님은 판사님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결국 사법부 내부의 거대 카르텔과 전면전을 벌이게 될 것임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판사직을 잃고 법원 밖으로 쫓겨나 고립되었을 때, 이 자금이 판사님의 신변을 보호하고 진실을 밝힐 사설 정보망을 가동할 유일한 방패가 될 거라고 하셨지요.”
영철의 목소리가 컨테이너의 차가운 철판 벽을 타고 지안의 가슴속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사장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목숨과 명예를 버릴 각오를 하셨던 겁니다. 오직 판사님 한 분이 안개 너머의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자신은 평생 살인범의 멍에를 쓰고 독방에 갇혀도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OTP는 사장님이 판사님께 남기신 목숨값과 다름없습니다.”
지안은 책상 위에 놓인 차갑고 묵직한 OTP 카드를 바라보았다. 손끝을 가져다 대자, 진우가 구치소 접견실 유리창 너머로 보냈던 그 애틋하고 절박했던 눈빛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지안이 평생 죄책감의 감옥에 갇히지 않도록 스스로 가짜 범인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자신의 전 재산과 경호팀까지 미리 배치해 두었던 것이다.
지안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붉은 유도등 빛이 반사되는 OTP 카드 표면을 적셨다. 그 애틋하고 거대한 헌신의 실체 앞에, 지안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과 함께 어떤 외압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겠다는 독한 결의를 품었다.
그때였다. 컨테이너 밖의 어두운 선착장 진입로 너머로, 헤드라이트를 끈 채 은밀하게 접근하는 여러 대의 차량 엔진 소리가 갯벌의 침묵을 찢고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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