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부의 이빨, 인질의 조건
“제발... 제발 나를 한진우가 아닌 권도현으로 봐줘. 저 죽은 껍데기가 아니라, 눈앞에 살아있는 나를 봐달란 말이야, 서지원...!”
그 새벽, 권도현이 쏟아낸 절규는 북한산 저택의 거실을 피비린내 나는 애증으로 물들였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Y자형 수술 흉터는 풀어헤쳐진 환자복 셔츠 사이로 기괴하게 맥박 치고 있었다. 지원은 그의 품에 거칠게 안긴 채, 그의 가슴속에서 세차게 뛰는 약혼자 진우의 심장 소리를 청진기 없이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그 지독한 밀착이 주는 감각은 구원이자 형벌이었다. 지원은 가까스로 그를 밀쳐내고 차가운 이성의 가면을 고쳐 썼으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일어난 균열은 메울 길이 없었다.
날이 밝아왔지만 저택의 공기는 여전히 냉골이었다. 도현은 무리한 거동과 정서적 폭주로 인해 심근에 미세한 손상을 입고 이층 침실에 누워 있었다. 지원은 그의 곁에서 EKG 모니터를 체크하며 차갑고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의사-환자 사적 감정 개입 금지 서약은 이미 내면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으나, 그녀는 애써 냉정함을 가장했다.
“내 강남 오피스텔에 다녀와야겠어요.” 지원이 침대 머리맡에 서서 도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의 심장 거부 반응이 예사롭지 않아요. 일반적인 면역 억제제로는 제어가 안 됩니다. 내가 대학 시절부터 기록해 둔 미승인 약물 배합 임상 노트가 오피스텔 서재에 있어요. 그걸 가져와야 처방을 재조정할 수 있습니다.”
도현은 창백한 얼굴로 지원의 목에 걸린 티타늄 약혼반지 목걸이를 응시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마 실장을 데리고 가. 내 허락 없이 저택 밖에서 일 분 일 초도 혼자 움직이지 마.”
그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집착과 소유욕이 가득했다. 지원은 그의 시선을 피해 몸을 돌렸다. 손목에 채워진 GPS 특수 스마트 워치가 묵직한 무게감으로 그녀의 피부를 죄어왔다. 이것은 그녀의 신체를 구속하는 족쇄이자, 동시에 그녀를 감시하는 눈이었다.
강남의 차가운 오피스텔 복도. 마강식이 이끄는 태성파 경호원들이 복도 양끝을 지키고 서 있었다. 지원은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려 했다.
그때, 그녀의 눈이 도어락 손잡이에 닿았다.
문고리에 기괴하게 걸려 있는 은빛 체인. 그리고 그 끝에 매달린 보랏빛 나무 알알의 묵주.
지원의 호흡이 한순간에 정지했다.
“엄마...”
지원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 박정자가 매일 밤 손에 쥐고 눈물로 기도를 올리던, 진우가 생전에 선물했던 바로 그 묵주 반지이자 묵주 목걸이였다. 어머니가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던 보물이 왜 자신의 텅 빈 오피스텔 문고리에 걸려 있는가.
지원의 무릎이 맥없이 꺾였다. 차가운 복도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묵주를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악! 엄마! 안 돼, 엄마...!”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와 그녀의 전신을 마비시켰다. 마강식이 다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려 할 때, 지원의 코트 주머니 속 대포폰이 진동했다. 발신 번호 제한 표시.
지원은 미친 사람처럼 전화를 받아 귀에 댔다.
“여보세요! 당신 누구야! 내 엄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수화기 너머에서 시가 연기처럼 탁하고 비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도현의 숙부이자 태성파의 실질적 지배자인 권태성이었다.
“서지원 의사인가? 내 조카놈 가슴을 열고 수작을 부리는 여의사가 있다고 해서 말이지.”
“권태성... 당신이 왜...”
“당장 그 저택에서 나와 주치의 계약을 해지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어미의 심장도 내 조카놈처럼 멈추게 될 테니까.”
지원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그때 폰으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세인트 한강 병원 근처의 고즈넉한 한옥 마당. 장을 보고 들어서는 박정자의 뒤편, 어둠 속에 몸을 숨긴 해결사 박용구의 서늘한 실루엣이 포착되어 있었다. 그의 검은 가죽 장갑 낀 손에는 인체에 주입 시 즉각적인 심장마비를 유도하는 특수 칼륨 주사기가 쥐어져 있었다.
“제발... 제발 내 엄마는 건드리지 마요... 내가 다 할게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지원이 복도 바닥에 머리를 짓이기며 울부짖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걸어 나왔.
권도현이었다. 자신의 심장 상태가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지원이 저택을 나섰다는 불안감에 경호 차량을 타고 그녀를 추격해 온 것이었다. 도현은 주저앉아 절규하는 지원의 모습과 그녀의 손에 들린 묵주를 보고 눈빛을 번뜩였다.
도현은 지원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권태성.”
도현이 수화기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그의 음성은 지옥 가장 깊은 곳에서 올라온 것처럼 서늘했다.
“도현이냐? 몸 상태도 안 좋은 놈이 목소리는 살아있군.”
“내 여자 건드리면 가문 전체를 피로 쓸어버리겠다.”
도현의 선언은 단호했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신이 키우는 사냥개 놈들부터 대가리를 깨놓을 테니, 그 비열한 이빨이나 잘 간수하고 있어.”
도현은 전화를 부술 듯이 움켜쥐며 끊어버렸다. 그리고 즉각 마강식에게 명령했다.
“마 실장. 지금 당장 경호 1팀, 2팀 전부 한옥으로 급파해. 서 의사 어머니가 사시는 곳을 이중으로 포위하고 철통 경호해라.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해.”
그의 흑색 눈동자에 극단적인 살기가 서렸다. “그리고 박용구... 그 사냥개 놈을 산 채로 잡아와라. 가죽을 벗겨서 권태성 집 앞에 던져줄 테니까.”
그 피비린내 나는 조직폭력배들의 대화를 들으며, 지원의 내면에서 억눌려 있던 분노와 환멸이 폭발했다. 자신의 소중한 약혼자를 죽이고 심장을 빼앗아간 괴물들의 싸움에, 이제는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의 목숨까지 인질로 잡혔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눈앞의 권도현이라는 남자 때문이었다.
짝!
지원은 온 힘을 다해 도현의 뺨을 갈겼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차가운 오피스텔 복도 벽을 때리며 울려 퍼졌다.
도현의 고개가 비틀어졌다. 그의 하얀 뺨 위로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당신들이 뭔데... 당신들이 뭔데 내 엄마 목숨을 가지고 장난쳐!”
지원은 도현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당신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악이야! 당신 가슴속에 든 그 심장도, 당신 가문의 그 더러운 피도 전부 증오스러워! 왜 내 삶을 어디까지 망가뜨려야 만족하는 건데!”
도현은 반항하지 않았다. 지원의 주먹이 그의 수술 상처 부위를 때릴 때마다 그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환자복 너머로 배어 나왔다. 그의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 워치에서 위험한 부정맥을 경고하는 삐- 삐-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으나, 도현은 오직 지원만을 서늘하고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때려. 분이 풀릴 때까지 더 때려, 서지원.”
도현이 피가 묻어나는 가슴을 움켜쥐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넌 내 곁에서 못 떠나. 내가 죽어도, 네 엄마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살려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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