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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의 첫 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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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대법정의 공기는 언제나 서늘했다. 높은 천장 아래로 쏟아지는 백색광은 인간의 온기마저 표백해 버릴 듯 차가웠고, 법복의 묵직한 검은 자락은 어깨를 짓눌렀다.


우배석 판사 민지안은 얇은 은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눈앞의 피고인석을 응시했다. 단정한 단발머리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화장기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심장이 흉벽을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지만, 그녀는 법대(法臺) 위에서 유지해야 하는 얼음 같은 침묵으로 스스로를 통제했다.


철제 문이 열리고, 교도관들의 삼엄한 호송 속에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베이지색 수의 가슴팍에 선명하게 박힌 수인번호 ‘2014’. 양손에 채워진 차가운 수갑을 가리기 위해 묶인 청색 호송줄이 그의 마른 손목을 파고들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날카로운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


하진우.


10년 전, 삼척 용화해변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지안의 손을 잡고 “괜찮아, 다 잘될 거야”라고 속삭이던 소년이, 지금 세간을 뒤흔든 대기업 임원 살인 사건의 피고인으로 그녀의 법정에 서 있었다.


진우는 법대 중앙을 향해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단 한 번도 지안이 앉아 있는 우배석 판사석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심연처럼 깊고 고요했으며,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철저한 포커페이스였다.


“피고인 하진우, 맞습니까?”


재판장 강인호 부장판사의 고압적인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 퍼졌다.


“네, 맞습니다.”


진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으나 낮고 단호했다. 지안은 무의식적으로 펜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강한 압박이었다.


검사석에 앉아 있던 서울중앙지검 강력부의 백승현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카롭게 다려진 수트 핏만큼이나 서슬 퍼런 눈빛의 엘리트 검사였다. 그는 준비해 온 공소장을 펼쳐 들고 낭독하기 시작했다.


“공소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피고인 하진우는 한성케미칼 사장직에서 좌천당한 후, 가평의 한 펜션에서 피해자 서현수 검사와 말다툼을 벌이던 중, 미리 준비한 흉기로 피해자의 복부를 수차례 찔러 살해했습니다. 범행 당시 피고인이 착용했던 혈흔 묻은 가죽 장갑이 피고인의 차량 트렁크에서 발견되었으며, 장갑 안쪽에서는 피고인의 DNA가 검출되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계획살인입니다.”


백승현 검사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는 한성그룹의 줄을 타고 초고속 승진을 노리는 야망가답게, 진우의 빠른 유죄 판결을 유도하기 위해 자극적인 정황 증거들을 쏟아냈다.


“피고인 하진우, 검사가 낭독한 공소사실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까?”


강인호 부장판사가 진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강 부장판사의 눈빛에는 이 재판을 서둘러 끝내고 싶어 하는 조급함이 묻어났다. 한성그룹의 청탁을 받아 진우를 신속히 살인범으로 단죄하고 사건을 덮으려는 사법부 내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피고인석의 하진우에게 쏠렸다. 진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갑이 서로 부딪치며 짤랑이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합니다.”


법정 내부에 나직한 술렁임이 일었다. 한성그룹의 서자이자 유명 기업인인 그가 단 한 번의 항변도 없이 살인 혐의를 100% 자백한 것이다.


“변론을 포기하겠습니다. 저의 자백 외에 추가적인 증인 신문이나 증거 조사는 필요치 않습니다. 법이 정한 가장 무거운 형벌을 신속히 내려주십시오.”


진우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미리 정교하게 짜인 각본을 읊는 기계처럼 완벽하고 매끄러운 자백이었다.


강인호 부장판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자발적으로 모두 인정하고, 변호인 역시 추가 의견이 없다고 하니, 형사소송 절차에 따라 피고인 신문을 생략하고 오늘 변론을 종결하도록 하겠습니다. 판결 선고 기일은——”


“재판장님, 이의 있습니다.”


고요하던 법정에 찬물을 끼얹듯,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강 부장판사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꺾였다. 우배석 판사석에 앉은 민지안이 마이크를 켠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 부장판사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패였다.


“민 판사, 무슨 일인가?”


“피고인의 자백이 지닌 자발성과 신빙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형사소송법 제310조, 즉 자백의 보강법칙에 따르면 피고인의 자백이 그 피고인에게 불이익한 유일한 증거인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지 못합니다. 검찰이 제시한 물증인 ‘가죽 장갑’의 혈흔 분석 결과와 피고인의 자백 사이에 물리적 모순이 존재합니다.”


지안의 날카로운 지적에 백승현 검사의 눈빛이 사납게 빛났다.


“우배석 판사님, 피고인이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고 자백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물증인 가죽 장갑에서 피해자의 혈흔과 피고인의 DNA가 모두 검출되었는데, 무엇이 모순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지안은 준비해 둔 수사 기록의 특정 페이지를 펼쳐 들었다. 순간 기억 복기력이 발휘되어 조서의 텍스트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입체적으로 정렬되었다.


“검찰의 현장 검증 조서에 따르면, 피고인은 오른손으로 흉기를 쥐고 피해자를 찔렀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사체 부검 감정서에 기록된 피해자의 자창(刺創) 각도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왼손잡이 특유의 궤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피고인 하진우는 오른손잡이입니다. 또한, 범행에 사용되었다는 가죽 장갑 내부에서 발견된 피고인의 각질 DNA는 장갑의 손가락 끝부분이 아닌 손등 부분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는 타인이 의도적으로 장갑을 피고인의 손에 씌웠거나, 정황 증거가 인위적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법정 안의 공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지안의 정교한 법률 분석력이 검찰이 짜놓은 완벽한 시나리오의 틈새를 정확히 찔러 들어간 것이다.


지안은 피고인석의 진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 그녀의 눈동자가 떨림을 숨긴 채 매섭게 빛났다.


“피고인 하진우. 당신은 오른손잡이임에도 왜 왼손잡이의 각도로 피해자를 찔렀다고 진술했습니까? 그리고 왜 장갑 내부의 DNA 분포가 비정상적입니까? 대답하십시오.”


진우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지안을 바라보았다. 10년 만에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차가운 유리가 되어 그녀의 질문을 튕겨내고 있었다.


“저는 범행 당시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오른손잡이이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왼손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장갑 역시 서둘러 끼느라 제대로 착용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제 자백은 진실입니다. 판사님.”


그는 철저한 포커페이스로 완벽하게 설계된 거짓 시나리오를 고수했다. 지안을 향한 그의 눈빛에는 미세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더 이상 파헤치지 말라는, 자신을 구하려 하지 말라는 처절한 무언의 방어막이었다.


지안은 직접 진우의 진심을 끌어내려 유도 신문을 시도했으나, 그의 완벽한 기만전술과 기계적인 유죄 인정에 가로막혀 더 이상 법정에서 강제 자백을 번복시킬 수는 없었다.


강 부장판사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의사봉을 가볍게 두드렸다.


“민 판사의 지적은 일리가 있으나, 피고인의 일관된 자백과 검찰의 물증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재판을 불필요하게 지연시킬 이유는 없네. 합의부 회의를 통해 변론을 종결하고 선고 기일을 잡겠네.”


강 부장판사는 지안의 의견을 묵살하려 했다. 하지만 지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왼쪽에 앉은 좌배석 판사 임도현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임도현은 지안의 강직한 눈빛과 제시된 과학적 모순점을 보고 갈등하다가, 결국 지안의 손을 들어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합의부 3인의 판사 중 배석 판사 2인이 추가 증거 검토의 필요성에 합의한 것이다. 합의부 전원일치 원칙에 따라 재판장인 강 부장판사도 이를 거스를 수 없었다.


강 부장판사는 붉어진 얼굴로 지안을 쏘아본 뒤, 마지못해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합의부 의견에 따라, 피고인의 자백 신빙성과 물증의 물리적 일치 여부를 재검토하기 위해 오늘 재판을 연기합니다. 다음 공판 기일은 2주 뒤인 10월 14일 오전 10시로 지정합니다. 휴정합니다.”


쾅. 쾅. 쾅.


의사봉 소리가 법정을 울렸고, 지안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재판을 2주 연기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진우가 왜 스스로 살인범이 되려는지, 그가 숨기려는 거대한 안개의 정체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법정이 정리되고 피고인들이 퇴정하기 시작했다.


교도관들에 의해 호송줄에 묶여 천천히 법정 뒷문으로 나가던 하진우가, 문을 나서기 직전 찰나의 순간 고개를 돌려 민지안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의 깊고 슬픈 눈빛 속에 담긴 차가운 경고와, 지안의 심장을 사정없이 내려앉게 만든 그의 숨겨진 진짜 의도.


지안은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내리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진우가 지키려 하는 비밀이, 10년 전 삼척 용화해변의 짙은 안개 속에서 자신이 냈던 그 끔찍한 교통사고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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