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요새로의 잠입
장만철이 저택 정문을 빠져나간 직후, 지원은 대포폰을 들어 병원 약제부의 송미경 약사에게 긴박하게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음이 채 세 번을 울리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빗소리보다 더 서늘한 미경의 목소리가 흘러나왔.
—지원아, 지금 병원 난리 났어. 장만철 형사가 방금 기조실장실에 들러서 붉은색 바코드 라벨을 서한길 실장한테 넘겼어. 서 실장이 약제부 전산망을 열어서 HL-9 반출 이력을 샅샅이 대조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린 상태야. 장준혁이 감사팀을 이끌고 약제부로 내려오고 있어. 네 의사 계정은 이미 정지 처분 단계에 들어갔어.
미경의 다급한 속삭임에 지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왼쪽 손바닥의 주사 바늘 자창이 욱신거리며 통증을 더해왔다. 장만철이 침실 바닥에서 훔쳐 간 바코드 라벨이 기어이 서한길의 손에 들어가며 그녀의 목줄을 죄어온 것이다.
저택 지하 메디컬 룸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권도현은 ECLS(휴대용 인공 심폐기)에 의지해 간신히 호흡만 유지하고 있었고, 그의 심장이 일으키는 급성 거부 반응을 가라앉힐 유일한 약물인 ‘HL-9’의 저택 내 비축분은 단 한 앰플도 남지 않았다. 지금 당장 약물을 주입하지 않으면, 도현의 가슴속에서 뛰는 진우의 심장은 영구적인 심근 괴사 단계로 접어들 터였다.
“미경 선배, 나 지금 병원으로 가요.”
—미쳤어? 지금 병원 본관 전체가 너 잡으려는 덫이야! 서 실장이 경비 요원들한테 네 얼굴 사진까지 뿌려놨어. 들어오는 즉시 불법 약물 유출 혐의로 경찰에 인계하겠대!
“도현 씨 심장이 멈춰가고 있어요. 진우 씨의 심장이…… 그 괴물 같은 가슴속에서 죽어가고 있단 말이에요. 선배, 제발 도와줘요.”
지원의 목소리에 서린 처절한 집념에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수간호사 혜원 언니한테 연락해 둘게. 흉부외과 마스터 키카드를 윤아 편으로 보낼 테니까, 응급실 지하 통로로 진입해. 하지만 기억해, 지원아. 네 의사 면허가 완전히 날아갈 수 있는 마지막 도박이야.
지원은 대포폰을 끊고 손목의 차가운 GPS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보았다. 도현이 채워둔 이 속박의 족쇄는 그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저택 보안 서버에 송출하고 있었다. 지원은 가운 깃을 단단히 여미고 주머니 속에 일회용 무균 메스를 챙겨 넣었다.
“마 대장님,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
침실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를 지키고 서 있던 마강식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지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왼손에는 여전히 피 묻은 군용 단도가 쥐여 있었다.
“보스의 약물이 바닥났습니다. 병원 본관의 특수 보관고에 침투해야 해요. 서 실장이 덫을 놓았겠지만, 지금 가지 않으면 권도현 씨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합니다.”
강식은 묵묵히 지원의 창백한 얼굴을 응시하다가, 이내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성필에게 방탄 리무진을 대기시키라 하겠습니다. 저와 정예 대원들이 병원 외곽까지 엄호하겠습니다. 하지만 본관 내부까지 조폭인 저희가 들어가면 오히려 의사 선생의 정체가 탄로 납니다. 안에서는 혼자 버티셔야 합니다.”
“충분합니다. 안에서의 싸움은 의사인 내 영역이니까요.”
지원은 가운 자락을 휘날리며 저택의 어두운 계단을 내려갔다. 폭우가 잦아들며 짙은 안개가 북한산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리무진은 미끄러지듯 서울 도심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
새벽 5시 40분. 서울 강남의 세인트 한강 병원 본관은 거대한 백색 요새처럼 도심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었다. 차갑고 고고한 백색 대리석 외벽이 새벽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안개 속에서 기괴한 위용을 뽐냈다. 평소라면 집도의로서 당당히 걸어 들어갔을 정문이었지만, 오늘 지원은 범죄자처럼 어둠을 틈타야 했다.
리무진이 응급의학과 지하 하역장 사각지대에 멈춰 섰다. 운전사 최성필이 차 문을 열자, 지원은 가방을 꽉 쥔 채 빗물이 고인 아스팔트를 딛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지하 비상구 철문 앞, 낡은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응급의학과 전문의 김윤아가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윤아는 지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의 팔을 낚아채 어두운 린넨실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지원아, 너 진짜 미쳤어! 병원 보안팀이 흉부외과랑 약제부 주변 CCTV를 실시간으로 감시 중이야. 장준혁 그 쓰레기가 서 실장 밑에서 조교수 임용장 받으려고 눈이 벌게져서 돌아다니고 있다고!”
윤아는 주머니에서 수간호사 정혜원이 전달해 준 흉부외과 마스터 카드키를 지원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차가운 플라스틱의 촉감이 지원의 상처 입은 손바닥에 닿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지만, 지원은 오히려 그 통증으로 정신을 바짝 차렸다.
“고마워, 윤아 야. 혜원 수간호사님은?”
“혜원 언니가 지금 약제부 감사팀의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일부러 흉부외과 수술실 비상 장비 점검을 신청해서 감사팀 인원들을 그쪽으로 유인해 놨어. 지금이 유일한 기회야. 지하 2층 임상약품 특수 보관고로 가. 보관고 바코드 스캐너를 찍으면 전산 경보가 울리니까, 마스터 키카드로 수동 개방 장치를 돌려야 해.”
“알았어. 5분 안에 끝내고 나올게.”
지원은 윤아의 어깨를 한 번 꽉 쥔 뒤, 린넨실 문을 열고 차가운 대리석 복도로 나섰다.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숙인 채, 의학 도서관 뒷길을 거쳐 지하 2층으로 향하는 비상 계단으로 몸을 던졌다.
지하 2층은 일반 환자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파이프가 노출된 천장 아래로 차가운 금속성 소음이 웅웅거리며 울렸다. 지원은 벽면에 설치된 소형 감시 카메라의 각도를 계산하며 사각지대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식약처 미승인 임상약품 보관실’의 두꺼운 강철 문 앞에 도달했다.
지원은 떨리는 손으로 혜원의 마스터 키카드를 리더기에 접촉했다.
띠리릭.
초록색 불빛이 들어왔지만, 지원은 손잡이를 돌리지 않았다. 바코드를 찍고 문을 열면 약제부 메인 서버에 즉각 반출 경고 팝업이 뜰 터였다. 지원은 가방에서 정밀 드라이버를 꺼내 리더기 하단의 수동 비상 개방 홀에 밀어 넣고 시계 방향으로 강하게 돌렸다.
철컥.
기계적인 마찰음과 함께 육중한 강철 문이 서서히 열렸다. 보관실 내부는 영하 4도의 차가운 냉기와 함께 질소 가스의 미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원은 안으로 들어가 수많은 유리 보관장 중 ‘T-Project’ 라벨이 붙은 초저온 냉동고 앞으로 다가갔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붉은색 라벨이 붙은 작은 유리 앰플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특수 면역조절제 HL-9.’
도현의 심장 박동을 유지하고, 진우의 세포가 도현의 몸 안에서 파괴되는 것을 막아줄 유일한 생명줄. 지원은 주저 없이 냉동고 문을 열고 차가운 HL-9 앰플 10개를 꺼내 가죽 가방 안쪽의 부드러운 천 사이에 끼워 넣었다. 유리 앰플들이 부딪히며 내는 째깍거리는 소리가 마치 도현의 심장 박동 소리처럼 지원의 귀를 때렸다.
가방 지퍼를 채우고 몸을 돌려 보관실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서지원 조교수?”
차가운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복도 끝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차가운 금테 안경을 쓴 남자. 기조실장 서한길의 충직한 사냥개이자 지원의 만년 라이벌, 장준혁이었다. 그의 뒤에는 병원 사설 보안 요원 세 명이 삼엄한 표정으로 복도를 차단하고 있었다.
지원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의 손이 차갑게 식어갔다.
“장준혁 선생. 이 새벽에 여긴 무슨 일이죠?”
지원은 심리 장벽 1단계의 차가운 가면을 굳건히 쓰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의사 면허 정지 징계가 의결되기 직전인 대기 발령 상태의 의사가, 이 시간에 약제부 제한구역 마스터 키를 도용해 임상 약품실에 들어오다니. 서 교수, 너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기나 해?”
준혁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지원의 어깨에 걸린 가죽 가방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마약류 및 고가 약품 무단 반출 금지령 위반. 이건 단순 징계 수준이 아니라 즉각적인 면허 취소에 형사 고발 대상이야. 서 실장님이 장 형사에게 받은 라벨을 보고 전산망을 추적하라고 하셨을 때 반신반의했는데…… 기어이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왔군.”
준혁이 손짓하자 뒤에 서 있던 보안 요원들이 지원을 압박하며 다가왔다. 복도의 차가운 백색 대 Marble 바닥 위로 그들의 무거운 구두굽 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가방 넘겨, 서지원. 네 손으로 직접 열어서 안에 든 걸 보여주면, 검찰에 넘길 때 정상참작이라도 해달라고 서 실장님께 말씀드려 보지.”
준혁이 손을 뻗어 지원의 가죽 가방끈을 강제로 낚아챘다.
지원은 반사적으로 가방을 뒤로 빼며 준혁의 손을 쳐냈다.
“손 대지 마세요, 장준혁 선생. 난 의사로서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처방을 집행했을 뿐입니다.”
“환자? 그 조폭 대가리 권도현이 네 환자야? 살인마 주치의 노릇을 하더니 이제 뇌까지 오염된 모양이군!”
준혁의 얼굴이 열등감과 탐욕으로 일그러지며 지원의 멱살을 잡듯이 가방을 거칠게 빼앗으려 했다. 가방 안에서 HL-9 유리 앰플들이 미세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지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대로 가방을 빼앗기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도현은 죽을 것이고, 진우의 심장은 영원히 멈출 터였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 복도 천장의 적색 비상 경보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날카로운 경보음이 지하 복도를 찢어발겼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동시에 병원 전체 스피커를 통해 응급의학과 전문의 김윤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
[코드 블루! 코드 블루! 7층 VIP 병동 1201호, 심정지 환자 발생! 흉부외과 및 응급의학과 의료진은 즉시 현장으로 출동하십시오! 반복합니다, 1201호 코드 블루!]
“뭐, 뭐라고? 1201호?”
장준혁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1201호는 권도현이 가명으로 입원해 있던 특실이자, 기조실에서 가장 민감하게 관리하던 VIP 구역이었다. 준혁의 시선이 일순간 분산된 틈을 타, 지원은 온 힘을 다해 가방끈을 쥔 준혁의 손목을 꺾어 올렸다.
“윽!”
준혁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는 찰나, 지원은 몸을 돌려 지하 비상계단을 향해 폭풍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잡아! 저 년 잡아! 가방에 약 들어 있어!”
준혁의 광기 어린 비명이 등 뒤에서 울렸고, 보안 요원들의 거친 발소리가 차가운 콘크리트 계단을 타고 지원의 뒤를 맹렬히 추격해 왔다.
지원은 가방을 가슴에 품은 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렸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가방 안의 유리 앰플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조금만 더…… 제발, 진우 씨…… 내게 힘을 줘.’
지원은 비상계단 방화문을 밀치고 지하 3층 주차장으로 뛰쳐나갔다. 어두운 주차장의 콘크리트 바닥 위로 지원의 숨소리가 거칠게 흩어졌다.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최성필의 방탄 리무진의 전조등이 어둠을 뚫고 하얗게 켜지며 지원을 향해 돌진해 왔다.
차 문이 열리고 마강식이 손을 뻗어 지원의 팔을 낚아채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쾅!
차 문이 닫히는 순간, 장준혁과 보안 요원들이 주차장 출구로 뛰어내려와 차량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최성필은 거침없이 가속페달을 밟아 주차장 차단기를 부수며 백색 요새의 어둠 속을 탈출했다.
지원은 가죽 가방을 꽉 쥔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가방 안의 HL-9 앰플들은 무사했다. 하지만 백색 요새의 모든 감시 카메라에 그녀의 얼굴이 찍혔고, 이제 세인트 한강 병원은 그녀에게 완벽한 금단의 구역이 되었다. 서한길 실장이 가해올 다음 행정적 파멸의 칼날이 지원의 숨통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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