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객과의 조우, 그리고 기녀의 밀고
의선당 지하 치료실의 공기는 여전히 매캐한 약초 탄내와 검붉은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위천무는 차가운 돌침대 위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은침들의 흔적은 사라졌으나, 단전 깊은 곳에서 이글거리는 화독(火毒)의 잔열은 여전히 경맥을 갉아먹고 있었다. 담백현의 가혹한 금침 치료 덕분에 당장의 폭사는 면했지만, 기경팔맥에 가해진 타격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겨우 손가락을 까딱일 때마다 뼛속까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나으리,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지하실 구석에서 약초를 분류하던 은지가 급히 다가와 천무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천무는 그녀의 만류를 조용히 물리치며 침대 밑으로 발을 디뎠다. 그의 안색은 밤안개보다 창백했고, 삼베적삼 아래로 비치는 보랏빛 혈선들은 여전히 불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천무의 목소리는 갈라진 가죽처럼 거칠었다. 담백현 의원이 내린 석 달이라는 시한부 선고. 그것은 천무의 목을 죄어오는 가혹한 올가미와 같았다. 적양표국의 분타주 독고진을 사냥해 심장 속 혈고(血蠱)를 진화시키지 못한다면, 자신은 이 음침한 남만 변방의 흙바닥에서 개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천무는 벽에 기대어 있던 녹슨 철검을 챙겨 들었다. 아직 무경교의 보도인 묵혈도를 찾지 못했기에, 이 투박한 철검만이 그의 유일한 무기였다. 아철이 안대 너머로 고개를 기울이며 천무의 발소리를 쫓아 일어섰다.
“나으리, 저도 가겠습니다. 제 귀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천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철의 비정상적인 청력은 현철위의 잔혹한 실험이 남긴 흉터였지만, 지금 같은 도망자 신세에서는 가장 강력한 눈과 귀가 되어주었다.
두 사람은 의선당의 비밀 통로를 빠져나와 짙은 안개가 자욱한 대나무 숲길로 나섰다. 축축한 대기 속에서 약재를 구하고 적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오직 젖은 흙을 밟는 발소리만이 나직하게 울렸다.
바로 그 순간, 아철이 천무의 소맷자락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나으리, 멈추십시오! 전방 오십 보 밖, 숲의 기류가 찢어지고 있습니다. 아주 무거운 쇳덩이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입니다!”
아철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숲을 메우고 있던 자욱한 안개가 양옆으로 갈라지며 거대한 풍압이 몰아쳤다.
쿠우우웅!
거친 대나무 잎사귀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와중에, 한 사내가 안개 속에서 귀신처럼 짓쳐 나왔. 사내의 손에는 이가 군데군데 빠진 거대한 참마도(斬馬刀)가 들려 있었고, 그 칼날 끝은 정확히 천무의 목덜미를 겨냥하고 있었다. 사나운 바람을 동반한 패도적인 일격이었다.
천무는 본능적으로 신형을 뒤로 꺾었다. 무영보(無影步)의 기초 구결을 응용해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며 뒤로 미끄러졌지만, 참마도의 풍압만으로도 가슴팍의 삼베옷이 찢겨 나갔다. 사내는 거구의 체구에 거친 수염을 기른 낭인도객, 사도광(사도광)이었다.
“적양표국의 사냥개 놈들이 아니군. 하지만 돈 냄새가 나는구나!”
사도광이 짐승처럼 포효하며 참마도를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그의 무공은 정밀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일류 중기 수준의 압도적인 완력과 패기가 실려 있었다. 칼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매서운 금속성이 대나무 숲을 뒤흔들었다.
천무는 녹슨 철검을 들어 참마도의 궤적을 비껴내려 했다.
깡!
철검과 참마도가 맞부딪치는 순간, 이가 시릴 정도의 충격이 천무의 오른팔 경맥을 타고 단전으로 몰아쳤다. 단전에 잔존해 있던 화독이 충격에 반응해 요동치며 가슴을 옥죄었다. 천무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신음을 삼켰다. 완력의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정면에서 사도광의 참격을 받아내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하하하!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구나! 하지만 이 파산격(破山擊)을 막아낼 수 있겠느냐!”
사도광이 참마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며 대지를 향해 내리찍었다. 그의 전신에서 패도적인 외문 기공의 흐름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참마도가 바닥을 짓이기자, 흙먼지와 자갈들이 폭탄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천무는 급히 몸을 비틀어 파편들을 피했지만, 충격파에 밀려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호흡이 가빠지며 입가로 다시 검붉은 핏물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천무의 눈은 냉철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혈맥탐지술(血脈探知術)을 전개하여 사도광의 기경팔맥 흐름을 관찰했다. 사도광의 기력은 강맹했으나, 어딘가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인해 기류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때, 천무의 시선이 사도광의 등 뒤, 울창한 수풀 속에 가려진 작은 거적때기 침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깡마른 소녀가 누워 있었다. 사도광의 친여동생, 사도용(사도용)이었다.
천무의 눈이 좁아졌다. 소녀의 입술은 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전신에서는 서리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지독한 음한지증(陰寒地症)이었다. 사도광이 남만 변방에서 낭인 짓을 하며 칼을 휘두르는 이유가, 오직 여동생의 치료비를 벌기 위함이었음을 천무는 단숨에 간파했다.
사도광이 다시 참마도를 치켜들며 천무를 향해 돌진하려던 찰나였다.
천무는 검을 거두고, 무영보법의 변칙적인 신법을 전개해 사도광의 측면 사각지대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사도광이 경악하며 참마도를 돌리려 했으나, 천무의 목표는 사도광이 아니었다.
천무는 순식간에 수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사도용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사파 잔당 놈이! 내 동생에게 손대지 마라!”
사도광이 미친 듯이 소리치며 참마도를 던지듯 휘둘렀다. 하지만 천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오른손바닥을 사도용의 차가운 등 뒤 요혈에 얹었다.
그리고 단전 내부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뜨거운 화양성 진기(火陽性 眞氣)의 일부를 그녀의 기경팔맥 속으로 밀어 넣었다.
치이이익!
소녀의 등 뒤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천무의 손끝을 통해 주입된 화양의 열기가 사도용의 전신을 옥죄던 음한의 서리를 무서운 속도로 녹여버리기 시작했다. 파리하게 얼어붙어 있던 사도용의 안색에 순식간에 붉은 생기가 돌았고, 거칠던 호흡이 기적처럼 편안해졌다.
사도광의 참마도가 천무의 정수리 한 치 위에서 우뚝 멈춰 섰다. 대검의 풍압이 천무의 머리칼을 거칠게 흔들었으나, 천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도용의 맥을 짚고 있었다.
“……한기가 가라앉았다.”
천무가 나직하게 말했다.
사도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참마도를 손에서 놓쳐버렸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대검이 진흙 바닥에 박혔다. 그는 비틀거리며 여동생의 침상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따뜻해진 뺨을 만졌다.
“용이야…… 정신이 드느냐?”
“오라버니…… 몸이…… 따뜻해요……”
사도용이 맑은 눈을 뜨며 속삭였다. 평생 그녀를 괴롭히던 음한의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진 것이었다.
사도광의 거친 얼굴이 눈물로 얼룩졌다. 그는 천무를 돌아보았다. 천무의 오른팔 경맥은 무리하게 화양성 진기를 방출한 대가로 붉게 부풀어 올라 미세하게 파열되어 있었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심연처럼 깊고 흔들림이 없었다.
사도광은 주저 없이 천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바위 같은 거구가 진흙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쿵 소리를 냈다.
“내가 눈이 멀어 은인을 몰라보고 검을 겨누었습니다. 내 목숨을 거두어 가셔도 좋으니, 제발 동생을 살려주신 은혜를 갚게 해주십시오. 이 사도광, 오늘부터 은공의 사냥개가 되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천무는 묵묵히 사도광을 내려다보았다. 사파의 탁기를 품고 괴물이 되어가는 자신에게, 이토록 순수하고 뜨거운 의리를 지닌 우군이 나타난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천무는 사도광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피를 나누자. 오늘부터 우리는 의형제다.”
두 사람은 빗물 섞인 대나무 숲 아래에서 손가락끝을 베어 피를 나누었다. 사도광의 묵직한 충성심이 천무의 차가운 심장에 따뜻한 닻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천무는 사도광 남매를 데리고 은밀히 옥매 객잔(옥매 객잔)의 지하 비밀실로 복귀했다. 사도광은 은신처 주변의 경계를 서며 천무의 든든한 방패를 자처했다.
그날 밤, 객잔의 매캐한 담배 연기가 가득한 밀실의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분홍빛 비단 옷을 입고 요염한 자태를 풍기는 여인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적양표국 간부들이 드나드는 기방의 일류 기녀이자, 천무를 향해 연정을 품고 있는 정보원 소화(소화)였다.
“천무 나으리,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소화의 눈망울에 안도와 걱정이 교차했다. 그녀는 주위를 극도로 경계하며 품속에서 축축하게 젖은 가죽 지도 한 장을 꺼내 천무 앞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적양표국의 분타주 독고진의 심복들이 술김에 흘린 극비 정보입니다. 이틀 뒤, 적양표국이 남만 국경에서 밀무역으로 수집한 막대한 은자와 희귀 약재들을 실은 대형 수송 마차가 이 성벽 관문을 통과합니다.”
소화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협곡의 좁은 길목, 바로 남만 석교촌 인근이었다.
천무는 가죽 지도를 응시했다. 지도 위에는 적양표국이 남만의 소금과 독초 밀거래를 통해 거두어들인 사은자(沙銀子)와, 자신의 심장 속 혈고를 억제해 줄 희귀 영약의 수송 경로가 선명한 붉은 선으로 그려져 있었다.
복수의 서막이자, 생존을 위한 사냥터가 마침내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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