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의 야상곡
“유... 선... 아...”
그 이름이 메디컬 룸의 차가운 무균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서지원의 심장이 굳어버렸다. 도현의 창백한 뺨에 얹혀 있던 그녀의 손끝이 사르르 떨렸다. 유선. 그건 누구의 이름인가. 3년 전 실종되어 살해당한 약혼자 한진우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누군가인가, 아니면 권도현이라는 이 괴물의 어두운 과거에 얽힌 여자의 이름인가.
지원이 의문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육중한 메디컬 룸의 철문 너머로 거친 군화 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다가왔다. 마강식이었다. 도현은 그 이름을 끝으로 다시 깊은 혼절 상태로 빠져들었다. 호흡은 겨우 안정되었으나 EKG 모니터 위의 심박수는 아슬아슬하게 분당 65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철컥, 문이 열리며 마강식이 거구의 몸을 들이밀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그의 검은 가죽 코트에서 훅 풍겼다. 강식의 매서운 눈이 검진대 시트 위에 흩뿌려진 검붉은 선혈과 바닥에 뒹구는 제세동기 패들에 닿았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보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원은 차갑게 얼어붙은 가면을 고쳐 썼다. 냉정함을 유지해야 했다. 의사로서, 그리고 추적자로서.
“고비는 넘겼습니다. 급성 심실세동으로 인한 심정지였어요. 제세동과 심폐소생술로 자발 순환을 회복시켰지만, 심근 손상이 심각합니다.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요.”
그녀는 가운 깃 사이로 흘러나온 티타늄 약혼반지를 손가락으로 밀어 넣었다. 손바닥의 작은 자창에서 흘러나온 피가 반지의 은빛 표면에 미세하게 묻어 있었다. 강식은 도현의 가슴 위에 남은 새로운 전기 충격의 붉은 화상 자국과 붕대를 바라보더니, 이내 지원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서 교수님. 보스를 살려주셔서.”
“감사는 필요 없습니다. 계약 조건이니까요. 그리고... 당장 HL-9 약물이 추가로 필요해요. 이번 고비는 넘겼지만, 언제 다시 거부 반응이 폭주할지 모릅니다. 병원 약제부에서 추가 반출을 설계해야 해요.”
지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유선’이라는 이름과 도현의 가슴속에서 뛰는 진우의 심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도현의 침상을 이층 침실로 옮기도록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
새벽 3시.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저택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창밖에는 한겨울의 칼바람이 나뭇가지를 후려치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지원은 이층 침실 옆에 마련된 개인 주치의 방에서 나와 거실 계단을 내려왔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도현에게 수면 진정제를 투여하고 그의 활력징후가 안정된 것을 확인한 뒤에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거실 소파에 몸을 묻은 지원은 목걸이를 꺼내어 티타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유선...’
그 이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진우의 심장 세포가 보낸 기억의 파편이라면, 왜 자신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일까. 진우에게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 이름은 오롯이 권도현이라는 남자의 유년 시절 상처와 관련된 것일까.
이성과 본능이 머릿속에서 거칠게 부딪혔다. 심리 장벽 2단계의 혼란이 그녀를 잠식했다. 죽은 약혼자의 심장을 품고 있는 살인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의학적 지식과 영혼을 갈아 넣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지독한 도덕적 자기혐오를 유발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스며드는 한기가 가운을 뚫고 피부를 찔렀다.
그때였다. 이층 계단 위에서 미세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스스스, 툭.
지원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환자복 상의를 느슨하게 풀어헤친 도현이 계단 난간을 짚은 채 비틀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가슴 정중앙에 새겨진 Y자형 수술 흉터가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달빛을 받아 도드라졌다.
“권도현 씨? 아직 움직이면 안 됩니다. 침대로 돌아가세요.”
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도현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풀린 채 반쯤 감겨 있었고, 마치 깊은 꿈속을 헤매는 몽유병 환자처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현은 거실 한구석,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그 피아노는 도현의 자살한 어머니 강유선이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으나, 도현은 평생 피아노를 칠 줄 몰랐기에 먼지만 쌓여 있던 방치된 물건이었다.
도현이 피아노 의자에 느리게 주저앉았다. 그의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손가락이 하얀 건반 위에 가볍게 얹어졌다.
그리고, 기적이 시작되었다.
달빛이 통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그의 실루엣을 창백하게 비추는 순간, 도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건반이 눌리며 무겁고 슬픈 선율이 거실의 적막을 찢었다.
쇼팽의 야상곡 제2번 E플랫 장조, 작품 번호 9의 2.
지원의 전신이 번개에 맞은 듯 얼어붙었다. 계단 아래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연주는 너무나 낯익었다. 단순한 멜로디의 재현이 아니었다. 건반을 누르는 묵직한 무게감, 프레이즈와 프레이즈 사이의 미세한 호흡, 그리고 트릴(Trill)을 처리할 때 약지 손가락이 미세하게 밀리는 특유의 연주 버릇까지.
그것은 3년 전, 진우가 그녀에게 청혼하던 날 밤, 대학 교정의 낡은 강당에서 연주해 주었던 바로 그 야상곡이었다.
“진우... 씨...?”
지원의 입술 사이로 가냘픈 신음이 새어 나왔다.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시야를 가렸다. 달빛 아래서 피아노를 치는 도현의 거구 너머로, 하얀 연구원 가운을 입고 부드럽게 웃던 진우의 환영이 겹쳐 보였다.
도현의 손가락은 마치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건반 위를 유려하게 활강했다.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다던 암흑가의 보스가, 오직 심장 세포에 각인된 소뇌의 근육 운동 신경망 동조에 의해 완벽한 야상곡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영혼의 연장이자, 지독한 세포의 기만이었다.
곡이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 도현의 미간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연주 속도가 불규칙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자아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쾅!
갑자기 도현이 건반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거친 불협화음이 거실 벽을 때리며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도현은 머리를 감싸 안으며 피아노 위로 쓰러지듯 엎어졌다.
“아아악...!”
그가 짐승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지원은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달려갔다.
“권도현 씨! 정신 차려요! 제 눈 보세요!”
지원은 도현의 차갑게 식은 손을 잡았다. 그의 맥박은 분당 110회까지 치솟아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미주신경의 동조 상태가 무너지며 심장이 다시 폭주하려는 위험한 신호였다.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도현이 신음하며 지원의 손을 꽉 쥐었다. 그의 흑색 눈동자에 붉은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내 머릿속에... 내가 모르는 기억들이 헤엄치고 있어. 내가 모르는 거리가 보이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연구실의 냄새가 코끝을 찔러... 그리고...”
도현이 지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극단적인 혼란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벚꽃 나무 아래서... 네가 울고 있는 모습이 보여. 왜 내가 너를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해야 하는 거지?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 왜 이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여서 그 슬픈 노래를 치는 거냐고!”
지원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벚꽃 나무 아래에서의 고백. 그것은 진우가 대학 시절 지원에게 마음을 전했던 날의 기억이었다. 유전자 조작된 심장 세포가 도현의 미주신경과 결합하여, 진우의 가장 강렬했던 기억의 파편을 그의 무의식으로 쏘아 올리고 있었다.
지원은 이 도덕적 혼란과 슬픔 속에서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권도현 씨, 진정하세요. 제 손 꼭 잡고 숨 쉬세요. 그건... 심장 이식 수혜자들에게 가끔 나타나는 세포 기억(Cellular Memory) 현상일 뿐이에요. 기증자의 신경 전달 물질이 이식자의 뇌 신경망과 공명해 일으키는 일시적인 환각입니다. 당신의 진짜 기억이 아니에요.”
그녀는 철저히 의학적인 용어로 그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것은 도현의 정신적 붕괴를 막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죽은 약혼자의 영혼이 눈앞의 살인마에게 잠식당하고 있다는 비참한 현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어벽이었다.
“환각이라고...?”
도현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며 지원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의 거친 아귀힘이 지원의 가냘픈 뼈마디를 부술 듯이 조여왔다. 그의 가쁜 숨결이 지원의 뺨에 닿았다. 뜨겁고, 지독하게 비참한 숨결이었다.
“그럼 이 가슴이 미친 듯이 뛰는 것도, 너를 볼 때마다 내 영혼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것도... 다 그 죽은 기증자의 유령 때문이라는 건가? 내 심장이 뛰는 게 내가 아니라, 그 유령의 의지라는 거야?”
도현의 눈동자에 광기 어린 소유욕과 열등감이 번뜩였다. 그는 지원의 가슴팍에 걸린 티타늄 반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싫어. 그런 유령 따위에게 내 감정을 빼앗기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도현은 지원을 제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가슴의 수술 흉터가 맞닿으며 두 사람의 심장 고동이 거칠게 공명했다. 지원은 그의 가슴에서 뛰는 진우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걷잡을 수 없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지원의 눈물이 도현의 어깨를 적시자, 도현은 그녀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쥐어짜며 사정하듯, 울부짖듯 애절하게 갈망했다.
“제발... 제발 나를 한진우가 아닌 권도현으로 봐줘. 저 죽은 껍데기가 아니라, 눈앞에 살아있는 나를 봐달란 말이야, 서지원...!”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