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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시간의 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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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차의 범퍼가 위병소의 철문을 사정없이 들이받으려는 찰나, 저택 내부의 스피커를 통해 마강식의 서늘한 무전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만철 형사.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무단으로 진입하면, 공무집행 중 과실치사 및 사유지 무단 침입으로 네 옷을 벗겨주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마강식의 음성은 빗소리를 뚫고 차갑게 울려 퍼졌다. 위병소 앞, 붉고 푸른 경광등이 진눈깨비 섞인 장대비를 어지럽게 가르고 있었다. 장만철은 이빨을 드러내며 비열하게 웃었다.


“마강식 대장님, 겁대가리를 상실하셨나? 내사 영장 들고 온 강력계 형사한테 총질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이 바닥 타이어 자국이랑 가평 총격전 현장 흔적이 아주 자매처럼 똑같더만!”


장만철이 태블릿 PC를 흔들며 소리쳤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서지원이 철문 너머로 걸어 나왔다. 비에 젖어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에는 서늘한 카리스마가 감돌았다.


“장 형사님, 그 영장은 내사 단계일 뿐입니다. 그리고 권도현 회장님은 현재 세인트 한강 병원 VIP 병동 1201호에 합법적으로 입원 중이시며, 이곳은 감염병 예방법에 따라 철저히 격리된 원격 진료 공간입니다. 전산망을 확인해 보시죠.”


지원의 단호한 말에 장만철은 혀를 차며 부하의 태블릿을 빼앗아 들었다. 놀랍게도 병원 전산망에는 권도현이 VIP 병동에 정상 입원 중인 것으로 완벽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지원과 정보보안 팀장 강두식이 구축한 가상 연동 시스템이 사법적 칼날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런 씨발, 대형 로펌 새끼들이 뒤에서 또 손을 썼구만…….”


상부로부터 무리하게 진입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무전이 날아오자, 장만철은 분노에 차 빗속에서 침을 뱉었다. 결국 순찰차들은 저택 외곽 진입로를 포위한 채 대기 상태로 전환했다. 저택은 일시적인 안전을 확보했으나, 외부 약물 조달이 완전히 차단된 완벽한 고립무원의 요새가 되었다.


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운에 묻은 빗물을 털어내고 2층 도현의 침실로 향했다. 방 안은 휴대용 인공 심폐기(ECLS)의 낮고 기계적인 기계음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권도현은 여전히 깊은 혼수 상태에 빠진 듯 창백했다. 가슴팍의 붕대 아래로 Y자형 수술 흉터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지원이 그의 활력징후를 체크하기 위해 다가가 손목의 맥박을 짚는 순간이었다.


스윽.


도현의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깊고 어두운, 심연을 닮은 흑색 눈동자가 지원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지원 의사…….”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젖은 흙처럼 거칠고 낮았다.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도현의 눈빛에 묘한 열기와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깨어나셨군요. 움직이지 마세요. 아직 심박수가 불안정합니다.”


지원은 청진기를 쥔 채 차갑게 선을 그으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도현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숨을 깊게 몰아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기이한…… 꿈을 꿨어.”


“꿈이요? 진정제가 아직 덜 풀려서 환각을 보신 겁니다.”


“아니,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비극적인…… 어떤 남자의 지워진 시간의 기억이었지. 내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공간이었어.”


도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의 가슴속 심장이 쿵, 쿵, 하고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EKG 모니터의 초록색 그래프가 가파르게 요동쳤다. 도현이 진우의 기억 파편을 꿈으로 꾸는 현상이 실시간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자욱한 저수지 근처였어. 아주 축축하고 차가운 지하실…… 사방이 콘크리트 벽이었고, 녹슨 쇠창살이 가로막고 있었지.”


지원의 손끝이 굳어졌다. 안개가 낀 저수지…… 축축한 지하실…….


“그 방 천장에는 붉은색 수술용 조명이 켜져 있었어. 그리고 기괴한 의료 기계들이 놓여 있었지. 은색 챔버에는 ‘생체 적합성 하이브리드 챔버’라고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유전자 제어 칩 이식기’라는 특허 장비가 놓여 있었어. 어떤 청년이 그 수술대 위에 묶인 채 처절하게 울부짖고 있더군.”


‘유전자 제어 칩 이식기’. ‘생체 적합성 하이브리드 챔버’.


지원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그것은 3년 전 실종된 그녀의 약혼자, 한진우가 독자적으로 개발해 특허를 출원했던 생체 장비의 고유 명칭들이었다. 세상에 단 세 사람—진우와 지원, 그리고 메디팜의 극비 연구원들 외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기밀 명칭이었다.


진우의 죽음은 빗길 교통사고가 아니었다. 도현에게 이식하기 위해 정교하게 기획된 ‘표적 장기 적출 살인’이었던 것이다. 지원은 전율과 함께 밀려오는 참혹한 슬픔에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침대 위로 몸을 숙여 도현의 환자복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고, 목덜미 가운 안쪽에서 흘러나온 은색 체인의 티타늄 약혼반지가 도현의 쇄골 피부에 물리적으로 닿았다.


지직—!


미세한 전자기적 공명음과 함께 도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흠칫하는 통증이 일어났다. 모니터의 부정맥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지만, 지원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피눈물 같은 눈물이 고였다.


“그 사람이…… 그 꿈속의 청년이 마지막으로 뭐라고 했어? 말해, 권도현! 마지막 순간에 그 사람이 무슨 말을 남겼냐고!”


지원의 절규에 도현의 가슴속 심장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도현은 가슴을 찌르는 통증 속에서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비참하고도 슬픈 눈빛으로 자신을 쥐고 흔드는 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 가슴속에 든 죽은 유령을 갈망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면서도, 그는 기꺼이 그 고통을 수용했다.


“그 청년이…… 피를 흘리며 울부짖었어. 그 붉은 조명 아래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도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 귀에 환청처럼 들리더군. ‘미안해, 지원아……’ 라고.”


“미안해, 지원아…….”


그 한마디가 지원의 영혼을 송두리째 찢어발겼다. 그것은 진우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유언이었다.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혼자 남겨질 지원을 걱정하며 뱉어낸 피 맺힌 사죄.


“아아아악……!”


지원은 가슴을 쥐어짜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도현의 피 묻은 환자복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진우 씨…… 진우 씨……! 왜 거기 있었어…… 왜 그렇게 아프게 갔어……!”


지원의 눈물이 도현의 셔츠를 적셨다. 도현은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스스로가 비참하고 열등감에 가득 찼지만, 그의 손가락은 자발적으로 움직여 지원의 가냘픈 어깨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의 가슴속에서 뛰는 진우의 심장이 지원을 안아주라 속삭이는 것 같았다. 고통의 감정적 마취 효과가 두 사람을 기이하게 묶어주고 있었다.


한참을 울던 지원은 이내 눈물을 닦았다. 그녀의 눈빛은 슬픔을 넘어 얼음처럼 차가운 복수심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진우의 죽음 배후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반드시 파헤쳐야 했다.


지원은 떨리는 손으로 대포폰을 꺼내 한만수 반장의 옛 파트너이자 사설 탐정인 조달호 소장에게 연락했다.


“조 소장님…… 저예요. 서지원입니다.”


—서 교수님! 지금 장 형사 놈들이 저택을 포위했다면서요? 무사하신 겁니까?


“전 괜찮아요. 소장님, 지금 당장 청평 저수지 인근의 버려진 요양 병원…… 그 폐의원을 수색해 주세요. 진우 씨가 살해당하기 직전 감금되어 있던 곳이에요. 거기에 흔적이 남아 있을 거예요.”


—폐의원이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만수 형님과 함께 그곳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의 진눈깨비는 폭우로 변해 저택의 유리창을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지원은 주치의 방 침대에 앉아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가슴속에 고인 분노와 슬픔이 그녀를 질식시킬 것 같았다.


징— 징—.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대포폰이 진동했다. 조달호 소장이었다. 지원은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소장님! 찾으셨어요?”


—서 교수님…… 사진 한 장 보냅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보세요.


통화가 끊기고, 문자 메시지로 이미지 파일 하나가 전송되었다. 지원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해 사진을 열었다.


그것은 청평 폐의원 지하의 곰팡이 슨 차가운 콘크리트 벽면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카메라 플래시 불빛 아래, 벽면에 새겨진 거친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누군가 손톱이 깨지고 피가 터질 때까지 벽을 긁어 남긴 글자.


[지 원]


그 긁힌 틈새마다 3년의 세월 동안 까맣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글자 바로 옆에는, 메디팜(Medipharm)의 푸른색 로고 표식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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