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의 혈투, 터진 흉터
세인트 한강 병원에서의 폭풍 같은 대치극이 끝난 후, 북한산 자락으로 돌아가는 길은 지독하리만치 무겁고 고요했다. 서한길 실장의 추악한 비리를 폭로하고 의사 면허 정지 징계안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서지원의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징계위원회 회의실을 나설 때 제 등 뒤로 내꽂히던 서한길의 그 뱀 같던 눈빛이, 끈적한 살기가 되어 피부를 조여오는 듯했다.
저택으로 돌아온 지원은 곧장 이층 침실로 향했다.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남자, 권도현이 있었다. 지원은 가만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가슴 정중앙에 새겨진 선명한 Y자형 수술 흉터가 셔츠 사이로 도드라져 보였다. 그 흉터 아래에서 뛰고 있는 것은 3년 전 실종되어 살해당한 그녀의 약혼자, 한진우의 심장이었다.
지원은 깃 안쪽에서 은색 체인에 걸린 티타늄 약혼반지를 꺼내어 손끝으로 매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손가락을 타고 흐를 때마다 가슴이 저며왔다. 그리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 그녀의 이성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0321.’
몇 시간 전, 고통에 신음하던 도현이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뱉어냈던 그 숫자. 그것은 도현의 친어머니 강유선과 관련된 날짜도, 태성파의 비밀 자금 코드도 아니었다. 오직 한진우와 서지원, 두 사람만이 알고 있던 진우의 생일이자 그가 연구실에서 사용하던 모든 기밀 서버의 마스터 패스워드였다.
어째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 암흑가의 젊은 보스가 그 숫자를 알고 있는 걸까. 단순히 심장을 이식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자의 기억 세포가 산 자의 뇌 신경망을 지배하는 기이한 ‘세포 기억설’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진우 씨…… 정말 당신이 이 안에 살아서 나를 부르고 있는 거야?”
지원의 눈에서 기어이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도현의 창백한 뺨 위로 떨어졌다. 죽은 약혼자에 대한 뼈아픈 그리움과, 눈앞의 잔혹한 괴물에게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스스로를 향한 도덕적 자기혐오가 그녀의 내면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이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원은 도현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는 것조차 두려워 소파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깊어가는 밤의 정적 속에서 차가운 긴장감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새벽 2시 15분. 저택을 감싸고 있던 기괴한 고요함이 일순간에 깨어졌다.
쿠우웅—!
저택 외곽을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쇠창살이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오성파 잔당들이 야쿠자 커넥션 마사오의 자금 지원을 받아 대형 트럭으로 저택 외부 위병소의 철문을 그대로 들이받은 것이었다.
“적습이다! 전원 전투 준비!”
위병소를 지키고 있던 경호 요원 백상우가 무전을 향해 비명을 질렀다. 그는 급박하게 차단벽 제어 장치를 가동하려 했으나, 트럭에서 내린 괴한들의 무자비한 총격이 유리창을 뚫고 쏟아졌다. 백상우는 어깨와 복부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쓰러지면서도, 마지막 힘을 다해 저택 내부로 통하는 비상 폐쇄 버튼을 눌렀다. 붉은색 경보등이 저택 사면에서 미친 듯이 회전하며 고주파의 비상 사이렌을 울려댔다.
지원은 사이렌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3년 전 수술실에서 울리던 인공 심폐기의 경보음과 겹쳐지는 그 소리에 극심한 과호흡이 밀려왔다.
타타타탕! 탕! 탕!
거실 통유리창이 박살 나며 날카로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거친 총성과 비명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의사 선생! 당장 지하실로 내려가십시오! 탈출로가 차단되었습니다!”
현관에서 권총을 든 채 적들과 교전을 벌이던 행동대장 마강식이 이층 계단 아래를 향해 피 울음을 토하듯 소리쳤다. 마강식의 얼굴은 이미 적들의 피와 파편으로 얼룩져 있었고, 그의 검은 가죽 코트는 빗물과 화약 연기로 찌들어 있었다. 권태성의 사주를 받은 오성파 킬러들은 조직적인 사설 군사 습격조처럼 움직이며 저택의 모든 비상구를 차단하고 압박해 들어왔다. 마강식의 경호팀이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원은 계단을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지하 메디컬 룸으로 달렸다. 차가운 쇠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는 순간에도 외부의 폭음은 문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하 메디컬 룸은 붉은색 비상 조명 아래서 기괴한 백색의 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석에 놓인 휴대용 인공 심폐기(ECLS)의 액정 화면이 전력 불안정으로 인해 깜빡거리며 불길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지원은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수술 기구 트레이를 밀어 그 뒤편의 좁은 틈새에 몸을 숨겼다. 메스를 쥐던 그녀의 손가락이 공포로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쾅! 쾅!
얼마 지나지 않아 메디컬 룸의 육중한 강철문이 거친 발길질과 충격으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킬러들이 기어이 지하 깊은 곳까지 들이닥친 것이었다.
“여의사 년이 이 안에 숨어 있다! 생포해서 권태성 부두목님께 바쳐라!”
거친 목소리와 함께 강철문 틈새로 소총의 총구가 밀고 들어왔다. 지원은 수술 도구 트레이 뒤에서 무릎을 껴안은 채 숨을 죽였다. 딱딱거리는 이빨을 막기 위해 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콰아앙—!
마침내 빗장이 부서지며 문이 활짝 열렸고, 검은 가면에 방탄조끼를 입은 오성파 킬러 세 명이 방 안으로 난입했다. 그들의 군화 발소리가 지옥의 종소리처럼 지원의 귓전을 때렸다. 선두에 선 킬러가 방 안을 훑어보더니, 지원이 숨어 있는 기구 트레이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려 있었다.
지원의 시야에 킬러의 검은 군화가 들어왔다. 이제 끝이라는 절망이 전신을 덮치려던 그 찰나.
탕—!
귀를 찢는 듯한 단발의 총성이 메디컬 룸 내부를 관통했다. 지원이 숨을 들이쉬는 동시에, 그녀의 눈앞에 서 있던 선두 킬러의 머리에서 붉은 혈흔이 튀며 그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지원은 경악 어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하 메디컬 룸의 부서진 문턱에, 권도현이 서 있었다.
그는 반쯤 풀어헤쳐진 환자복 셔츠 차림이었고, 가슴의 정교한 이식 수술 흉터 부위는 이미 완전히 터져 붉은 피가 흰 붕대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상처가 찢어지는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그의 얼굴은 유령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턱끝에서는 차가운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굶주린 포식자의 그것처럼 매섭고 잔혹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현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이빨로 짓누르며, 특유의 ‘포커페이스 무언의 위협’으로 가득 찬 서늘한 안광을 뿜어냈다.
“내 저택에서…… 무슨 짓거리들이냐.”
도현의 목소리는 피를 삼킨 듯 낮고 긁히는 소리가 났지만, 그 안에는 거역할 수 없는 지배자의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남은 두 명의 킬러가 본능적인 공포에 질려 주춤하며 총구를 도현에게 돌리려 했다.
그 미세한 찰나를 도현은 놓치지 않았다. 도현은 쓰러진 킬러의 손에서 권총을 낚아챔과 동시에 몸을 날려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불꽃이 어두운 지하실을 번쩍이며 비추었다. 도현은 터진 가슴 상처에서 울컥 뿜어져 나오는 피를 개의치 않고, 괴물 같은 정신력으로 사격을 감행했다. 두 번째 킬러의 심장을 꿰뚫은 도현은, 마지막 킬러가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 하자 거구를 날려 그의 목덜미를 꺾어버렸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마지막 적마저 바닥으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메디컬 룸은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도현은 총을 떨어뜨리며 비틀거렸다.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피가 환자복과 바닥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지원은 공포도 잊은 채 트레이 뒤에서 기어나와 도현에게 달려갔다.
“권도현 씨! 가슴 상처가 완전히 터졌어요! 당장 지혈해야 해요!”
지원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찢어진 셔츠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도현은 제 몸의 상처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피 묻은 단단한 팔을 뻗어 지원을 자신의 가슴팍으로 거칠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차가운 지하실 공기와 달리 미칠 듯이 뜨거웠고, 지독한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섞여 있었다.
“무사했군…… 서지원.”
도현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안도감과 함께 깊은 집착이 묻어났다. 지원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가슴뼈 너머로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 고동을 느꼈다. 쿵, 쿵, 쿵쿠쿵. 여전히 진우의 삼차성 판막 마찰음이 선명하게 울리는 고동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지직, 지지직—
도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전자기적 마찰 소음이 청각을 자극했다. 심장 판막에 내장된 바이오 칩이 극단적인 아드레날린 분출과 스트레스로 인해 오작동을 일으키며 심전도 신호를 강제로 왜곡시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윽!”
도현이 갑자기 짧은 신음을 뱉으며 지원을 안고 있던 팔의 힘을 스르륵 풀었다. 그의 눈동자가 급격히 뒤집히며 초점을 잃어갔다.
쿵…… 쿵…… 쿵.
규칙적이던 심장의 박동 주기가 기괴할 정도로 느려지더니, 이내 거짓말처럼 완전히 멈추어 버렸다. 평탄한 무음만이 지하실의 정적을 채웠다.
“권도현 씨? 도현 씨!”
지원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도현의 거구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거운 무게감이 되어 지원의 가냘픈 어깨 위로 툭 쓰러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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