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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에 갇힌 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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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서울의 밤은 끈적한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진 오피스텔 거실 바닥. 서지원은 무릎을 꿇은 채, 산산조조각이 난 액자 틀 사이로 드러난 한진우의 사진을 품에 안고 있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마른 손가락 끝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3년 전 실종되어 시신조차 찾지 못했던 약혼자. 그의 유일한 흔적이 비열한 사촌의 배신과 사채업자들의 폭력에 의해 더럽혀졌다.


“집 꼴이 말이 아니군, 서지원 의사.”


지원의 등 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느리게 고개를 돌린 지원의 눈동자에 암체어에 군림하듯 앉아 있는 남자가 담겼다. 권도현. 세인트 한강 병원 VIP 병동을 제집 안방처럼 탈출한 태성파의 젊은 보스. 그의 가슴팍에서는 총상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얇은 환자복 위로 붉은 혈흔이 번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냉혹한 여유가 서려 있었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 옆에는 행동대장 마강식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버티고 서 있었다.


지원은 핏방울이 떨어지는 손으로 사진을 더욱 세차게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심리 장벽 1단계의 차가운 냉소가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여긴 왜 온 거죠, 권도현 씨. 환자가 무단외출을 감행할 정도로 몸 상태가 가볍지 않을 텐데요. 당신 심장은 지금 겨우 연명하는 수준입니다.”


“내 걱정보다 네 동생 걱정을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도현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담배를 가볍게 굴리며 대꾸했다. 그의 시선이 지원의 피 묻은 손가락 끝을 집요하게 따라갔다. 그 순간, 도현의 왼쪽 가슴속 깊은 곳에서 기이할 정도로 격렬한 고동이 울렸다. 쿵, 쿵, 쿵쿠쿵. 규칙적인 박동 사이에 미세하게 끼어드는 삼차성 판막 마찰음. 지원의 눈물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의 가슴속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도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으나, 표정만큼은 여전히 차가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지민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지원이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다 무릎의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마강식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려 했으나, 도현의 차가운 눈빛 한 번에 제자리로 물러섰다.


“내가 아니라, 네 사촌 박성진이라는 쓰레기가 우리 계열 사채 사무실에서 네 의사 면허증을 담보로 3억을 빌렸더군. 그리고 그 채권 추심원들이 독일 뮌헨까지 기어 들어간 모양이고.”


도현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그의 옆에 서 있던 태성파 자금 관리인 황태수가 앞으로 걸어 나와 서류 한 장을 지원의 눈앞에 내밀었다.


[채무 변제 및 신용 보증 해제 증명서]


“3억 원의 원금과 이자는 방금 전 전액 상환 처리되었습니다. 또한, 독일 현지 지부에 지시를 내려 서지민 양의 자취방 주변을 맴돌던 추심원들을 완벽히 정리했습니다. 지민 양의 신변은 이제 안전합니다.”


황태수의 기계적인 설명에 지원의 호흡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동생이 무사하다는 안도감이 전신을 감쌌지만, 그와 동시에 찾아온 것은 지독한 굴욕감이었다. 자신의 삶을 파탄 낸 거대한 폭력의 고리를, 눈앞의 조폭 보스가 단 한 번의 손짓으로 해결해 주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존엄성을 짓밟았다.


“왜... 왜 그런 짓을 한 거죠? 난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어요.”


지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도현은 암체어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의 통증 때문에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츠러들었지만,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오피스텔 내부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도현이 지원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짙은 소독약 냄새와 고급스러운 시가 향이 섞여 풍겼다.


“공짜 구원은 없다, 서지원 의사.”


도현이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가죽 커버로 감싸인 두꺼운 계약서 한 장을 깨진 유리 파편 위로 툭 던졌다.


[개인 전담 주치의 상주 계약서]


“조건은 간단해. 네 사촌의 채무 3억 원을 대위변제해 주는 것은 물론, 네 동생 지민이의 독일 유학 자금과 현지 경호 비용을 전액 보장하겠다. 그 대가로 너는 내 개인 주치의가 되어 북한산 저택에 상주한다.”


“상주... 주치의요?”


“그래. 병원 밖으로의 무단 외출은 금지되며, 외부와의 사적인 통신 역시 철저히 제한된다. 오직 내 심장이 멈추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 그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지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가운 속 목걸이 체인에 걸린 티타늄 약혼반지가 그녀의 살결을 차갑게 파고들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약혼자 진우의 심장을 품고 있으면서, 이제는 그녀의 신체적 자유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난 흉부외과 전문의입니다. 조폭 보스의 저택에 갇혀 애완견처럼 맥박이나 짚어주는 짓은 하지 않아요. 이 계약은 거부하겠습니다.”


“거부할 수 있을까?”


도현이 비웃듯 나직하게 물었다. 그 순간, 지원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것은 세인트 한강 병원 기획조정실의 공식 발신 번호였다. 지원이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자, 기조실 행정 팀장의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


- “서지원 교수님. 기획조정실장 서한길 의원님의 직권 명령으로 알려드립니다. 금일 장준혁 선생의 제보로 가평 요양병원에서의 무단 의료 행위 및 임상시험용 약품 HL-9의 무단 반출 정황이 확증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서 교수님의 흉부외과 수술 집도 권한을 전격 박탈하며, 의사 면허 정지 징계위원회 회부 절차를 개시합니다. 내일부터 병원 출입을 금합니다.”


뚝. 통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지원의 손에서 스마트폰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서한길 실장과 장준혁의 행정적 칼날이 그녀의 숨통을 완벽히 끊어놓았다. 의사 면허가 정지되면 그녀는 동생의 유학 자금은커녕, 사촌의 빚을 갚을 길도 없었다. 병원이라는 백색 요새에서 쫓겨나 철저히 고립된 벼랑 끝.


도현은 바닥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구두끝으로 가볍게 밀어내며 지원을 내려다보았다.


“가운을 벗겨진 외과의가 세상 밖에서 무엇을 할 수 있지? 서한길의 칼날 아래에서 네 동생을 지킬 힘이 네게 있나?”


도현이 지원의 턱을 부드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쥐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 끝이 지원의 목덜미에 닿는 순간, 옷 안쪽의 티타늄 반지 목걸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현의 가슴속 심장이 마치 비명을 지르듯 쿵쾅거리며 터질 듯한 부정맥 파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현의 미간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이성을 잃지 않고 지원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너를 살릴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서지원. 내 저택으로 들어와 내 심장을 지켜라. 그러면 나 역시 네 의사 면허와 네 동생의 목숨을 지켜주지.”


지원은 턱을 쥔 도현의 손을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증오와 굴욕감이 온몸을 불태웠지만, 그녀의 차가운 이성은 이미 답을 내리고 있었다. 동생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저 남자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약혼자 진우의 심장 데이터를 독점적으로 채집하기 위해.


그녀는 제 발로 새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서명하죠.”


지원은 바닥에 떨어진 가죽 커버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핏방울이 묻은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쥐고, 자신의 이름을 정교하게 써 내려갔. 서지원. 세 글자가 새겨지는 순간, 그녀의 자유는 영원히 박탈당했다.


“탁월한 선택이군.”


도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강식에게 손짓했다.


지원은 깨진 진우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일어섰다.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서자, 복도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태성파 경호원 박철우가 삼엄한 벽처럼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귀에 꽂힌 인이어가 지원이 처한 완벽한 감금 상태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지하 주차장에 대기 중이던 도현의 거대한 방탄 리무진에 탑승했다. 차창 밖으로 빗줄기가 세차게 때렸고, 차량은 서울 도심을 벗어나 어두운 북한산 자락으로 깊숙이 들어갔.


높은 콘크리트 장벽과 CCTV 감시 카메라, 그리고 사설 경비원들이 삼엄하게 경비하는 북한산 저택의 요새. 철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지원의 귓전을 때렸다. 이제 그녀는 외부 세계와 완벽히 차단된 채, 어둠 속의 포식자의 영토에 갇혔다.


경호원 박철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저택 2층에 마련된 개인 주치의 방에 짐을 푼 지원. 방 안은 미니멀하지만 감시 카메라가 도처에 배치되어 있어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전해졌다.


지원이 침대 머리맡에 진우의 깨진 사진 액자를 올려놓는 순간,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마강식이 걸어 들어왔. 그의 손에는 은밀하게 빛나는 sleek한 검은색 특수 장치가 들려 있었다.


“서지원 의사. 보스께서 내리신 주치의 행동 제한 수칙에 따라, 이 장치를 착용하셔야겠습니다.”


마강식이 지원의 마른 손목을 잡아채더니, 검은색 스마트 워치를 강제로 채워 넣었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자마자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이중 생체 잠금 장치가 가동되었다.


“이건... 뭐죠?”


지원이 손목을 흔들며 장치를 풀려 했으나, 붉은색 LED 불빛이 깜빡이며 절대 해제되지 않는 삼엄한 신호를 보냈다.


“GPS와 실시간 체온, 맥박 모니터링 기능이 내장된 특수 스마트 워치입니다. 저택 보안 서버와 실시간으로 연동되어 있어, 본인 외에는 해제가 불가능합니다. 저택 외부로 탈출을 시도하거나 생체 신호에 이상이 감지될 경우, 즉각 경보가 울리고 경호팀이 출동합니다.”


마강식이 지원의 눈을 차갑게 응시하며 쐐기를 박았다.


“이제부터 이 시계가 의사님의 목줄입니다. 허튼 생각은 하지 마시길.”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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