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해변의 목격자들
바다 안개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국도를 덮쳐왔다. 헤드라이트의 백색 광선이 자욱한 안개 벽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지는 통에 전방 5미터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민지안은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미세한 떨림과 함께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이명이 다시 기습해 왔다. 아버지가 그녀의 뇌 속에 걸어두었던 약물 최면의 빗장이 깨지면서 밀려오는 정신적 과부하였다.
뒤편 백미러를 힐끗 바라보자, 안개 속에서 번뜩이는 세 쌍의 상향등이 보였다. 번호판을 교묘하게 가린 검은색 세단들이었다. 한성그룹 부회장 한태성이 보낸 마성태의 수하들이 분명했다. 지안이 삼척으로 내려와 10년 전 사건의 진실을 캐내려 하자 물리적인 납치와 증거 인멸을 위해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이었다.
막다른 해안 절벽 국도. 이대로 가다간 샌드위치 구도로 압박당해 차량째로 바다에 추락할 판이었다. 지안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피고인석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하진우의 마지막 눈빛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진우야, 네가 나를 지키기 위해 10년을 던졌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그날 밤의 안개를 걷어내겠어.’
지안은 기습적으로 세단의 전조등을 완전히 껐다. 시야가 암흑으로 변한 찰나, 그녀는 머릿속의 순간 기억 복기력을 가동했다. 사전에 완벽히 암기해 두었던 삼척 용화해변 국도의 지형 도면이 뇌리에 3D 그래픽처럼 떠올랐다. 우측으로 꺾어지는 급커브 구간과 그 너머에 숨겨진 낡은 수산물 창고 골목길.
지안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핸들을 우측으로 강하게 꺾었다.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차체가 비포장 골목길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뒤따라오던 미행 차량들은 헤드라이트가 꺼진 지안의 차량을 순간적으로 놓치고, 안개 가득한 본선 도로 너머로 굉음을 내며 지나쳐 가버렸다.
지안은 숨을 몰아쉬며 낡은 창고 뒤편의 어둠 속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자 차가운 바닷바람 소리와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창문을 타고 스며들었다. 손목에 찬 시계의 바늘은 새벽 2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안은 가죽 가방을 품에 꼭 안은 채 차에서 내렸다. 가방 안에는 가평 요양병원에서 찾아낸 자신의 부러진 은테 안경다리 한 쪽이 들어 있었다.
지안이 안개를 헤치며 걸어 도달한 곳은 용화해변 인근의 황량한 국도변에 위치한 ‘진혁 카센터’였다. 낡은 조립식 패널 건물 위로 희미한 네온사인 간판이 깜빡이고 있었다. 카센터 내부에는 단 하나의 할로겐 램프만이 켜진 채 서늘한 공기를 밝히고 있었다.
지안이 열려 있는 미닫이문 틈새로 발을 들여놓자, 쇠사슬과 기름때 절은 기계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리프트 위에 올려진 구형 세단 밑에서 한 남자가 스패너를 든 채 걸어 나왔다. 다부진 체격에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남자, 하진우의 외사촌 형이자 이 카센터의 주인인 하진혁이었다.
하진혁은 침입자를 발견하자마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안을 경계했다.
“이 밤중에 카센터는 무슨 일입니까? 영업 끝났습니다.”
무뚝뚝하고 거친 목소리였다. 지안은 가방을 든 손을 굳게 쥐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진혁 씨 맞으시죠. 서울중앙지법 판사 민지안입니다.”
판사라는 신분을 밝히자 진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스패너를 작업대에 툭 내려놓으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판사님이 이 누추한 곳엔 무슨 일입니까? 우리 진우를 살인범으로 낙인찍어 감옥에 처넣은 법원 사람들이 이제 와서 사촌 형인 나까지 감시하러 온 겁니까?”
진혁의 목소리에는 동생을 잃은 분노와 사법부를 향한 깊은 불신이 서려 있었다. 지안은 흔들리지 않고 가방을 열어 비단 주머니에서 부러진 은테 안경다리 한 쪽을 꺼내어 진혁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진우는 살인범이 아닙니다. 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가짜 자백을 하고 감옥에 들어간 겁니다. 그리고 이 안경다리는…… 10년 전 삼척 용화해변 도로에서 제가 유실했던 안경의 반쪽입니다.”
진혁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지안의 손바닥 위에 놓인 은테 안경다리와 그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안의 눈빛에는 거짓이나 타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투명한 정의감과, 진우를 향한 뼈아픈 죄책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당신…… 설마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겁니까?”
진혁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 뇌가 최면 암시에 의해 왜곡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가 10년 전 서현수 검사님을 차로 쳐서 죽였다고 믿고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제 안경다리가 보존되어 있던 방식과 조서의 모순을 통해 진실이 따로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진우는 제가 범인이라고 믿고 저를 지키기 위해 누명을 쓴 거예요. 진혁 씨, 제발 진우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마세요. 10년 전 진우의 사고 차량을 정비하셨을 때 보았던 진짜 데이터를 제게 보여주십시오.”
지안의 진심 어린 설득과 애틋한 호소에 진혁의 거친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진우 녀석, 끝까지 당신에겐 비밀로 하라고 목숨 걸고 당부했는데…… 결국 당신이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왔군요.”
진혁은 카센터 구석의 낡은 사무실로 걸어가 철제 캐비닛을 열었다. 그리고 먼지 쌓인 플라스틱 바인더 하나를 꺼내어 지안 앞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10년 전 그날 밤, 진우가 엉망진창이 된 차량을 몰고 이 카센터로 들이닥쳤을 때, 나는 차량의 프레임을 정밀 분석했습니다. 한성그룹 사람들은 단순 단독 사고로 위장해 즉시 폐차하라고 압박했지만, 정비사로서 내 눈은 속일 수 없었지.”
진혁이 바인더를 펼치자 낡은 모눈종이 위에 기록된 차량 프레임 변형 도면과 정밀 휠 얼라인먼트 데이터가 나타났다.
“이 데이터를 보십시오. 차량의 앞 범퍼는 가벼운 접촉 충격으로 인한 손상뿐이었습니다. 당신의 은색 아반떼가 서 검사를 쳤을 때의 충격 수치는 미필적 고의나 즉사를 유발할 만한 에너지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진짜 문제는 뒤쪽이었습니다. 차량 뒤 범퍼의 프레임이 안쪽으로 무참하게 꺾여 들어간 휠 얼라인먼트 변형 수치가 보이죠? 이건 고의적인 고속 후방 추돌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당신의 차량 뒤에서 다른 대형 세단이 2차 충격을 가해 서 검사를 완전히 밟고 지나간 겁니다.”
지안은 도면 위의 수치들을 바라보며 숨을 멈추었다. 사설 교통사고 감정서와 완벽히 일치하는 물리적 물증이었다. 진짜 살인범은 지안의 차 뒤에서 고의로 추돌을 가했던 다른 배후 차량, 즉 한성그룹 한태성의 에쿠스였다는 진실이 눈앞에 시각화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경찰은 왜 이 확실한 흔적들을 무시하고 단순 뺑소니로 종결한 거죠?”
지안이 묻는 순간, 카센터 안쪽의 어두운 부품실 문이 열리며 굵직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내가 답해줄 수 있겠군, 민 판사.”
희끗희끗한 더벅머리에 낡은 가죽 재킷을 걸친 노신사가 걸어 나왔다. 담배 냄새와 바닷바람 냄새가 찌들어 있는 얼굴, 10년 전 삼척 교통사고의 담당 형사였던 최두식이었다. 그의 깊게 패인 눈가 주름에는 평생 동안 짊어온 무거운 부채감과 회한이 서려 있었다.
“최두식 형사님…….”
지안이 그를 알아보았다. 최두식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지안의 앞에 섰다.
“당시 삼척경찰서장이었던 신현식 서장실에 대법원장 임대형—당시에는 고등법원장이었지—의 직접적인 유선 전화가 걸려왔었네. 사건 현장에서 수거된 은테 안경다리와 최초 수사 보고서 원본을 즉시 압수해 인멸하고, 사건을 단순 단독 뺑소니로 신속하게 종결하라는 지시였지. 대기업 한성그룹의 비자금 수사를 막기 위해 경찰과 사법부 수뇌부가 조직적으로 움직인 결과였어. 나는 내 목줄을 쥔 수뇌부의 압박에 굴복해 그 추악한 은폐를 묵인했네. 평생을 그 죄책감 속에 살아왔지.”
최두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꺼내어 지안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당시 서장과 한성그룹 브로커가 나눈 대화 내용이 녹음된 테이프라네. 사법 카르텔의 뿌리를 흔들 수 있는 더러운 거래의 증거물이지.”
지안은 눈앞에 놓인 10년 전 삼척 교통사고 수사 보고서 원본의 단서들과 진혁의 정비 작업 일지, 그리고 최두식의 증언을 바라보며 사법 정의의 엄숙한 사명감을 다시금 굳건히 다졌다. 진우의 자백을 깨뜨리고 그를 구원할 완벽한 퍼즐 조각들이 마침내 맞춰진 것이다.
진혁이 바인더 속에서 10년 전 사고 차량의 세부 정비 내용과 휠 얼라인먼트 수치가 상세히 기록된 낡은 자필 작업 일지를 꺼내어 지안에게 건넸다.
“이걸 가져가십시오, 민 판사님. 우리 진우를…… 제발 그 어두운 독방에서 꺼내 주십시오.”
지안이 떨리는 손으로 황색 작업 일지를 받아 가슴 품에 단단히 안았다. 종이의 바스락거리는 질감과 차가운 기름 냄새가 그녀의 가슴을 뜨겁게 적셨다. 드디어 한성그룹과 사법 카르텔을 무너뜨릴 결정적 물증을 손에 넣은 순간이었다.
바로 그 찰나, 귀를 찢는 듯한 불길한 금속성 굉음이 카센터 전체를 뒤흔들었다.
쿵!
카센터 정면의 거대한 철제 셔터문이 외부의 강한 충격에 의해 거칠게 내려앉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마저 완전히 차단되면서, 외부에서 들어오던 미세한 새벽빛이 한순간에 소멸했다.
지안과 진혁, 최두식은 동시에 몸을 굳혔다. 카센터 내부의 할로겐 램프가 미세하게 깜빡이더니 툭, 소리를 내며 완전히 암흑 속으로 꺼져버렸다. 비상용 붉은색 유도등만이 어둠 속에서 음산한 빛을 뿜어내며 벽면의 기계 그림자들을 기괴하게 늘어뜨렸다.
고요해진 어둠 속에서, 셔터문 너머로 묵직한 구두굽 소리와 쇠파이프가 바닥을 긁는 서늘한 금속 마찰음이 들려왔다. 마성태 일당의 사설 용역들이 카센터 주변을 완벽히 포위하고 숨통을 조여오는 소리였다.
지안은 어둠 속에서 가슴 품에 안은 작업 일지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빨간 유도등 불빛 아래로, 셔터문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여러 개의 거대한 실루엣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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