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동의 폭주, 떨리는 메스
“전 의사입니다. 제 눈앞에 있는 건 오직 치료해야 할 환자의 장기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서지원의 목소리는 지하 메디컬 룸의 차가운 대리석 벽면에 부딪혀 서늘하게 흩어졌다. 일말의 온기도 섞이지 않은, 철저하게 감정을 거세한 외과의의 선언이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권도현의 검은 눈동자가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 늘 포식자처럼 오만하고 여유롭던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날카로운 균열이 일어났다. 상처받은 짐승의 그것과 닮은 비참한 빛이 그의 눈을 스쳤으나, 이내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껍데기라... 기분 더럽군.”
도현은 천천히 지원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의 손길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차가운 공기가 닿자, 지원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도는 찰나에 불과했다. 도현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으며 가슴을 움켜쥐는 순간, 메디컬 룸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났다.
“흡...!”
도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넓은 어깨가 기형적으로 움츠러들었고, 단단한 흉판 아래의 Y자 흉터가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지원은 본능적으로 EKG 모니터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위의 심전도 파형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분당 110회였던 심박수가 순식간에 130, 150, 180회를 돌파했다. 정상적인 P파와 QRS파의 경계가 무너지며 날카롭고 가파른 톱니바퀴 모양의 파형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심실빈맥(Ventricular Tachycardia)이었다.
“권도현 씨! 숨 쉬세요! 제 눈 똑바로 보세요!”
지원은 다급히 도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도현의 동공은 이미 초점을 잃고 풀려가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푸르게 변하는 청색증 징후가 나타났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는 바람에 뇌로 가는 혈류가 차단된 것이었다.
“커헉...!”
도현이 격렬하게 기침을 토해내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와 하얀 검진대 시트 위를 적셨다. 유전자가 복제된 심장 세포가 급격한 정서적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심근 내벽의 미세 혈관들을 터뜨려버린 것이 분명했다. 도현의 거구의 몸이 바닥으로 무겁게 추락했다.
쿵!
지하 메디컬 룸의 비상 경보음이 붉은 불빛과 함께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그 날카롭고 고주파의 경보음이 지원의 고막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해일이 일어났다.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되더니, 이내 붉은 피로 물든 3년 전의 수술실 풍경이 환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안 돼... 진우 씨... 안 돼...!’
차갑게 식어가는 한진우의 가슴을 열고 찢어진 대동맥을 봉합하려던 순간, 인공 심폐기의 경보음이 바로 이 소리였다. 지원의 목구멍이 쇠사슬로 조여드는 것처럼 꽉 막혔다. 과호흡이 찾아와 숨을 쉴 수 없었다. 메스를 쥐어야 할 그녀의 마른 손가락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전신을 마비시키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늪이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서 교수님! 보스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상 경보를 듣고 메디컬 룸의 육중한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사설 간호조무사 정동현이 비명을 질렀다. 피를 토한 채 쓰러진 도현의 상태를 본 동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미오다론 주사할까요? 교수님!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하지만 지원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허공을 헤맸고, 온몸은 차가운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다시 눈앞에서 소중한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방조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공포가 그녀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그때, 가운 깃 사이로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그녀의 가슴뼈를 찔렀다. 은색 체인에 걸린 진우의 티타늄 약혼반지였다.
지원은 떨리는 오른손을 가슴으로 가져가 옷자락 위로 반지를 꽉 쥐었다. 반지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바닥 살을 파고들며 찌르는 듯한 통증을 선사했다. 물리적인 고통이 마비되었던 그녀의 감각을 깨우는 정박지가 되었다.
‘나는 외과의다. 내 눈앞에 있는 환자를 두 번 다시 죽게 두지 않는다.’
지원은 눈을 감고 깊은 호흡을 들이쉬었다. ‘수술실 공황 자가 제어술’의 메커니즘이 가동되었다. 숨을 4초간 들이마시고, 4초간 멈춘 뒤, 8초간 천천히 내뱉는다. 요동치던 그녀의 심박수가 ‘강철 멘탈 심박 제어력’에 의해 분당 60회의 규칙적인 리듬으로 강제 조정되었다. 떨리던 손가락 끝이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굳어졌다.
지원이 번쩍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냉철한 천재 외과의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동현 씨, 제세동기 전원 켜고 아미오다론 주사기 내려놓으세요. 지금 저 심장은 약물로 안 잡힙니다. 바이오 칩의 전기적 저항 때문에 약물이 흡수되지 않아요. 물리적인 충격으로 심장 리듬을 완전히 재부팅해야 합니다.”
지원의 단호한 명령에 정동현 조무사는 침을 삼키며 제세동기 카트를 도현의 머리맡으로 밀었다.
“제세동 패들 주십시오. 충전 200줄(Joule).”
지원은 도현의 상의 셔츠를 완전히 찢어발겼다. 거칠고 다부진 그의 가슴팍 위에 선명한 Y자 흉터가 드러났다. 그녀는 전도성 젤을 패들에 바르고 도현의 오른쪽 쇄골 아래와 왼쪽 옆구리에 강하게 밀착시켰다.
“충전 완료되었습니다!”
“모두 물러서세요. 클리어.”
지원이 버튼을 누르자 도현의 거구가 전기 충격으로 인해 허공으로 들썩였다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EKG 모니터는 여전히 미친 듯이 춤추는 심실세동 파형을 그리고 있었다.
“안 들어먹어... 칩이 방어막을 치고 있어.”
지원의 미세 혈관 절대 촉각이 도현의 가슴 위에 얹은 패들을 통해 심장 내부의 이상 고주파 진동을 감지해 냈다. 칩이 외부 전격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360줄로 올리세요. 당장!”
“하지만 교수님, 이식 심장에 360줄은 심근 손상이 너무 심합...”
“이대로 두면 1분 안에 어시스톨(심정지)입니다! 충전하세요!”
지원의 서슬 퍼런 고함에 동현이 다급히 다이얼을 돌렸다. 고주파의 충전음이 메디컬 룸의 정적을 찢었다.
위이이잉-
“충전 완료!”
“클리어!”
두 번째 전격이 도현의 가슴을 때렸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도현의 몸이 크게 뒤틀렸다. 그러나 모니터의 붉은 선은 비웃듯 평탄한 직선을 그리며 멈춰 섰다.
삐이이이---------
완전한 심정지였다.
“안 돼...!”
지원은 제세동 패들을 던져버리고 도현의 가슴 위로 올라탔다. 그녀는 양손을 포개어 도현의 흉골 정중앙, Y자 흉터 바로 위에 얹었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이 시작되었다.
하나, 둘, 셋, 넷...
지원의 온 체중이 도현의 가슴으로 실렸다. 그녀의 손바닥을 통해 진우의 심장이 무참하게 짓눌렸다가 펴지는 물리적인 감각이 전해졌다. 눈물이 지원의 볼을 타고 흘러내려 도현의 피 묻은 가슴 위로 뚝뚝 떨어졌다.
“제발... 제발 깨어나... 나한테서 그 사람을 또 빼앗아가지 마...!”
그것은 도현을 향한 외침인 동시에, 그의 가슴속에 갇힌 약혼자의 영혼을 향한 처절한 애원 처세였다. 지원은 허리를 숙여 도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밀착시켰다. 따뜻한 숨결을 그의 기도로 불어넣었다. 사적 감정 개입 금지 서약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살려야 한다는 맹목적인 집념만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다시 흉부 압박이 이어졌다. 지원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도현의 창백한 얼굴에 튀었다. 정동현 조무사는 손을 떨며 EKG 모니터와 지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1분 30초가 경과한 절체절명의 순간.
툭...띡.
평탄하던 모니터의 붉은 선이 미세하게 위로 솟구쳤다. 이내 규칙적이고 웅장한 신호음이 메디컬 룸을 채우기 시작했다.
띡... 띡... 띡...
심박수 70회. 정상 동율동(Normal Sinus Rhythm)의 복원이었다.
“하아...!”
도현이 막혔던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을 들썩였다. 그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천천히 열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그의 검은 눈동자 속으로, 눈물 범벅이 된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지원의 얼굴이 들어왔다.
도현은 힘겹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슴의 통증을 참아내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지원의 뺨에 닿았다. 그의 손가락 끝이 그녀의 뜨거운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열리며, 가쁜 숨결 사이로 아주 낮고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 선... 아...”
도현이 속삭인 그 알 수 없는 이름이 차가운 메디컬 룸의 공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지원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굳어버리는 듯한 기이한 충격을 느끼며 도현의 젖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