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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약한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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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의 컴퓨터 화면에 뜬 ‘네트워크 가로채기 및 극비 포트 도청 감지됨’이라는 붉은색 경고등이 요란하게 명멸했다. 차가운 전산실의 서스펜스가 좁은 연구실 안을 가득 채웠다.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극단적인 공포 속에서 지원은 굳어버린 손가락을 움직여 컴퓨터 본체 뒤편의 랜선을 단숨에 뽑아버렸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의 붉은 불빛이 꺼졌지만, 그녀의 흉골 아래에서 뛰는 심장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평 요양병원에서부터 이어온 피로와 긴장감이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도현의 심음 분석 데이터를 외부 안전한 드라이브로 백업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서한길 실장의 감시망이 이미 그녀의 턱밑까지 들이닥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 책상 위에 놓인 연구실 전화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울리기 시작했다. 지원은 침을 삼키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지워나! 나다, 이모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이모 박혜숙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약국을 운영하며 지원의 비밀 처방을 돕던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쾌활함을 잃고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 “지금 당장 네 방에서 나와야 해! 장준혁이가 기조실 감사팀 애들 데리고 네 연구실로 올라가고 있어! 약품 보관 대장에서 미승인 면역조절제 HL-9 반출 흔적을 찾아냈다고 난리가 났단 말이다. 네 사물함이랑 서랍까지 다 털 기세야!”


“이모, 그게 무슨...”


- “시간 없어! 일단 피해! 혜민 약국 장부는 내가 어떻게든 가짜 처방전으로 맞춰보겠지만, 병원 내부 감사는 내 권한 밖이야. 빨리!”


뚝. 전화가 끊겼다. 지원은 본능적으로 책상 위의 리트만 디지털 청진기를 움켜쥐고 가방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목걸이 체인에 걸어 숨겨둔 진우의 티타늄 약혼반지를 가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유일한 정서적 안식처이자 진실을 밝힐 무기가 서한길의 손에 넘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쾅!


지원이 가방 지퍼를 채우기도 전에, 연구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하얀 의사 가운을 입었으나 눈빛만큼은 사냥개처럼 살기등등한 장준혁이 감사팀 직원 세 명을 거느리고 들어섰다.


“서지원 조교수. 밤늦게까지 연구실에서 고생이 많군.”


준혁은 차가운 금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뒤에 선 감사팀 직원들의 얼굴은 백색 대리석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죠, 장준혁 선생? 허락도 없이 남의 연구실에 들이닥치는 건 예의가 아닐 텐데요.”


지원은 책상 모서리를 짚으며 차갑게 응수했다. 심리 장벽 1단계의 냉소적인 가면이 그녀의 얼굴을 단단히 덮었다. 손끝의 미세한 떨림을 감추기 위해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예의를 차릴 상황이 아니라서 말이지.”


준혁은 턱짓으로 감사팀 직원들에게 수색을 지시했다. 직원들이 지원의 만류를 무시하고 사물함과 서랍을 거칠게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의학 서적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서류들이 낱낱이 파헤쳐졌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건 엄연한 사생활 침해이자 권한 남용입니다!”


“권한 남용? 서 실장님의 정식 결재를 받은 행정 감사다.”


준혁이 지원의 코앞까지 다가와 나직하게 읊조렸다.


“서 교수, 네가 가평에서 무단으로 수술실을 이탈해 정체불명의 총상 환자를 집도했다는 기록을 확보했다. 게다가 우리 병원 임상시험용 약품 보관고에서 미승인 면역조절제인 HL-9이 비정상적으로 유출된 정황까지 포착됐지. 네가 그 조폭 보스를 살리려고 병원 약품을 빼돌린 게 아니라면, 이 야간 수색을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


지원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준혁의 말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단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환자의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서 외과의로서 응급 처치를 한 것은 의료법상 정당방위입니다. 그리고 약품 반출이라니요? 증거도 없이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건 곤란합니다.”


“증거? 곧 나오겠지.”


준혁의 지시를 받은 직원이 지원의 개인 사물함 가장 깊은 곳까지 뒤졌지만, 그들이 찾는 HL-9 앰플은 나오지 않았다. 지원이 이미 가평에서 도현에게 전량 투여했기 때문이었다. 디지털 청진기 역시 지원의 가방 속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었다.


아무런 물증도 나오지 않자 준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지원의 가방을 뚫어지라 노려보았지만, 공식적인 영장 없이는 의사의 개인 소지품을 강제로 빼앗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운 좋게 빠져나간 모양인데, 서지원 교수.”


준혁은 지원의 귀에 대고 서늘하게 속삭였다.


“서 실장님이 널 주시하고 계셔. 조폭 보스랑 엮여서 의사 면허가 날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처신 똑바로 해. 징계위원회 소집 서류는 이미 작성 끝났으니까.”


준혁과 감사팀 직원들이 폭풍처럼 휩쓸고 나간 연구실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지원은 떨리는 다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사방이 차단된 완벽한 사회적 고립감이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성우진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려 전화를 걸었지만, 병원 내부의 행정 징계는 법원의 가처분 신청이 나오기 전까지는 막기 어렵다는 절망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지원은 어두운 방에서 무릎을 안고 눈물을 삼켰다. 진우를 잃은 뒤 그녀의 삶은 늘 살얼음판 같았지만, 오늘처럼 사방이 벼랑 끝인 적은 없었다.


그때, 주머니 속의 개인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발신인은 독일 국제전화였다. 지원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며 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민아? 무슨 일이야?”


- “언니... 언니, 어떡해... 무서워 죽겠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동생 서지민의 목소리는 극도의 공포로 젖어 있었다. 독일 뮌헨의 차가운 유학 생활 속에서도 늘 밝게 바이올린을 켜던 동생이었다. 그런 지민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며 흐느끼고 있었다.


- “어떤 덩치 큰 동양인 남자들이 내 자취방 문 앞을 막아서고 계속 문을 두드려... 언니가 한국에서 사채를 썼다면서, 당장 이자를 안 내면 내 바이올린을 부수고 나를 끌고 가겠다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사채를 쓰다니?”


지원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렸다. 지민은 지원이 첫 월급으로 선물해 준 올드 바이올린을 목숨처럼 아끼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타국에서 그런 위협을 받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언니 이름으로 된 보증서랑 의사 면허증 사본을 보여줬어... 언니, 정말 사채 쓴 거야? 나 너무 무서워... 현지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경찰이 오기 전에 내 손가락을 부러뜨리겠다고 협박해...”


“지민아, 진정해. 언니 말 잘 들어. 문 절대 열어주지 말고, 방 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 언니가 지금 바로 해결할 테니까, 제발 조금만 버텨줘.”


전화를 끊은 지원의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단 한 명의 이름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종사촌 박성진.


지원은 분노로 떨리는 손가락으로 박성진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너머로 시끄러운 도박장의 기계 소음과 성진의 비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


- “어, 지원아! 안 그래도 내가 너한테 연락하려고...”


“박성진, 너 인간 쓰레기야? 네가 어떻게 내 이름으로 사채를 쓸 수가 있어! 지민이 유학 자금까지 건드리고, 그 불쌍한 애 자취방까지 조폭들을 보내?”


지원의 목소리가 극도의 분노로 갈라졌다.


- “지원아, 미안해! 진짜 죽을죄를 지었어! 사설 도박장에서 한 판만 더 돌리면 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채업자들이 네 의사 면허증 사본만 있으면 고율로 대출해 준다고 해서... 내가 진짜 미쳤었나 봐. 근데 그 새끼들 보통 놈들이 아니야. 태성파 계열의 사채 사무실이라는데, 돈 안 갚으면 지민이 장기라도 적출해서 팔겠다고 협박하잖아!”


“장기... 적출?”


그 단어가 지원의 뇌리를 때리는 순간, 3년 전 진우의 실종 사건이 오버랩되며 극심한 이명이 울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통제할 수 없는 공포가 소용돌이쳤다. 박성진은 수화기 너머로 계속해서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징징댔지만, 지원은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지원은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강남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사방이 차단된 사회적 고립과, 동생의 신변을 위협하는 사채업자들의 물리적 압박이 그녀의 목줄을 죄어왔다. 비가 오려는지 밤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가운 깃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오피스텔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지원은 자신의 집 앞 복도에 서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도어락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고, 철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지원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시간이 멈춰 있던 12평의 소박한 방은 완벽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의학 서적들은 찢겨 사방에 널려 있었고, 가구들은 전부 뒤집어져 있었다. 화장대 거울은 날카롭게 깨져 바닥에 파편을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원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액자였다.


진우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


액자의 유리는 산산조각이 나 진우의 웃는 얼굴 위로 잔인한 금을 긋고 있었다.


“아...”


지원의 입에서 짐승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깨진 액자 파편을 손으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그녀의 마른 손가락 끝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진우 씨... 미안해요... 내가 지키지 못해서...”


지원은 깨진 진우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홀로 어두운 방바닥에서 오열했다. 사촌의 배신, 동생의 위기, 병원의 감사, 그리고 짓밟힌 약혼자의 추억까지. 그녀가 평생 쌓아온 이성과 의학적 품위는 이 잔혹한 현실의 초법적 무력 앞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사방이 벼랑 끝이었다. 그녀가 디디고 서 있는 세상의 가장 약한 고리가 한순간에 끊어져 내린 기분이었다.


그때, 어둠 침침한 방 안쪽에서 나직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 꼴이 말이 아니군, 서지원 의사.”


지원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너머로, 난장판이 된 거실 한복판의 유일하게 멀쩡한 1인용 암체어가 보였다.


그 상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권도현.


그는 병원의 VIP 환자복 위에 검은색 맞춤 코트를 걸치고 있었고, 가슴의 붕대 틈새로 붉은 피가 살짝 배어 나와 있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고, 입가에는 서늘하고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곁에는 태성파의 행동대장 마강식이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도현은 손가락 사이에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피를 흘리는 지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진우의 심장이, 지원의 눈물을 마주하자 기이할 정도로 격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내 주치의가 이런 쓰레기 같은 곳에서 울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도현의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을 지배하듯 울려 퍼졌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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