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부러진 안경
가평의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린 축축한 밤안개가 VIP 요양병원의 통유리창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병실 안은 기계적인 산소호흡기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고요를 깨뜨릴 뿐, 기괴할 정도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민지안은 병실 문을 닫고 차가운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가 그녀의 목덜미를 조여왔다. 법원행정처 윤리심의관실의 감찰 압박과 정재욱이 들이밀었던 사퇴서, 그리고 김명철 변호사가 기습적으로 대법원에 접수한 법관 기피 신청서까지. 사법 카르텔 ‘청조회’의 서슬 퍼런 칼날이 그녀의 목전까지 다가와 있었지만, 지안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발걸음은 더 단호하게 아버지가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는 한때 대한민국 사법부의 청렴을 상징하던 거목, 전직 대법관 민창식이 누워 있었다. 뇌질환으로 쓰러져 백발이 성성해진 아버지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초라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지안은 아버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평생 동안 자신에게 곧고 올바른 법관의 길만을 가르쳐 주었던 나의 영웅. 그러나 10년 전 삼척 용화해변 도로의 뺑소니 사고 뒤편에서 은밀하게 수사 외압을 행사하고 내사 종결을 지시했던 장본인.
지안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울컥임과 함께 지독한 배신감이 솟구쳤다.
“아버지…….”
지안의 나직한 목소리에 침대 옆 산소포화도 측정 기계가 삐빅거리며 미세하게 요동쳤다. 민창식은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안은 떨리는 숨을 고르며 아버지가 평생 소중히 간직해 오던 bedside table 위의 개인 소지품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낡고 해진 갈색 가죽 다이어리와 함께, 아버지가 대법관 임용 당시 대법원장 임대형에게 선물 받았던 최고급 몽블랑 만년필이 놓여 있었다. 지안은 주저 없이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아버지가 평생 사적인 법조계 인맥과 은밀한 메모들을 기록해 두던 만년필 다이어리였다.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를 넘기자, 정갈한 아버지의 필체 사이로 오래된 비밀번호 네 자리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0812’. 지안의 머릿속에 순간 기억 복기력이 가동되었다. 10년 전 삼척 용화해변에서 사고가 났던 바로 그날 밤의 날짜였다.
지안은 침대 밑 서랍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소형 개인 금고를 끌어당겼다. 금고의 다이얼 위에 손가락을 얹은 그녀는 차가운 금속을 돌려 ‘0812’를 입력했다.
탁,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금고의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서서히 열리는 금고 문틈 사이로 차가운 먼지 냄새와 함께 작은 비단 주머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비단 주머니의 끈을 풀었다. 주머니를 뒤집어 손바닥 위에 내용물을 쏟아내는 순간, 지안의 숨이 완전히 멎었다.
“이건…….”
지안의 손바닥 위에 떨어진 것은 한쪽 다리가 처참하게 부러진 은테 안경다리 한 쪽이었다.
10년 전,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아버지가 직접 골라주어 지안이 매일 쓰고 다녔던 바로 그 안경이었다. 삼척 용화해변 국도의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잃어버렸던, 경찰의 공식 압수물 목록에서는 영구히 유실된 것으로 처리되었던 지안의 은테 안경다리. 안경테의 꺾인 모서리 부분에는 1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검붉게 말라붙은 미세한 혈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지안의 손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법정에 제출되는 순간, 지안 자신이 10년 전 서현수 검사 사망 사건의 실제 가해자였음을 증명하는 치명적인 물증이 될 터였다. 하진우가 구치소 독방에 갇혀 끝까지 침묵을 지키며 스스로 살인범이 되려 했던 진짜 이유가 바로 이 부러진 안경다리 때문이었음을 지안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진우는 지안의 DNA가 묻은 이 결정적 물증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내던진 것이었다.
그러나 금고 속에 남겨진 것은 안경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안경다리가 담겨 있던 주머니 밑바닥에서 낡은 서약서 한 장이 흘러나왔다. 대법원장 임대형의 직인과 아버지 민창식의 정갈한 자필 서명이 날인된 ‘사법 거래 약정서’였다.
지안은 서약서의 문장들을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갔다.
[민창식 부장판사의 대법관 임용을 보장하는 대가로, 삼척 용화해변 교통사고의 피의자 민지안에 대한 내사를 종결하고 관련 증거 일체를 영구 인멸한다. 또한 피의자의 정신적 안정을 위해 최면 요법을 통한 기억 차단 조치를 신속히 집행한다.]
“아니야…… 거짓말이지…….”
지안의 입술에서 절망적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오직 딸을 구원하기 위해, 비뚤어진 부성애 때문에 침묵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일생 최대의 염원이었던 대법관 임용을 눈앞에 두고, 가문의 추문이 될 딸의 교통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사법 카르텔의 수장 임대형과 추악한 거래를 했던 것이었다. 딸을 지킨다는 위선적인 가면 뒤에 자신의 사법적 출세와 안위를 철저히 숨겨두었던 아버지의 진짜 민낯.
지안은 평생 동안 지켜왔던 사법적 정의와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극심한 정서적 파멸을 느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부러진 안경다리 위로 뚝뚝 떨어졌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아버지!”
지안은 절망에 가득 찬 눈으로 병상의 아버지를 붙잡고 흔들었다. 목이 메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오열이 하얀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를 향한 배신감과 스스로를 향한 혐오감이 칼날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그때였다. 지안이 울부짖으며 부러진 안경다리를 움켜쥔 순간, 그녀의 귓가에 고주파의 날카로운 이명이 기습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이이이이잉——.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지독한 통증과 함께, 10년 동안 굳게 잠겨 있던 억압된 기억(blocked memory)의 장벽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뇌 속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삼척 용화해변의 안개 낀 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폭풍처럼 몰아쳤다.
차가운 빗소리, 자욱한 바다 안개, 그리고 은색 아반떼의 헤드라이트 불빛.
지안은 머리를 감싸 쥐고 병실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최면 암시의 족쇄가 풀려나가며 뇌세포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안개 속에서 흘러나온 진짜 기억의 조각은 지안이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정황을 비추고 있었다.
그날 밤, 지안의 차가 무언가를 충격하기 직전, 짙은 안개 너머 도로 위에는 이미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지안의 차량이 서현수 검사를 가볍게 충격하고 멈춰 선 순간, 지안의 시야 속으로 또 다른 검은색 세단의 거대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안개를 뚫고 무섭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아아아악!”
지안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부러진 안경다리를 쥔 그녀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떨렸다. 기억의 안개 너머에서 되살아난 진짜 살인범의 그림자. 자신이 낸 사고는 치사량이 아니었다. 서현수 검사를 진짜로 즉사시킨 2차 충격의 진범이 따로 존재한다는 서늘한 직감이 지안의 전신을 지배했다.
눈물로 얼룩진 바닥 위에서, 지안은 서서히 눈을 부릅떴다. 이제 가문의 추악한 업보와 조작된 기억의 안개를 걷어내고, 스스로 법관의 법복을 벗어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진짜 진실을 법정 위에 끌어올리겠다는 위대한 결의가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푸르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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