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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의 메스, 붉은 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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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의 밤은 유난히도 깊고 어두웠다.


하늘을 찢을 듯 몰아치는 폭우가 낡은 요양병원의 불투명한 유리창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강원도 접경지 인근,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이 요양병원의 야간 당직실은 서지원에게 일종의 유배지이자 은신처였다. 서울 세인트 한강 병원의 촉망받는 흉부외과 조교수. 그러나 3년 전 약혼자 한진우가 흔적도 없이 실종된 날 이후, 지원의 시간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감정이 거세된 수술 기계로 규정하며 밤낮없이 가혹한 당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었다. 오직 동생 지민의 독일 유학 자금과 사촌이 남긴 빚더미를 감당하기 위해서.


지원은 목가 가운 안쪽, 은색 체인 끝에 매달린 티타늄 약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각만이 그녀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지지대였다.


콰아아앙!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요양병원의 낡은 알루미늄 현관문이 통째로 뜯겨 나가듯 열렸다. 폭우가 들이치는 어두운 로비 너머로 비틀거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의사! 의사 새끼 어디 있어!”


피비린내와 빗물이 뒤섞인 악취가 진동했다. 난입한 사내의 목덜미에는 왼쪽 뺨부터 길게 이어지는 선명한 흉터가 빗물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태성파의 행동대장, 마강식이었다. 그의 거대한 체구 위에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은 젊은 남자가 업혀 있었다.


마강식은 남자를 거칠게 처치실 침대 위에 눕혔다. 남자의 하얀 셔츠는 이미 검붉은 피로 완전히 절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지원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가 남자의 흉부를 빠르게 스캔했다. 우측 흉벽에 선명하게 뚫린 구멍. 탄환이 갈비뼈를 부수고 들어가 폐를 관통한 총상이었다.


“총상이네요. 여기선 치료 못 합니다. 당장 큰 병원 응급실로 가세요.”


지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철컥.


그 순간, 마강식이 품 안에서 피 묻은 군용 단도를 꺼내 지원의 목덜미에 들이밀었다. 차가운 칼날이 가냘픈 목 피부에 닿자 미세한 핏방울이 맺혔다.


“헛소리하지 말고 살려내. 이분 잘못되면, 너도 오늘 여기서 목줄 끊기는 거야.”


마강식의 눈에 서린 살기는 진짜였다. 그는 요양병원의 출입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빗장을 질렀다. 외부와의 소통이 완벽히 차단된 고립무원의 공간.


지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대 위의 남자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권도현. 태성파의 젊은 보스이자 가문의 후계자. 그의 얼굴은 산소 부족으로 인해 이미 푸르게 변해가는 청색증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도현의 가슴이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호흡을 할 때마다 우측 흉벽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목의 정맥들이 터질 듯 팽창해 있었다.


‘긴장성 기흉(Tension Pneumothorax).’


폐에서 누출된 공기가 흉강 내에 갇혀 심장과 대정맥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5분 이내에 심장 허탈로 사망할 것이 분명했다. 당장 가슴을 뚫어 공기를 빼내야 했다.


“기흉이에요. 폐에 공기가 차서 심장을 누르고 있어요. 당장 감압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죽습니다. 하지만 여긴 수술실도 없고, 흉관 삽입 키트도 없어요.”


“만들어내! 의사라며! 살려내란 말이야!”


마강식의 단도가 지원의 목을 더 깊이 압박했다.


순간, 지원의 머릿속에 3년 전 진우의 마지막 수술실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붉게 물든 포와 멈춰버린 바이탈 신호음. 극심한 공황 발작이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안 돼.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지원은 가운 속 목걸이 반지를 손바닥이 찢어질 정도로 꽉 쥐었다. 날카로운 티타늄의 통증이 공황을 깨뜨렸다. 그녀의 강철 같은 멘탈이 심박수를 분당 60회로 강제 제어했다. 냉정함이 다시 그녀의 뇌를 지배했다.


“흡인기 가동해.”


지원은 구석에 방치된 구형 흡인기 전원을 켰다. 그러나 탈탈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내 전압 저하로 기계가 완전히 멈춰버렸다. 전력마저 나간 것이다. 기계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오직 야매 시술뿐이었다.


지원은 서랍을 열어 가정용 소독 알코올과 라이터, 그리고 문구용 커터칼과 플라스틱 모나미 볼펜 대를 꺼냈다.


“미쳤어? 그걸로 뭘 하겠다는 거야!”


마강식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살리고 싶으면 닥치고 조명이나 비춰요.”


지원의 단호한 목소리에 마강식은 자신도 모르게 압도되어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지원은 라이터 불로 커터칼 끝을 달구었다. 푸른 불꽃이 칼날을 따라 피어올랐다. 볼펜 대 역시 알코올로 빠르게 소독했다. 메스도, 카테터도 없는 극한의 상황. 오직 그녀의 지식과 손끝 감각에 도현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도현의 호흡이 완전히 멈추려 하고 있었다. EKG 모니터도 없는 상황에서 심박수가 급감하는 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일촉즉발의 순간.


지원은 눈을 감았다.


‘미세 혈관 절대 촉각.’


그녀의 마른 손가락이 도현의 젖은 가슴 팍 위를 빠르게 짚어 내려갔다. 쇄골 중간선에서 아래로 두 번째 갈비뼈 사이 공간(Second Intercostal Space).


보이지 않는 피부 조직 아래, 늑간 인대와 미세 혈관들의 위치가 그녀의 신경망을 타고 3D 입체 그래픽처럼 뇌리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갈비뼈 바로 아래쪽으로 지나가는 늑간 동정맥을 건드리면 대량 출혈로 즉사한다. 정확히 갈비뼈 윗부분의 안전한 경로를 찾아내야 했다.


지원의 손가락 끝이 도현의 두 번째 갈비뼈 위쪽 가장자리에 멈췄다. 여기다.


지원은 눈을 번쩍 뜨며 커터칼을 과감하게 내리꽂았다.


푸욱!


단단한 피부와 근막을 뚫고 칼끝이 흉막을 관통하는 거친 질감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피식--! 슈우욱--!


칼을 뽑아내자마자 갇혀 있던 고압의 공기와 검붉은 피가 거친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도현의 흉부를 압박하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지원은 지체 없이 소독한 볼펜 대를 그 틈새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임시 흉관이 완성되었다.


“허어억...!”


완전히 멈춰 있던 도현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며 그가 거친 첫 호흡을 내쉬었다. 청색증으로 푸르게 변했던 그의 입술에 서서히 붉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자발 호흡이 돌아온 것이다.


“살... 살았어...”


마강식이 칼을 떨어뜨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 박동을 직접 손끝으로 느끼며 안정 여부를 판단하려던 찰나였다.


지원의 마른 손가락 끝이 도현의 차가운 피부를 뚫고 전해지는 심장 고동을 감지했다.


쿵... 쿵... 쿵쿠쿵...


규칙적인 고동 사이에 기이하게 끼어드는 세 박자짜리 미세한 마찰음. 그리고 특유의 불규칙한 부정맥 파형.


지원의 척추를 타고 극심한 전율이 흘렀다. 이 박동 주기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지난 수년간 매일 밤 청진기로 들으며 눈물 흘렸던, 그리고 그녀가 직접 설계했던 특이 유전자 심장 판막의 박동 주어.


3년 전 실종되어 사망 판정을 받았던 그녀의 약혼자, 한진우의 심장 소리였다.


‘말도 안 돼... 왜 이 남자의 가슴에서 진우 씨의 심장이 뛰고 있는 거지?’


지원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녀의 손끝이 도현의 가슴팍 위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경악과 공포, 그리고 억제할 수 없는 혼란이 그녀의 온 신경을 마비시켰다.


그 순간, 침대 위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심연처럼 깊고 차가운 도현의 흑색 눈동자가 지원의 흔들리는 눈빛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빗소리가 고요해진 방 안에서, 오직 약혼자의 심장을 품은 남자의 붉은 고동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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