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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가면, 그리고 삼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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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VIP 요양병원 1201호실의 공기는 무겁고 축축했다. 기계적인 산소호흡기가 뿜어내는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정적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민지안은 손바닥에 쥔 차가운 금속 조각을 으스러질 듯 움켜쥐었다. 부러진 은테 안경다리 한 쪽. 그리고 그 옆에 덩그러니 떨어진, 임대형 대법원장의 붉은 직인이 찍힌 사법 거래 약정서 사본.


지안은 고개를 들어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평생을 사법부의 청렴한 거목이자 자신의 도덕적 나침반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버지, 민창식이 산소호흡기 너머로 초라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백발은 성성했고, 깊게 패인 미간 주름에는 회한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버지…….”


지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배신감과 슬픔이 칼날처럼 날카로워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날 위해서가 아니었어. 나를 지키기 위해 그 비밀을 묻은 게 아니었어, 그렇지?”


지안은 아버지가 평생 동안 소중히 보관해 오던 몽블랑 만년필을 쥔 채 병상 앞으로 다가갔다. 대법관 임용을 눈앞에 두고 가문의 추문이 될 딸의 교통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사법 카르텔의 정점인 임대형과 거래를 나눴던 위선자. 딸의 기억을 강제로 잠가버리는 약물 최면까지 집행하며 자신의 승진 가도를 지키려 했던 아버지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민창식의 감긴 눈꺼풀 아래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려 관자놀이를 타고 베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산소포화도 측정 기계가 삑, 삑, 소리를 내며 거칠게 요동쳤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말을 잃어버린 육체는 그저 비겁했던 과거의 침묵만을 묵묵히 시인할 뿐이었다.


지안은 눈물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안경다리와 약정서 사본을 가죽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아버지를 향한 정서적 신뢰는 완전히 조각나 바닥에 흩어졌다. 하지만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하진우가 구치소 독방에 갇혀 끝까지 침묵을 지키며 스스로 살인범이 되려 했던 진짜 이유가 바로 이 부러진 안경다리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이상, 판사로서의 양심을 걸고 진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야만 했다.


따르릉.


고요한 병실 안에서 지안의 개인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발신 번호 제한 표시. 지안은 신경질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댔다.


“민지안 판사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기계적으로 정돈되어 있었으나, 숨 막히는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대법원장 임대형의 비서실장이었다.


“대법원장님께서 민 판사님의 최근 행보를 무척 염려하고 계십니다. 법관 징계위원회의 감찰 조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사적 감정으로 재판을 지연시키거나, 불구속 전환을 유도하려는 움직임은 법관 윤리강령에 심각하게 위배됩니다. 내일 오전 중으로 기획조정실에 출석해 경위서를 제출하십시오. 더 이상의 돌발 행동은…… 가문의 몰락을 자초할 뿐입니다.”


공손함을 가장한 협박이었다. 지안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가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합니다.”


지안은 차갑고 명징한 어조로 한 글자씩 내뱉었다.


“대법원장 비서실의 사적인 경고는 사법권 독립에 대한 명백한 침해이자 외압입니다. 저는 제 법정에 선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할 물리적 모순을 확인했고, 이에 따라 형사소송법이 보장하는 현장 직권 재검증을 강행할 것입니다. 더 이상의 연락은 공식적인 특별 감찰 방해로 간주하겠습니다.”


지안은 비서실장의 답변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를 끊자마자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지독한 이명이 다시 기습해 왔다. 뇌세포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지안은 벽을 짚고 겨우 몸을 지탱했다. 최면 암시의 족쇄가 무너지며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잠가버렸던 10년 전 삼척 용화해변의 기억 조각들이 폭풍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이명이 잦아들 무렵, 지안은 다시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정신과 전문의 최윤희 교수였다.


“지안 씨! 방금 뇌파 모니터링 데이터에 이상 신호가 감지됐어요. 최면 암시 장벽이 인위적으로 깨지면서 뇌가 엄청난 과부하를 겪고 있어요. 이 상태에서 트라우마가 일어났던 현장에 직접 노출되면 영구적인 정신적 외상이나 극심한 공황 발작으로 쓰러질 수 있어요. 절대 삼척으로 내려가면 안 돼요!”


최 교수의 절박한 경고가 귓가를 때렸지만, 지안은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으며 핸들을 꽉 쥐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 기억 속에 갇힌 하진우를 꺼내기 위해선 안개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이미 안개는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지안은 전화를 끊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자신의 세단에 시동을 걸었다. 엔진의 묵직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녀의 목적지는 단 하나, 10년 전 비극의 시작점이자 아버지가 숨겨둔 비밀의 열쇠가 묻혀 있는 곳—강원도 삼척 용화해변 국도였다.


* * *


서울을 벗어나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해안으로 향하는 길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지안의 안색은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 속에서도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머릿속에서는 최 교수가 경고했던 최면 부작용의 전조 증상인 미세한 이명이 파도 소리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갔다.


백미러를 힐끗 바라보던 지안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좁혀졌다.


수십 분 전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붙는 검은색 대형 세단 두 대가 보였다. 번호판이 교묘하게 가려진 상태였다. 고속도로의 한적한 구간에 접어들자, 그 차량들은 차선을 바꾸며 지안의 차량 좌우로 집요하게 밀착하기 시작했다.


한성그룹 부회장 한태성이 보낸 해결사 마성태의 수하들이 분명했다. 지안이 삼척으로 내려가 10년 전 수사 조작의 흔적을 파헤치려 하자, 물리적인 위협을 가해 차단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지안은 가속페달을 밟는 대신, 침착하게 브레이크를 미세하게 밟으며 속도를 조절했다. 흔들리는 차체 안에서 그녀는 순간 기억 복기력을 발휘해 백미러에 비친 추격 차량들의 차종과 외관적 특징, 그리고 번호판이 가려진 각도를 머릿속에 꼼꼼히 기록했다. 대포폰 기지국 데이터와 연계해 향후 법정에서 한성그룹의 사법 방해 혐의를 직접 입증할 디지털 흔적의 기초 자료로 삼기 위함이었다.


추격 차량 중 한 대가 지안의 차선 앞으로 기습적으로 끼어들며 상향등을 번뜩였다. 눈을 찌르는 백색 광선이 앞 유리를 가득 채우자 지안은 반사적으로 핸들을 꽉 쥐며 중심을 잡았다. 가슴속에서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왔지만, 피고인석에서 수갑을 찬 채 자신을 바라보던 진우의 마지막 눈빛을 떠올리며 이성을 붙잡았다.


‘진우야, 네가 나를 위해 10년을 던졌다면, 나는 내 모든 신분을 던져서라도 그날 밤의 안개를 걷어내겠어.’


지안은 삼척 IC 이정표가 보이자 전조등을 끄고 기습적으로 우측 차선으로 차량을 꺾었다. 추격 차량들이 제동 장치를 밟으며 타이어 타는 냄새를 풍겼지만, 이미 지안의 세단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삼척의 음산한 해안 국도로 접어든 뒤였다.


* * *


삼척 용화해변 국도에 들어서자, 동해안의 짙은 바다 안개가 차창 밖을 집요하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안개 장벽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지며 시야는 불과 5m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제한되었다. 철썩이는 거친 파도 소리가 해안 절벽 아래에서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10년 전, 지안이 은색 아반떼를 몰고 사람을 치었다고 믿었던 바로 그 장소.


지안은 차량의 속도를 늦추며 안개 속을 응시했다. 뇌리를 찌르는 이명이 극에 달하며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듯 꿈틀거렸다. 최면 암시 장벽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지안의 시야 속으로 10년 전 그날 밤의 몽환적인 이미지가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 쓰러져 있던 서현수 검사, 그리고 뒤이어 안개를 뚫고 돌진해 오던 의문의 검은색 세단의 헤드라이트.


그때였다.


지안의 차량 뒤편 안개 속에서, 번호판이 가려진 검은색 세단 세 대가 조용히 미행을 끝내고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 너머로 서서히 다가오는 그들의 거대한 실루엣은 마치 사냥감을 포위하려는 늑대 무리 같았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일제히 상향등을 번뜩이며 지안의 차량 뒷유리를 강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서 번뜩이는 수십 개의 불빛이 지안의 시야를 하얗게 멀게 만들며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막다른 해안 절벽 도로 위에서, 지안은 완벽하게 고립되었음을 직감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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