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유산
위이이잉—! 위이이잉—!
붉은 비상 경보등이 회전하며 내뿜는 기괴한 불빛과 심정지를 알리는 날카로운 경보음이 세인트 한강 병원 지하 복도를 가득 채웠다. 김윤아가 발령한 가짜 코드 블루 덕분에 지하 2층 임상약품 보관실 앞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장준혁과 보안 요원들의 시선이 엘리베이터 표시등으로 쏠린 찰나, 서지원은 주저 없이 비상계단 철문을 밀치고 몸을 던졌다.
가죽 가방을 품에 안은 손가락 끝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가방 안쪽, 부드러운 융 천 사이에 끼워진 10개의 유리 앰플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세하게 부딪히며 서늘한 소리를 냈다. 권도현의 심장을 살릴 유일한 면역조절제, HL-9이었다.
지원은 주차장으로 곧장 내려가는 대신, 본관 12층 옥상 정원으로 향하는 비상 계단을 향해 달렸다. 이미 주차장 출구는 서한길 실장의 명령을 받은 보안팀이 차단했을 터였다. 최성필과 마강식이 대기하는 방탄 리무진으로 가기 전, 그녀에게는 반드시 확인해야 할 잔혹한 약속이 남아 있었다.
허덕이는 숨을 몰아쉬며 옥상철문을 밀어젖히자, 서울 도심의 차가운 새벽 공기가 지원의 창백한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자욱한 진눈깨비와 아침 안개가 뒤섞인 옥상 정원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저 멀리 회색빛 빌딩 숲 위로 붉은 서광이 겨우 번져가고 있었다.
정원 구석, 얼어붙은 주목나무 숲 그늘 아래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낡은 가죽 재킷의 깃을 올린 채, 깊게 팬 미간 주름 너머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사내. 죽은 약혼자 진우의 아버지이자 은퇴한 강력계 형사 반장, 한만수였다.
“아버님.”
지원의 갈라진 목소리에 만수가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매서운 사냥개 같은 눈빛에 깊은 우려와 부성애가 스쳐 지나갔. 만수는 다급히 다가와 지원의 마른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운 소매 너머로 드러난 지원의 손목에 남은 시퍼런 멍 자국을 보며, 그의 거친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원아…… 무사했구나. 그 조폭 놈들의 저택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다. 장만철 그 부패한 개새끼가 너를 범인 은닉으로 기소하겠다고 설쳐대고 있어.”
“전 괜찮아요, 아버님. 제 안위는 상관없어요. 그것보다…… 찾으셨다는 자료는요?”
지원은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만수의 낡은 가죽 가방을 응시했다. 만수는 묵묵히 입술을 깨물더니, 가방 안쪽 깊숙한 곳에서 빛바랜 황색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봉투 겉면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무게감은 옥상 정원에 휘몰아치는 칼바람보다 더 차가웠다.
“3년 전이다. 진우가 실종되던 그 비 오던 밤, 질병관리청 장기이식관리센터(KONOS)의 비밀 전산 서버 로그 기록을 복구했다. 퇴직한 내 옛 동료들과 사설 탐정 조달호가 목숨을 걸고 빼낸 원본 데이터다.”
만수의 손가락이 서류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서 흘러나온 것은 정교한 전산 로그 인쇄본과 비공식 수술 기록지 사본이었다.
“이것 좀 보거라.”
만수가 가리킨 타임라인을 확인한 순간, 지원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3년 전 10월 14일 밤 11시 45분, 한진우 교통사고 발생.
밤 11시 52분, 장기 기증 적합성 매칭 전산망 가동.
밤 11시 55분, 수혜자 권도현 최종 매칭 완료.
“이게…… 어떻게 가능하죠?”
지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의학적 상식이 뇌리를 때렸다.
“뇌사 판정 위원회가 소집되기도 전에, 사고 발생 단 10분 만에 기증 적합 판정이 나고 수혜자가 지정되었어요. 이건…… 전산망 조작이에요. 누군가 진우 씨가 죽기도 전에 이미 그의 심장을 권도현에게 주기로 결정해 놓았던 거예요!”
“그래. 조작이다.”
만수의 목소리에 서린 분노가 빗소리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메디팜의 최용환 회장이 장기기증센터의 전산 직원 유길자에게 거액의 뇌물을 건네고 전산망을 완전히 장악했던 게지. 하지만 진짜 추악한 진실은 그 뒤에 있다. 지원아, 이 수술 기록지 하단을 보아라.”
만수가 건넨 또 다른 서류, 비공식 장기 적출 수술 기록지의 사본을 받아 든 지원의 시야가 일순간 암전되는 듯했다. 수술실 명칭은 ‘세인트 한강 병원 지하 4층 제한구역’. 그리고 수술을 집도한 메인 서전(Surgeon)의 서명 란에 흘려 쓰인 필체.
[ 집도의 : 서한길 ]
지원의 숨통이 완전히 막혀왔다. 온 신경이 마비되는 듯한 극심한 공황의 전조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옥상 난간을 붙잡았다.
“서…… 한길 실장…….”
그 이름은 지원의 아버지를 의료 사고로 위장해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이자, 현재 세인트 한강 병원의 무소불위 실세였다. 그 악마 같은 남자가, 자신의 약혼자였던 진우의 가슴을 직접 째고 심장을 꺼낸 도살자였다는 사실이 지원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내가 매일 아침 인사를 건네고, 의학적 경의를 표하며 걸어 다녔던 이 백색의 요새가…… 내 약혼자가 살아있는 채로 장기를 적출당한 도살장이었다니.
“아아악……!”
지원은 참지 못하고 차가운 난간에 머리를 기댄 채 비명을 지르듯 오열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목걸이에 걸린 티타늄 약혼반지 위로 떨어졌다. 진우의 심장이 지금 그 조폭 보스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이유, 그리고 그 수술을 집도한 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의 사슬이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지원아, 정신 차려야 한다.”
만수가 오열하는 지원의 어깨를 강하게 쥐어 잡았다. 그의 눈에도 붉은 핏발과 함께 눈물이 고여 있었다.
“우리가 무너지면 진우의 억울한 죽음은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힌다. 저놈들은 법망 위에 서 있어. 오태섭 국회의원의 사법 압력으로 내사마저 종결된 상태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저 괴물들을 단죄할 수 없다.”
만수는 품 안에서 낡고 묵직한 황동 열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세월의 때가 타 누렇게 바랜, 하지만 정교한 홈이 파인 기괴한 형태의 열쇠였다. 만수는 지원의 떨리는 손바닥을 강제로 펴고, 손바닥에 남은 자창 흉터 바로 위에 그 열쇠를 쥐여주었다.
“이건…… 뭐죠?”
“진우가 실종되기 바로 전날 밤, 극도로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찾아와 맡겼던 열쇠다. 자신이 만약 사고를 당해 돌아오지 못한다면, 오직 너에게만 이 열쇠를 전해달라고 하더군.”
만수의 눈빛이 옥상의 안개보다 더 깊고 서늘해졌다.
“진우가 자란 성 안나 고아원 지하 창고 안쪽, 낡은 보일러실 뒤편에 비밀 공간이 있다. 진우는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직감하고, 메디팜의 불법 인체 실험 보고서 원본과 도현의 가슴에 박힌 바이오 칩 설계 소스 코드를 백업해 그곳에 숨겨두었다. 이 열쇠가 그 금단의 상자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황동 열쇠의 차가운 금속 촉감이 지원의 상처 입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 통증이 오열하던 지원의 심장을 차갑게 식혔다. 슬픔은 이내 얼음처럼 단단하고 예리한 복수심으로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지원은 고개를 들어 만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마르고, 그 자리에는 오직 서한길과 메디팜을 통째로 불살라버리겠다는 가혹한 독기만이 서려 있었다.
“알겠어요, 아버님. 내 손으로…… 그 상자를 열겠어요. 그리고 그들의 심장을 멈추게 만들겠어요.”
지원이 열쇠를 꽉 쥐는 순간, 옥상 철문 너머 비상계단에서 무거운 구두굽 소리와 함께 무전기의 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장준혁의 수색팀이 옥상으로 좁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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